[개관] 1장에서 루이스가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2장은 루이스의 이 논리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2장 내용을 전개한다.

 


[반론1]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도덕률이란 사실상 인간의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처럼, 다른 본능들처럼 발전해 온 것이 아닙니까?(도덕률과 인간의 본능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


[루이스의 답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과 인간 본능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함


<예1>

위험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두가지 욕구를 동시에 느낌.

 1.  당장 달려가 도우려는 욕구(집단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2. 위험을 피하려는 욕구(이것은 자기 보전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충동 외에 <도망치려는 충동을 누르고 도우려는 충동을 북돋우라>고 말하는 제 3의 어떤 무언가를 내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즉 두 본능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고, 그 가운데 어떤 본능을 따라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이것이 두 본능 가운데 하나 일 수는 없다. 즉 제 3의 또 다른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이라는 것은 제 3의 욕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1,2번의 본능이 단지 건반 키들에 불과하다면, 제 3의 욕구인 도덕률은 마치 연주해야 할 곡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2> 두 본능이 우리 안에서 싸울 때, 강한 본능이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에 빠지 사람을 돕는 편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편을 더 바랄 것이다. 그러나 도덕률은 그래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도덕률은 옳은 충동을 원래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라고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건반은(본능 1,2) 자신을 다른 건반보다 더 크게 치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예3> 도덕률은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닌 또 다른 확인은 도덕률이 본능의 하나라며, 언제나 선하고 옳은 충동 하나를 우리의 내면에서 짚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란 없다. 모성애나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충동들은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과도한 충동은 악을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충동에는 원래 좋거나 나쁜 것이 없다.(심지어 보편적인 인간애도 그릇될 수 있다. 인간애를 핑계로 정의를 무시한다면 말이다)


도덕률은 본능 중 하나도 아니고 본능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도덕률은 본능들을 지휘하여 일종의 곡조(우리가 선이나 옳은 행동 이라고 부르는 곡조)를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다. 




[반론2]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도덕률이라는 것이 본성적인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 가치관의 영향력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루이스의 답변] 루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답변을 제시한다. 


1.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1) 우리는 누구나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혼자 자란 아니는 구구단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단이 단지 인간의 관습, 즉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서 낸것으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달리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2) 물론 학습을 통해서 좌측 통행, 우측 통행과 같은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수학과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는 것인데 루이스는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 시대 한 나라의 도덕관은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도덕관과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리고 그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2) 민족마다 다른 도덕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한쪽의 도덕이 다른 쪽의 도덕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또한 한 민족의 도덕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진보란 이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치의 도덕이나 지금 우리의 도덕에 우열을 나눌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둘(두 민족의 도덕관, 혹은 두 시대의 도덕관)을 비교할 만한 어떤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참 도덕>이라는 어떤 것과 비교해서 그렇다고 판단하는 행위가 아닌가! 진정한 <옳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루이스의 결론] '바른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종종 자연적인 '행동 법칙'이란 없다는 의심을 하게 되긴 하지만, 사실은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 말로 오히려 그런 '행동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반론에 대해] 300년 전 영국에서는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서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이란 말이오?


[루이스의 답변] 마녀사냥이 없어진 것은 더이상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지, 여전히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존재할 것이다. (마녀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 대가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그 힘으로 이웃을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고 날씨를 궂게 만드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살고 있다고 믿는 다면 아마 이 불쾌한 이적 행위자를 사형시켜 마땅하고 하는데 모두 동의했을 것이다.)


마녀가 없다는 지식의 진전은 있었던 것이지만, 이것을 도덕적 진보라고 볼 수는 없다. 집에 쥐가 없다고 쥐덫 놓기를 그만 둔 이를 인도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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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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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가 읽은 모세의 말씀을 읽고는 백성들은 울고 말았지요. 그러나 충분히 회개하고 울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성일 이었고, 즐거운 날이어야 했으니까요.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의 7일을 보냈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것이 일곱째 날 22일(15일부터 일주일을 초막절로 지키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곱째 날 24일이 되었습니다. 절기는 마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째달 24일에 사람들은 다시 모여 온 민족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이후에 새로운 언약 체결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다시 구하게 되지요.

 

[1차 정리. 내용정리]

1.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이스라엘 역사관

  1) 일곱째 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씀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함.

   (1) 낮의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함

   (2) 낮의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3)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은 단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2.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5- 37)

  1)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원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합니다.

  2)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심(7,8절)

  3) 애굽의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로 애굽을 치셨다.

   :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

  4) 시내산에서 강림하셔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다. 안식일 알리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 (11-15) 그 땅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거역했으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17절)

  6)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의 것을 차지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이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거역하여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다.(18-26)

  7) 그래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환란때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다시 구원하였으나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러기를 계속 반복하는 역사를 보냈다. 그래서 결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았다.(27-31)

  8) 앗수르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소서.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고, 그들이 우리의 소산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32-37)

3. 재 언약을 약속하는 귀환한 백성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였나이다.

 

[2차 정리. 성경 내용을 내 것으로 재정리]

에스라가 읽어 준 말씀에 순종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회개했고, 일곱째 날 15일에 7일간 초막절의 절기를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였다. 아마 에스라가 처음 말씀을 읽었을 때, 사람들이 회개의 마음으로 울려고 했던 것(8:8-10)을 성회이기에 즐거워하라고 했었던 것에 대해서 절기를 지나 따로 회개의 날을 잡아 진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백성들은 우선 이방인과의 절교를 하고, 죄를 회개했다. 한 낮의 사분의 일은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여 듣고, 또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레위인들은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인데, 그 분의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그리고 그 분은 성실하게 우리의 필요들을 채우며 인도해주셨는데, 우리 조상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큰 긍휼로 다시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도록 보낸 선지자마저 듣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결국은 하나님은 앗수르에 손에 이스라엘을 붙였다. 그러나 아주 멸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견고한 언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오니 하나님이여 돌이키시사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3차 정리. 묵상과 적용]

 1. 반드시 죄의 문제는 퉁치고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이들은 이들이 직면한 이 모든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계며,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성일이요 기쁨의 날이었다. 이들은 이들의 감정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맞춰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감정이 상하거나, 감정이 흥분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요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아팠고 슬펐지만,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초막절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났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갈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초막절을 마치고 이틀만에 다시 모였다. 본격적인 회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종종 회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무뎌진다. 잠시 회개의 내용들을 말한 후, 아니면 그 감정의 때를 놓치고 나면 회개에 대한 의식조차 잊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회개의 무게가 가볍기 때문이다. 통회, 통증있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의 파장이며, 느낌이었지 우리의 심비에 새겨질만한 아픔이 없는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귀환한 이들은 그런 회개는 아니었다. 이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달았던 본인들의 죄는 거대한 파도같아서 자신을 덮쳐왔고, 그 충격과 감정은 우리의 이성에 새겨지는 아픔이었다.

절기를 마친후 이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쉽게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쉽게 죄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아픔과 파장과 파멸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으로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아픔과 크기를 잊게 하는 복음이 우리를 방종으로, 무례함으로 교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긍휼이란 단어 만으로도 호의가 느껴진다. 그런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에 <크신>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긍휼>이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신 긍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긍휼을 베푸셨는지... 얼마나 많은 거절과 완고함과 교만에 대해서 다시 긍휼을 베푸셨는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너무나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긍휼하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은 참으로 크다라고 놀라고 감탄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긍휼하시다는 말씀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큰 죄를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는 큰 긍휼을 성경은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우리의 큰 죄 <<<<< 하나님의 크신 긍휼

믿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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