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 지난 주에 이어 요한일서 3장을 정리해 봅니다. 양극단적 표현으로 가득한 요한일서 3장을 대하면 늘 불편했는데(어떻게 해석하고, 우리의 형편에 해석을 끼워 맞추는 것 같아서...) 그런 불편함이 아직 없지는 않지만, 당시의 배경과 상황 그리고 요한일서를 읽는 독자들이 누구일까하는 질문과 함께 읽어간다면 좀 더 이해가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한마디로 요한일서는 교리를 위한 책이기 보다는 목회적 차원에서 교육과 권면을 위한 책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관점이 맞다면, 요한일서의 내용을 가지고 단순하게 문자적인 문구로 교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과정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시도해 봅니다.

[정리1. 내용정리]


1. 우리가 아버지께 어떠한 사랑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가? 우리가 알지 않는가?
  1)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미완성된 모습으로서의 자녀) 그러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다.
  2) 주를 향하여 이런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절)
  3)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다. 그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도 안다.
  4) 그 안에 거하는 자라면, 그분의 의도와 그분과 같이 범죄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6절)

2.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1)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 그러니 어느 죄까지 지어도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랑 하지도 말라.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죄를 지을 구상에 전렴하거나, 그것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 짓는 자신의 모습에 자책하고 마음아파 한다)
  3) 형제를 사랑하라. 이는 처음부터(구약의 율법부터) 들었던 말씀이고 지금도 유효한 계명이다.
   :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12절)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아우를 죽이지 않았는가?

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14절)
  1)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속에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2)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미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4.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1) 재물을 가지고 있는 자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겠는가?
  2) 우리가 사랑함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기에 (위로를 얻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정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5.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정리해 보면
  1)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2)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다.
  3)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한다.(24절)
  4)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정리2. 재정리. 큰 흐름과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 가면서 작성해 봄]

요한의 표현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지금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둘 수 있는 가장 넓은 경계선 상에 있는 자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못 지키는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 오히려 폐기된 것을 옳다고 여기는 자들로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리까지 나간 자들이며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으로 성도를 미혹하는 자들이다.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교회에 많은 성도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이들을 품고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가르고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렇게 때문에 더 이분화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중간하게 경계선 상에서 오락가락 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고 안쪽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좀 더 표현이 극단적이고 엄격하다고 보여진다.(이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인 성도들의 약함과 불완전에 대한 권면으로 생각하여 오해하기 쉽다. 그 대상과 입장이 다르고 목적이 다른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이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이며,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미워해도 될만한 정당성을 가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우리는 성경만 가르친다(문자주의)는 말에 속지 말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경전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신적 말씀으로 모두를 받아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지만, 그 문자라는 것은 어떤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서 표현되었는지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요한일서 3장은 극단적인 표현이 많다. 문자대로만 해석해야 한다면, 우리가 참 구원받은 성도라면, 죄를 지어서는 안되고 형제를 미워해서도 안된다. 만약 우리가 죄를 하나라도 행하거나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앞으로라도 행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요한은 독자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2:1)고 말한다.(역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범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요한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오히려 범죄하지 아니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문제가 있다고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9-10)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표현적인 차이를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해석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자칫 매우 성경적인것처럼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실제적 내용은 무시하는 해석을 하게 된다. (많은 이단들이 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 목사님은 성경만 가르친다. 성경을 성경으로만 푼다는 식의 자랑은 한 번 생각해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 교육적인 의도인가 교리적인 의도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또 잘 살펴야 할 것은 이 글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글인지 아니면 교육적(또는 목회적)인 목적으로 쓴 글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위해서 또는 목양적 차원을 위해서 때로는 강조하기도 하고, 다른 부분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는 교육이라는 측면, 목양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가능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교리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된다.

  난 요한일서의 내용이 교리적 표현 이라기 보다는 교육적(목양을 위해) 표현이라고 본다. 그래서 극단적인 이분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교리로 풀어가려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성경의 해석 원리 중 하나는 불명확한 것은 명확한 것으로 해석하라는 원리가 있다. 로마서를 비롯한 성경의 다양한 교리를 다루는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교리와 요한일서에 말하고 있는 표현이 다를 경우에는 무엇을 근거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요한일서의 내용을 근거로 다른 모든 내용들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을 기초로 해서 요한 일서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경우 요한 일서는 교리가 아닌, 교육적 차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목회적인 목적을 위해서 극단적 표현을 쓴 강조라고 보는 것이다. 그릇된 가르침을 가지고 교인을 미혹하는 이단적 집단을 향해 경고하고, 더 이상 그들과의 교류를 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한 '선'을 명확하게 그어주는 목회적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해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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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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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8장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저자의 진행속도에 우리 자신도 맞춰야 합니다. 저자가 빨리 지나가면 전체적인 큰 흐름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매우 천천히 이것 저것 꼼꼼히 보고 지나간다면 우리도 그런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할 말이 있어서 빨리 감기를 하기도 하고 더디게 감기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저자의 의도를 알고 그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

 

[1차.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라]

1.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의 계보(1-14절)

2. 모인 백성 중에서 레위인이 없음을 발견하고 레위인을 특별히 찾아 냄(15절)

1)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서 3일간 머무르며 백성과 제사장을 살핌(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음)

2) 에스라가 느디님 사람들을 통해 레위인들을 찾아 오라고 요청. 레위인을 찾아 옴

3. 에스라가 출발 전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겸비하여 기도함(21절)

1)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22)

2) 그러나 막상 출발하려고 하니, 평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3) 에스라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그 응답을 받았다.

4. 성전에 바칠 예물은 책임자를 정해서 따로 운반하도록 임무를 맡기다.

1) 에스라는 제사장의 우두머리 중 12명을 따로 세워서 성전을 위해 드린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맡김

2) 예루살렘 성전의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5.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귀환 유다인들을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셨다.(31-36)

1)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와 무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셨다.

2) 예루살렘의 제사장에게 금, 은 그리고 그릇을 무게를 달아보고 건네주었다.

3)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4) 에스라가 왕의 조서를 유다 총독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주자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

 

[2차. 본문의 내용을 내가 정리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정리] 이 때, 내용은 더욱 간단 명료해져야 하고, 강조점은 좀 더 선명해 져야 한다.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지원받고 예루살렘에서 오기 전 준비와 도착해서 제사드리는 모습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출발하기 전 세 가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첫째는 레위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레위인을 찾아오도록 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에스라는 성전 제사에 필요한 필수적인 사람을 꼼꼼히 체크했고,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을 채워서 귀환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성전에 드려진 은과 금, 그리고 그릇들을 잘 운반하기위해 제사장 중 12명을 따로 뽑아서 그들에게는 특수한 임무를 주었다는 것이다. 귀환하면서 에스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는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에스라의 인식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것이다. 물론 에스라가 왕에게 자신들을 호위해 줄 말과 마병을 요구했다면 왕은 허락해 주었을 것이다. 그라나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왕의 호위병을 의지해야지만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왕의 호위병을 거절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금식하고 간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대적과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셨다.

도착하자 주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성전을 돕는 역할을 했다.

 

[3차. 묵상 및 적용]

 1. 이방 땅에서 귀환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성전 기물 그리고 제사(또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중요성이 매우 대두된다.

   : 성전, 제사, 제사장, 레위인... 귀환 공동체를 생각할 때 이 요소들에 대해 잘 관찰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면서 잃어버린 결정적인 것은 나라 이전에 <하나님을 위한 성전 제사>다.

2. 에스라라는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자가 귀환하여 돌아오는 과정을 잘 진행한다.

  1) 돌아오는 사람의 계보를 파악해서, 레위인이 부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레위인을 채워서 데려갔다.

  2) 성전을 위해 드린 금은 그릇은 또 따로 제사장을 세워 책임지도록 했다.

  3) 안전을 위해서 왕의 힘을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 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유다 백성을 건저낸 지도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모세와 비견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도움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케 하심이라고 생각할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 권세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들의 도움을 거절할 수 있는 위엄이 있어야 한다. 아브람이 소돔 왕의 재물을 거절했던 것처럼(당신의 준 것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3. 하나님께서는 에스라와 귀환 백성들을 대적과  매복자들의 손에서 보호해 주시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형통하게 해주셨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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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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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매일 장별 묵상에 있는 것 중 하나의 묵상 방식 예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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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2장을 보자.

족보 형식처럼 사람 숫자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본문을 대하면 자세히 읽어야 하나,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는가 싶어서 패스하고 싶어진다. 나도 그렇고.. 사실 정독해서 읽어도 별로 건질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혹 뭔가 건저 올릴 수 있는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해 보자.

[1] 먼저 본문의 내용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다.(사실에 기초하지만, 내 프레임으로 재배열 해야 한다.)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사로잡혀갔던 사람들 중에서 고레스의 명으로 돌아온 자들의 명단

1) 총 인원수는 42,360명(64절) 그 외에 종이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64,65절)

2) 주로 지역별 자손으로 구별해서 인원을 말한다.

3) 특별한 인원 구성은, 제사장들(36) 레위인들(40), 노래하는 자들(41), 문지기

   의 자손들(42),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55)

4)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59절) 명확하지 않는 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했다.(62절)

 

2. 성전 건축을 위해 자발적으로 예물을 드리는 족장들이 있었다.(68절)

 

[2] 다음은 내가 정리한 내용을 중심으로 본문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재설명한다.(내 글로 서술한다.)

 

고레스의 명으로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온 자들의 숫자를 보여준다. 그 명단은 그들이 살았던 지역 출신으로 구별하는데(?) 이는 이들이 정확히 유다인인가에 대해 파악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던 것같다. 살았던 지역 외에 제사장과 레위인, 또한 제사를 위해 따로 구별되었던 노래하는 자나 문지기들은 따로 구별하였다.

또한 가문과 선조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는 일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제사장의 직분과 같은 일에는 소극적(확실하게 확인된 사람만을 세우는) 방식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환 자들의 인적 파악 문제가 정리가 되면서 동시에 재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족장들 중에 일부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성전을 건축하는데 헌신했음을 언급함으로 일이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지금까지 요약 정리한 것을 토대로 내 묵상과 생각들을 진전시켜 본다.

 

1. 귀환한 자들이 정통 유대인인가에 대한 공식적인 인증절차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구별된 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훗날 역사적으로 귀환 공동체의 후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에 매우 중요한 정보와 자료가 될 것이다.

2. 귀환자들 중에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와 같은 자들은 따로 구별하여 명시하고 있다. 이는 제사 의식, 예배 의식이 돌아온 귀환 공동체에도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준다. 결국 모세의 율법에 의존하여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구별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이것을 필수적으로 수행 했다.

3. 그 중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정확히 파악이 안된 사람들에게는 제사장의 직분과 같은 중요한 직분을 맡기지 않았다. 즉 사람을 세울 때 핵심적이고 명확한 구분이 있는 직분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세운 것이다. 결격사유가 없으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직무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검증에서 통과된 사람만을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를 세우거나 장로 혹은 안수집사를 세울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극적인 입장에서 직분자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하는 것이라 불완전하겠지만, 검증된 사람만 세우는 방식으로 지도자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말이다. 아마 디도서나 디모데전서에서 언급된 감독, 집사의 자격도 그런 측면에서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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