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7장] 우리가 익숙하게 들었던 표현들이 오늘 본문에 많군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레미야의 표현은 매우 자극적이며, 스토리를 연상케 합니다. 유다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는 표현, 여호와는 인간의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신다는 묘사, 불의한 자의 성공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에 그를 떠날 것이라는 비유..성경을 읽다가 보면, 문학을 배우게 됩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정리하는 작업]


1. 유다의 죄가 깊이 새겨져 있다.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다.

   (1) 너희의 자녀들은 항상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제단들과 아세라를 생각한다.

  2)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원수를 섬긴다. 

  3) 무릇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육신으로 그 힘을 삼고,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받음.

  4)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을 것이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마는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신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은 것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날 것이다. 


2. 여호와께 자신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재앙의 날에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예레미야

   (1)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2) 나는 목자의 직분을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습니다. 

   (3)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4)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3.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문과 모든 예루살렘의 문에 가서 안식일에는 스스로 삼가서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라. 

  2)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3) 그러나 이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했다. 

  4) 그러나 만일 너희가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다윗왕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리라. 하지만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하지 않고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파악한 내용을 다시 내 글로 풀어놓는 작업]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죄가 얼마나 깊고, 지울 수 없는 죄인지(돌이킬 수 없는 죄인지)를 표현해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고 표현되어 그것은 지워질 수 없으며, 감출수도 없음을 묘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잃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가며 원수는 섬기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할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람을 믿고 육신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해 보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불의한 자)이 누리를 향락은 자고새가 품은 알처럼 중년이 되면 날아가 버리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예레미야는 유다를 중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자신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은 목자로서의 성실을 다했다고 고백하며, 재앙의 날에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유다 백성들이 대표적인 죄악 중에 하나가 안식일이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안식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안식일에 왕부터 평민까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안식일에도 짐을 옮겨 장사를 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를 금하도록 지시했으나, 역시 이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면 다윗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이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으므로 멸망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정리3. 정리1과 정리2를 하면서 도드라지거나 새롭게 정리되는 내용들을 내 사고의 개념으로 풀어냄]


1.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늘 자기 백성을 생각하고 중보하던 예레미야가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진노와 재앙 중에서라도 자기 자신만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다. 원수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수치를 당할지라도 자신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자기만 살겠다고 기도하는 것같은 요청이 믿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가족들도 그 진노에서 건지겠다고 같이 나가지고 요청했음에도 오히려 비웃음만 당하자 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완악함으로,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에 새긴 백성들을 돌이키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다가올 재앙에서 자신 만이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사역에 한계가 있을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무지와 완고함은 그런 한계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한계를 느끼시는것처럼 보여진다. 더이상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들려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들아닌가? 우리의 죄는 어디까지 인가? 하나님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까지 가지 않는가? 


고집불통 인간의 완악함.


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 하나님은 아신다. 


누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렇게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심장(중심)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여 마침내 그 행실과 행위를 명확하게 밝혀 내신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 


유다는 우리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보여주는 백성이다. 이들만의 모습이 아니고, 우리 인류 전체의 모습이고  실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우리의 거짓됨과 부패를 잘 모른다. 나 자신의 이야기 이지만, 가장 잘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나의 거짓과 나의 부패를 인식한다면, 우리는 교만할 수 없다. 늘 조심하고 신중할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 외부적인 존재의 객관적인 비평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귀를 막고 만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넘어, 거짓과 부패를 보지 못하니 무슨 개선이 가능하며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를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3. 불의한 자의 성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고새가 품은 알과 같은 것이니, 부러워하지 말라.


자고새는 다른 알을 품고 결국 그 알은 자고새를 떠나 날아가 버린다. 불의한 자가 품고 있는 부와 성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결국은 주인을 찾아 날아갈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곧 날아갈 부와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고새를 부러워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라도 부와 성공을 품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자기 것도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품고 있을 자가 당하게 될 허망과 부끄러움을 우리는 더 크게 보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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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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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장은 두 부류의 권위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2:15을 포함해서) 첫째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도의 권위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 정치권력의 통치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적 사고가 편재하고, 탈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권면같지만,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1. 목회자의 권위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2:15)

목회자가 권위로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말이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것이다. 권위주의란 자기 스스로가 권위의 근거가 되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건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면과 책망의 내용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권면하고 책망하는 근거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을 때, 그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시행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권위있는 내용이 가벼운 것이 되지 않도록 품위를 잃지 않아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포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고 보여주는 목회자와 성도(교회)가 걸맞는 포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 불교의 권위는 사제와 승들의 자기 희생적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목회자와 교회의 삶에 모습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품위있는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며 자신의 꾸밈에 있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편하다고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2. 통치자의 권위

  통치자들에게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기에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악을 지양하고 선을 격려하는 것이 기본일찐데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잃게 만드는 것은 공직자들(권세자들)의 부정과 부패다. 권위는 인정하되 그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묻고, 밝혀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방치된다면 국가의 권위라도 정당한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감시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든 국가든 권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잃어지지 않도록 목회자와 성도는 품행을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도다운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공직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권력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의 권위가 살고,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제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절차가 옳아야 한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하면 그 권위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이다, 비민주적이다라는 것은 그런 절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통진당의 행태를 보면서 만약 당권파가 다시 당 권력을 장악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권위가 실리겠는가 생각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당을 장악한다고 하더라고 그 당은 금세 무너질것이고 지리멸멸해 질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권위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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