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1. 대학생들이 독립적이지 못한 이유. 일종의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다. 
2. 가족의 문제는 소통이 답이 아니라, 감정노동을 한 사람이 아닌 가족 모두가 분담하여 하는 것이다. 

지금은 대학생들은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기가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의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부모에게 기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반면, 부모는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책임져줄만 하다.) 그것으로 인해 대학생들은 채무자의 심정으로 살아간다.
건강한 가족은 단순히 말이 많고 의사소통이 잘 되는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정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옵션과 같은 것이다. 소통보다 우선인 것은 <가족들을 향한 감정노동>이다. 이것을 통해 가족은 유지되고, 나름 힘들지만 서로 그와 같은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전까지 어머니만 해오던 감정노동을 가족 전체가 나누어서 해야 한다. 소통은 그 다음에야 생각해 볼 문제다. 

질문1: 대학생들은 부모에 대한 일종의 채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무게가 상당히 무겁다. 그런가?
질문2: 감정노동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 공동체의 유지는 감정노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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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편적인 인식: 
요즘 대학생들은 '성장'이 멈췄다. 대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엄마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대학생들의 생각과 상반된다. 그들은 독립을 꿈꿨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독립을 두려워한다.

2. 과연 그런가?
우리가 규정하는 대학생들이 보편적인 대학생들일까? 부모의 테두리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역할을 할수 있는 사람은 특권층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

3. 현실
부모의 제공이 안락함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삶을 산다. 과외나 알바를 통해 부모의 짐을 덜어준다는 것은 오히려 어렵다. 부모는 돈을 대줄테니 공부에 집중하여 취업을 잘 하라고 하지만 취업조차 쉽지 않으므로 부모에게 더욱 면목이 없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밥버러지, 잉여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 과거 대학생들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은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4. 한국 가정의 문제
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가정.
의무적인 활동만을 하는 곳이 됨. 하숙집이 되어 버림.

5. 가정 문제의 해결 방법/그릇된 해법이 오히려 더 큰 짐을 지운다.
감정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공동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견딤을 통해서 공동체는 형성됨. 가정노동이 없는 가정, 노동은 없이 쉼만을 생각하면 가정은 하숙집이 됨.
그 동안 한국 가정에서 엄마만이 감정노동을 해왔다. 엄마만이 감정노동의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엄마에게는 많은 한탄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사회는 소통이 답이라고 말한다.
소통이란 감정노동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하다. 대부분의 가정은 감정노동을 통해 가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소통이 원활해야 건강한 가정이라고 규정하는 이데올로기가 이미 가정 안에서 건강한 감정노동으루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노동을 무가치하게 보거나 혹은 추가적으로 소통까지 잘 해야 한다는 불필요한 짐을 지우게 되었다. 그래서 건강한 가족임에도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여 더 힘들게 한다.

감정노동이 필요없는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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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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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늦었네요. 월요병인가요...^^ 아침에 푹잔것도 있고 죠이에서 오전에 직원예배가 있었던 것도 있고.. 암튼, 때를 놓쳤지만 쉽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장점입니다. 숙제하듯이 오늘도 한 장 정리해 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작업]

 

1. 요아스 왕의 성장
  1) 요아스 왕은 예후 7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40년간 통치하였다.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
  3)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했다.

 

2. 요아스가 성전을 보수하는데 집중하다.
  1) 요아스가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가지고 성전의 어느 곳이든 파손된 곳을 수리하도록 제사장들에게 지시했다.
  2) 요아스 왕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요아스 왕 23년에 이르도록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다.
  3)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에게 지시하여 그들에게 은을 받지 말게 하고, 사람들이 성전에 드리는 은은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해서 드리게 하도록 지시했다.
  4)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들에게 은을 받지 않고 성전의 파손된 곳을 수리하지도 않기로 동의하였다.
  5) 그 이후로는 성전문 어귀에 한 궤에 구멍을 뚫어 제단 앞에 두게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도록 했다.
  6) 그 궤에 은이 차면, 그것을 계산하여 봉하고 성전 맡은 자의 손에 넘겨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들에게 주고,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도록 했고, 수리에 필요한 자재를 사는데 그 은을 쓰도록 했다.
  7)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그 은을 은대접이나 불집게 주발이나 나팔이나 아무 금그릇이나 은 그릇도 만들지 아니했다. 오직 성전을 수리하는 것에만 사용했다.
  8) 그 일꾼들에게 은의 사용에 대해 회계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했기 때문이다.
  9)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지 않고, 제사장에게 돌렸다.

 

3.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올 때 내린 요아스의 결정
  1) 그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가드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2) 요아스는 역대 왕들이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주니, 하사엘이 떠나갔다.
  3) 요아스는 마지막에 신복들의 반역으로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죽임을 당했다.
  4) 요아스를 죽인 신복들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다.
  5) 요아스는 다윗 성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었다.

 

[정리2. 내용을 다시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다시 정리함]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해서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요아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호야다는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렸고, 요아스 또한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도움을 받는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요아스가 성장하여 독자적인 일들을 진행하고자 할 때, 한 문제가 발생했다. 요아스는 성전에 드려지는 은을 가지고 성전을 보수하여 더 아름답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제사장들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그 일이 오랫동안 진척이 없었던 것 같다. 이를 답답하게 여겼던 요아스는 기존의 대제사장인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그 일에서 손을 때게 하고, 다른 방식으로 성전 보수의 일을 진행했다. 성전에서 생기는 모든 재정적인 수입은 성전을 보수하는 일에만 전적으로 쓰도록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충성스럽게 일하는 일꾼들에 의해서 잘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요아스가 독자적인 사역을 하면서 성전을 보수하는 일에 있어서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갈들을 겪게 되고, 둘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이 일에 있어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성전 보수가 일이 잘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요아스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일 이후에 아람의 예루살렘 침략을 언급하면서, 요아스가 결국은 아람의 하사엘에 왕궁과 성전의 금을 내어주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요아스의 죽음이 비참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 대제사장 여호야다와의 갈등으로 그와 분리되게 됨으로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볼 때, 저자는 요아스가 여호야다와 분리되게 된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요아스 왕도 이젠 독립이 필요했다.

 

요아스는 왕이 될 때부터 제사장 여호야다의 전적인 도움을 입은 왕이다. 요아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가 7세였기에, 그 이후로도 상당한 시간동안 제사장 여호야다는 왕을 지도했고, 요아스 왕은 그의 지도를 따라 국가를 통치했다. 성경은 그 시절이 좋았다고 언급하고 있다.(2절)

 

그러나 이제 요아스의 나이 30세가 되었다.(6절) 요아스도 어른이 되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는 왕이 아닌, 왕 요아스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여호야다와는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왕이 지시한 일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 무리를 통해서 실천되고 있지 않은 것이고, 왕은 그것에 대해서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요아스 왕은 결국 여호야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그것은 여호야다를 그 일에서 배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요아스와 여호야다는 분리되게 된 것이다.(7,8절)

 

요아스도 왕이다. 왕은 주변 신하들의 도움과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결국은 왕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왕이 된다. 이제 요아스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요아스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여호야다와의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직접적으로 요아스의 이와 같은 갈등을 비판하고 있지 않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한 한 사람, 독립한 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선하고 옳은 사람이라고 할찌라도, 결국은 갈등과 대립의 순간을 맞는다.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독립이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나의 기도제목은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바르게 잘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 구실을 잘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기도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아들 모습을 볼 때, 그와 같이 되지 못할까봐 걱정이 많기 때문이다. 훈계를 해도 듣지를 않고, 매를 들어도 잠시 뿐이다. 부모로서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왔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요아스의 독립을 통해, 내 아들의 독립을 보게 된다. 정신적인 지도자인 여호야다와의 갈등이 그의 독립 선언이었던 것처럼, 지금 나와 내 아들이 직면선 갈등은 탈선과 반항이 아닌, 내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독립 선언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독립하는 요아스를 향해서 여호야다가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고, 요아스의 고집스러운 제안에 동의했다.(8절) 그렇게 요아스는 독립해 갔고, 그렇게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보내준 것이다. 나와 아들... 영원히 어린 아이가 아님을 기억하며 그는 내게서 독립하여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 잠시 나를 밀치고 나갈 것이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주어 그가 독립된 인간이 될 기회를 허락해 주어야 한다. 불안하기에 기도하면서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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