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의 결론은 한마디로 멘붕이다. 충격이며 당혹감이다. 이게 정말 이야기의 끝인가를 확인하고자 책장을 앞뒤로 넘기게 된다.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 라는 관리의 허무한 죽음을 다룬 <관리인의 죽음>도 그렇고

<드라마>라는 작품에서 파벨 바실리치 라는 주인공이 한 여인을 살해하는 동기와 배심원의 판결도 그렇다.

<공포>,<베짱이>,<베로치카>라는 작품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잘려나간 것처럼 끝나버린다. 

  _ 그 다음은 아직 안읽어서 모르겠지만...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말로 하면 멘붕이 가져다 주는 효과를 체호프는 노리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을 읽고 나면 독자는 당황한다. 저자가 독자의 상식과 기대를 과감하게 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의 결론이 완전한 비상식은 아니고 어쩌면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상 일에 대해서 낭만적으로 보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멘붕은 현실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너무 낭만적이고 낙관적이었던 우리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우리의 코 앞으로 가져온다.

정신 세계에서 일어나는 멘붕은 어쩌면 다행이다. 

다시 현실을 보게 해주는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멘붕의 경험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현실적 토대 위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바른 기초를 가지게 된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멘붕의 상황을 만나 절망에 이르게 되었다면 이것은 진실로 절망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절망은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인데, 그것은 우리가 현실 세계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현실 부적응자임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멘붕은 선을 이루기 위한 필수코스다. 기독교의 구원이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회개,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멘붕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지금의 멘붕은 선을 이루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안톤 체호프는 멘붕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약간의 혼동을 준다. 멘불을 일으키도록. 독자는 그 덕분에 생각을 한다. 어떤게 실재인가? 내 머리 속 낭만적 결론이 실재인가 아니면 체호프의 결론이 실재인가? 안통 체호프의 단편은 이 시대의 설익은 낭만을 떨어뜨려, 냉혹한 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도록 우리는 안내한다. 


멘붕 이전에 미리 예방주사처럼 맞아야 할 내용을 사후에 맞은 격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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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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