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져있는데,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거명하며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에 있어서 감동적인 내용을 다룬 장인데, 이 글을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3가지 지침이 있다. 

1. 과거 믿음의 선조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으로 살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2. 믿음으로 살것을 요청한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지금 당장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들을 얻거나 누리면서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라는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은 바라는 것이 성취되지 못하는 시대요, 약속했던 것을 얻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오히려 빼앗기고 고난당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원래 믿음이란 이런 상황을 뚫고 약속하신 분을 믿은 것이기에 그렇다.

3. 궁극적인 믿음은 자기 자신의 믿음이 이와 같은 결실을 만들어냈다로 가면 안된다. 왜냐하면 신실하심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때가 되어 성도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고 성취해 주셨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그 성취를 볼 수 있는 자리에 가느냐 못가느야의 믿음인 것이다.

아래의 글은 히브리서 11장 33-38절을 그대로 옮긴 글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능력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배교하도록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죄악의 낙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누리를 고난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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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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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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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히브리서 9장에 대한 내용 정리를 해봅니다. 복잡할 것 같은 내용도 논리적 전개를 따라 저자의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좀 더 단순화될 수 있고, 강조점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익숙한 구절이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되는 것도 발견합니다.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와 같은 구절들은 본 장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아닌 구절인듯 합니다. 물론 조연으로서 필요한 구절임은 당연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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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첫 언약)에도 제사장이 성막에서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법과 성소는 비유지 실제로 온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혁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 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장막으로 들어가셨다.

따라서 옛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그 백성들의 부정을 정결하게 했다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완전한 제물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지 못하겠는가? 충분히 넉넉히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 동물의 피(죽음을 통해)가 있을 때 죄사함의 효력이 인정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피)이 있어야만, 유언한 자의 죽음이 유언의 효력시점이 되듯이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의 효력시점이 되는 것이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역사적 시점이 성도가 죄를 사함받는 역사적인 시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것을 번거롭게 여러번 하신 것이 아니라(구약의 제사장은 여러번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물 효과의 불완전함 때문에) 마지막에 단 한번으로 모든 죄사함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다시 나타나시겠지만 이것은 또 다른 죄사함을 위함이 아니다. 죄와 상관없이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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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에는 좀 민감한 구절이 들어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4-6절)

이 구절은 성도인 우리에게 두가지 고민을 줍니다.  

1.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그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배교할 경우)

2.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 3,4장을 보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피차 권면헤서 서로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떠나 가는 것을 염두해서 한 말일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하나의 원인일 것이며, 또하나 기독교가 유대교와 뭐가 다른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다시 옛날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후자에 대한 상황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구약의 천사, 모세등과 같은 월등한 존재들보다 현격하게 월등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중간 중간 이스라엘 중에서도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중간에 믿음을 버리고 권고와 충고를 듣지 않았던 완곡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본다면, 히브리서 6:4-6의 의도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 두가지 질문에 대해서, 지금껏 알고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본다.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한번 얻은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지금 현재의 모습이 어떠냐에 따라서 역으로 확인을 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7-8절에서 땅에서 쓸만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받는 것처럼 결국 무엇이 최종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신앙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본서는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옮겨 가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마지막까지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참된 구원받은 백성임을 다시 확인해 주려고 하고, 떠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경계하려고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기를 바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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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씩 정리해 오던 글이 벌써 히브리서까지 왔습니다. 조금만 집중하면 얼마 안가서 계시록까지 갈 수 있겠네요^^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남에 대해 표현한 내용입니다. 특히, 천사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천사보다 훨씬 뛰어난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야 당연히 하나님이신 예수가 천사보다 뛰어나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천사를 거의 신과 같은 존재처럼 여기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 천사 앞에 경배하는 장면이 두번 나오는데, 천사가 자신에게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오히려 말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것보면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을 통해서 천사와 비교하여 <그 아들>이신 예수의 탁월함과 성도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천사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을 히브리서 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천사들에게는 언급한 적이 없는 말씀을 그 아들에게는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1) 천사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아들이신 예수에게는 그렇게 하셨다.(5,6)

   2) 천사들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신 적이 없다. 물론 그 아들에게는 하셨고, 지금 그 아들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13절, 3절)

  3)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영원하다.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은 다 멸망하고 옷과 같이 낡아지겠지만.(10-12절. 천사도 피조물중에 하나이므로)

  4) 천사들에게는 오직,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의 불꽃으로 삼으셨다는 표현만 있을 뿐이다.(7절. 그 아들의 도구와 방편으로 천사가 쓰임)

 

2. 결국 천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14절)이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사는 뛰어나고 놀라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이나 그 아들과 견주만한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천사는 그 아들의 종이요, 더 나아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종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유익을 누리지만, 그렇다고 그를 경배해야 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더불어, 천사를 종삼으시고 그 보다 훨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되게 경배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 히브리서 1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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