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에스라 9장입니다. 천신막고 끝에 도착한 예루살렘에 와서 들은 첫번째 보고는 참으로 참담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비통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죄라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쉽게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1차. 본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재배열 하도록 힘씁니다.]

1. 에스라의 귀환 후에 본 예루살렘의 형편(1-2)

1) 방백들이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방사람들과 통혼함 고백.

: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을 그 지방 사람들과 섞이게 함.

2) 그 중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함.

2.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반응(3-5절)

1)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자리에서 떠나지 못함.

2)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에스라 주변으로 몰려들게 됨.

3)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아 있다가, 제사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함

3. 에스라의 회개 기도의 내용(6-15절)

1) 하나님 내가 하나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2) 우리가 조상 때부터 이런 죄악을 행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왕들의 손에 우리를 넘겼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에게 잠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고 소생케 하셨는데(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가 있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또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10절)

4) 또 다시 이방인과 통혼함으로 말미암아, 더럽게 하였으니 우리 중에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2차. 정리한 내용을 이제 자신의 것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메시지의 크기와 집중도에 따라 재배열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1.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로 2차 귀환한 에스라. 어려움을 극복하며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예루살렘에서 들은 그곳의 형편은 참담한 것이다. 성전만 회복되어 있지, 이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에 조상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우상 숭배와 통혼으로 인해 하나님의 땅과 백성을 더럽혔던 선조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들은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일을 방백들과 고관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앞서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털과 수염을 뜯는 것 말고, 자리에 맥없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에스라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한다.

3. 기도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기도하기에도 부끄럽습니다. 감히 부끄러워서, 죄송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전의 선조들의 죄로 진노하셨다가, 자비를 베푸셔서 그 중에 남은 자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인데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을 백주대낮에 하고 있으니.. 하나님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기도 내용이다.

4. 아, 어쩌란 말이냐? 도대체 이 민족은 어쩌란 말이냐? 한두 번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살려달라고 기도조차 할 수 없다.(왜? 살려주면 뭐하냐 또 그렇게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

 

[3차.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에 있어서도, 일반 백성들이 지는 죄와 방백과 고관들이(제사장과 레위인까지) 주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상당히 차원이 다르다.(2절)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경우라도, 그것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바르다면, 백성들의 죄는 시정되거나 충분히 견제 될 수 있다. 따라서 쉽게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 죄에 있어서 으뜸이 된다는 것은 그 죄를 막을 제어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회는 자생적인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는 결국 민초들의 폭동으로 전복되는 결과 말고는 다른 변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에스라는 귀환한 공동체에서 이런 모습을 본 것이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틀 아래에서 우리는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권세가 악을 조장하고, 불의를 일삼으며 오히려 정의를 왜곡하는 자의 편에 서서 의를 버리고, 거짓을 조장한다면... 도대체 그 권세을 따라야 할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권세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와 같은 권세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서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롬 12장에서 말하는 정당한 국가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과연 여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도층의 타락, 특히 불의를 조장하고 거짓으로 약한 자의 작은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거나, 그것을 돕는 권세는 브레이크 없는 덤프 트럭과 같다. 

 

2. 귀환한 백성들도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귀환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스라나 느헤미야나 처음 장면과 달린 마지막 장면은 우울하다.  구별되고 선별된 백성이었지만, 결국은 선조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회복시키셨는데도 그리고 그 중에서 엄선된 사람들, 엄선된 백성들인데도 결국은 또 원래의 모습(죄의 지배를 받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라가 다시 노력하고, 느헤미야가 다시 노력하지만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제 혈연적으로 남겨진 백성만으로는 진정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도 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회보시킬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돌아온 유다 백성도 아니라면,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아니라면 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선지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가? 

이런 궁금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는 것은 아닌가 본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언약백성들이 가지는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세로은 세계를 열고 등장하시는 것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히브리서 10장은 앞에서부터 계속 말하고 있는 논리를 이어가는 것 같다. 옛 언약은 불완전하기에 폐기한 것이고, 폐기한 것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논리가 반복된다.

히브리서의 10장의 특별한 가치는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전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끝까지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죄에 대해서든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어 줄만한 내용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우선, 히브리서 10장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들의 내용을 보자.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믿었다가 버린 행위(적극적 배교)는 속죄가 없고 심판이 있다.

2. 한 번 비췸을 받은 자가(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완전함을 아는 자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버린다면 그가 받을 형벌은 얼마나 크고 무섭겠는가?

   : 구약시대에도 두 세증인을 통해서 심판에 이르렀는데, 성령과 아들이 증인이 되어 배교한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

문자적인 내용만으로 본다면, 충분히 의문이 들만한 내용이다. 우선 배교(믿었다가 믿음을 버리는 행위)가 가능하며, 그로 인해 속죄 불가능한 상태(구원이 취소되거나,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더불어, 한 번 비췸을 받은 자(우리가 볼 때, 스스로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믿음을 버리게 된다면 큰 형벌(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언급한다.

       ***

1. 구원얻는 믿음을 가졌다가도 고난과 환난으로 인해 그 신앙을 버릴 경우에 대해서 

   1) 소극적인 배교:기독교가 참된 종교,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시험이나 환난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 때문에 잠시 시험과 환난을 피하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소극적인 배교라고 보자.

   2) 적극적인 배교: 처음에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대상이라고 알고 믿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든지 아니면 환난과 시험 속에서 그와 같은 믿음이 바뀌게 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떠난 경우는 적극적인 배교라고 본자

  : 히브리서 10장 후반에 나오는 내용에 적용되는 경우는, 적극적인 배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음과 신앙이 연약하여 임시적으로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버린 것 처럼 행동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르다고 본다. 시험과 환난의 때를 지나든지 아니면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어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회복되어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그와 같은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두려움때문에 세번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것은 적극적인 배교는 아니었다. 두려움에 기인한 임시적인 배교행위였고, 그는 주님께 회개했으며 주님도 그를 다시 받아 주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을 보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사람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요청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 실망하고,예수님께 실망하고는 다시 세상으로 혹은 유대교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 속죄의 기회가 다시 오리라는 것은 어려울 듯 하다.

 

2. 따라서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신앙고백이 미래의 구원을 기계적으로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의 문제는 언제나 현재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 지금 내가 구원의 신앙을 고백한다면, 나는 미래적으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측면에서의 구원의 확신이다.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을 고백할 수 없다면, 미래적인 구원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3. 히브리서 10장 후반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적극적 배교자의 위험한 결론을 알리려는 것도 있거니와 더불어 그와 같은 위험한 결정이니(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와 같은 자리에 가지 않도록 힘쓰라고 권면하기 위해서 쓴 글이라는 것이다. 초점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뒤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교리를 바울과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구원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함으로 구원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그리고 헛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신앙 가운데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더 나은 소망을 간직한 채 인내함으로 견디라. 하나님은 잠시 후에 오신다.

 

완벽한 해설(교리적인 측면에서 칼빈주의냐 알미니안이냐 하는 명확한 선을 긋지 않음)은 아니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히브리서 6장에는 좀 민감한 구절이 들어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4-6절)

이 구절은 성도인 우리에게 두가지 고민을 줍니다.  

1.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그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배교할 경우)

2. 신앙과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 3,4장을 보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피차 권면헤서 서로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성도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떠나 가는 것을 염두해서 한 말일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하나의 원인일 것이며, 또하나 기독교가 유대교와 뭐가 다른지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다시 옛날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후자에 대한 상황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구약의 천사, 모세등과 같은 월등한 존재들보다 현격하게 월등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중간 중간 이스라엘 중에서도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중간에 믿음을 버리고 권고와 충고를 듣지 않았던 완곡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본다면, 히브리서 6:4-6의 의도는 우리가 염려하는 그 두가지 질문에 대해서, 지금껏 알고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본다.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한번 얻은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지금 현재의 모습이 어떠냐에 따라서 역으로 확인을 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7-8절에서 땅에서 쓸만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받는 것처럼 결국 무엇이 최종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신앙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본서는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옮겨 가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마지막까지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참된 구원받은 백성임을 다시 확인해 주려고 하고, 떠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경계하려고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돌아오기를 바람으로 말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