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도덕, 즉 그리스도인의 '순결'(chastity)이라는 덕목에 대해서


1.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결'과 사회적 규범인 '정숙함'(modesty)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1) 정숙함은 예의 범절 중 하나인데, 이 규범은 주어진 사회 집단의 관습에 따라 생긴다. 

     예) 노출 정도, 대화의 주제 허용 범위 등 따라서 시대마다 바뀜

  2) 그러나 순결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 태평양 제도의 소녀나 옷을 칭칭 감고 살았던 빌토리아 시대의 숙녀나 다른 의상을 입었음에도 동일하게 정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순결'에 대한 기준은 서로 있어왔다. 

  * 욕정을 일으키려고 예의범절을 깨뜨리는 것은 순결을 범하는 것이지만, 무지와 부주의로 깨뜨리는 사람은 그저 예의없는 것에 불과하다.  


2. 순결은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덕목이다. 


  1) 성욕은 식욕하고 다르다. 식욕은 종종 식욕의 본능을 넘어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사람의 성적인 욕망을 모두 허용한다면 엄청난 사회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다. 


    (1) 스트립쇼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 만약 먹는 음식을 보여주는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볼 것이다. 물론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오늘날 이시대가 과거 빅토리아 시대(스트립쇼 공연이 없던 시대)보다 성적인 소비가 적은 시대일까요? 더 풍요로운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적인 욕구에 있어서 만큼은 끊임없는 욕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 성적인 욕구는 음식에 대한 욕구와 다르다. 음식 아닌 것을 먹거나 음식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적인 욕구는 그런 방식으로 점점 극대화된다. 사람들은 억제된 성욕이 변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성욕을 억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난 20년간 성에 대한 쉼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욕은 건강해 졌는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 더욱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성에 대해서 쉬쉬해서 골치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치거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했던 것이다. 


3.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1) 인류가 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번식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란 의미

    :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위의 말을 지지한다. 


  2) <현재 성적 본능이 도달한 상태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1) 음식을 즐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절반이 음식을 삶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음식 그림을 보면서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부끄러운 성욕이 된 것에 대한 책임

  1)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뒤틀려 있는 기관 때문에

  2) 우리의 순결하지 않은 삶을 옹호하는 선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는 자란다. 

  3) 돈을 긁어 낼 목적으로 우리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사람들이 많다.(성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매 저항력이 약하다.)


  * 하나님은 이런 상황, 이런 시대를 감안해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치료를 받을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럴 마음조차 없는 것같다. 그것이 문제다.


   (1) 우리의 뒤틀린 본성과 마귀의 유혹 그리고 현대의 온갖 선전들이 합세하여 <우리가 억누르는 욕망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하며 지극히 온당한 것이므로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거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태도>라는 거짓 의식을 가르친다. 

    : 욕망을 분출해서 행복해지는 경우는 없다.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한 법이다.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유는 다르지만, 본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이는 위생학적의미로, 어떤 이는 사회학적인 의미로) 기독교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이 다른 것보다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원칙중에 하나인 것이다. 


   (2) 많은 이들이 기독교적인 순결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음.

      :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려고 하고, 해 내는 것은 멋진 일이다. 온전히 하지 못했다면 용서를 구하면서 거듭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과정이 그 덕목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습관을 훈련시켜 줍니다. 


   (3)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을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억압된'이란는 용어는 '거부하다', '참다'라는 뜻의 억제된(suppressed)과 구별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성적 욕망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에 잠재의식 속에 파고들어 왔다가(대게는 아주 어렸을 때) 알아 볼 수 없는 형태로 위장해서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성인이나 청소년들이 의식되는 욕망을 거부하려는 노력은 과거의 억압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다. 


5. 성도덕이 기독교 도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하지 않는 것을 최악의 악으로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육체의 죄는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쾌락 중에가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이다. 영적인 쾌락이란.


  (1)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2)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3) 험담을 즐기는 것

  (4) 권력을 즐기는 것

  (5)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 말로 악한 죄다. 


내 안에 있는 동물적 자아가 짓는 죄보다 악마적 자아가 짓는 죄가 더욱 악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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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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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1장]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부터 나왔구나 싶은 부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부분들에 대한 이야기와 종교적 제의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앙에 대한 지적도 다루어 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하는 포인트]

 

1.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죄
  1)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서 던 날에 명령한 것.
  2)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룸.
  3)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경계하며 경계했다.
  4)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마음이 완악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언약의 규정대로 그들이게 행하였다.

 

2. 계속되어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반역
  1) 선조뿐 아니라 지금도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다. 이들은 자기 선조들의 죄악을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부르짖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심.
  3)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1) 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집에서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내 집에서 무엇을 피하겠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3)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 부른 유다를 그 위에 불을 피우고 가지는 꺾어 재앙을 선언하였다.

 

4.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로 인하여 그를 죽이려 함.
  1)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하고, 그의 결실을 박멸하고 자 했다. 
  2)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대한 보복을 요청했다.
  3)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2) 하나님께서 아나돗을 벌하시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고,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 하리라.

 

 

[정리1.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는 것이 포인트]

 

유다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책망하시고 더 이상 용서할 수만은 없음으로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출애굽할때부터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마음을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들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다른 신을 섬겨 언약을 깨뜨렸다. 그래서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듣지 않았고, 그들이 따르는 우상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셨다.

이제 예레미야의 중보의 기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집에서 많은 악을 꾸미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을 향해 좋은 열매를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주었으나, 이제 그 나무를 불 태우며 가지를 꺽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의 완악함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향해서 예언을 그만하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을 선포하셨다. 자녀들과 청년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들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레미야와 신약과의 연관성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선 이스라엘과 유다가 지은 죄의 내용들은 로마서 1-3장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을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내용들과 유사하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감람나무라고 비유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그의 가지를 꺾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또한 로마서 11장에 언급된 비유와 유사한 방식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애서 박해를 받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약의 많은 부분이 예례미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는 선지자의 모습과 그의 메시지 속에서 그 시대의 심판, 절대적 심판 속에서도 샘솟는 소망, 그리고 그 일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역...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그림이라 보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반영되고 있는 그림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어두을 보고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사역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사역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이것인 우리의 운명이다.

 

2.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언약을 깨뜨리고 반역하는 네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이랍시고 드리는 고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대한 태도는 잊어버리고 종교적인 제의(그것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드렸든지 상관없이)만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은 대체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보다는 신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중시한다. 그래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종교적인 의식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충성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거룩한 제물이며, 과도한 헌금과 헌신이면 주님을 향한 열정이면 도덕과 윤리와 법도 제맘대로 벗어 던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주를 위한다는 말과 교회를 위한 다는 말이면 도덕과 윤리는 뒤로 던져지는 물건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어찌 우리가 이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이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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