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해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어떤 사람은 종교문제는 이미 과거에 끝난 문제로 시계를 거꾸로 돌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 3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1) 시계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거꾸로 돌리는 것이 더 현명한 일 아닌가!

  2) 잘못된 길로 접어들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보를 위해서는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선재해야 한다. 

  3) 수학의 예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잘못된 공식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바른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소결론] 지금 세상의 상태를 보면 인정하시겠지만, 인류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되돌아 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2. 본격적인 <종교 선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1) 지금까지 도덕률 배후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까지만 이야기했지, 특정 종교의 신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도 하지 못했다. 성경이 없이도 알아올 수 있는데까지 온 것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1) 누군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2) 그가 우리 안에 둔 도덕률이다. 이것은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더 좋은 증거가 된다. 

     이것을 볼 때, 우주 배후에 있는 존재가 옳은 행동(공정한 처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용기, 신뢰, 정식, 신용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3)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선하시는 말의 의미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주는 상냥하고 동정많은 분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덕률에는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률은 올바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4) 만약 절대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을 미워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절대 선이 우주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없고,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다. 다음날이라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이다."

3.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한다. 

   따라서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좀더 유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독교는 결국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다. 따라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다. 


[결론]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하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전쟁 전 국제 정치에 품었던 몽상에서 이제 막 깨어난것처럼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도 몽상에서 깨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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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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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장에서 루이스가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2장은 루이스의 이 논리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2장 내용을 전개한다.

 


[반론1]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도덕률이란 사실상 인간의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처럼, 다른 본능들처럼 발전해 온 것이 아닙니까?(도덕률과 인간의 본능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


[루이스의 답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과 인간 본능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함


<예1>

위험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두가지 욕구를 동시에 느낌.

 1.  당장 달려가 도우려는 욕구(집단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2. 위험을 피하려는 욕구(이것은 자기 보전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충동 외에 <도망치려는 충동을 누르고 도우려는 충동을 북돋우라>고 말하는 제 3의 어떤 무언가를 내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즉 두 본능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고, 그 가운데 어떤 본능을 따라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이것이 두 본능 가운데 하나 일 수는 없다. 즉 제 3의 또 다른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률>이라는 것은 제 3의 욕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1,2번의 본능이 단지 건반 키들에 불과하다면, 제 3의 욕구인 도덕률은 마치 연주해야 할 곡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2> 두 본능이 우리 안에서 싸울 때, 강한 본능이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에 빠지 사람을 돕는 편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편을 더 바랄 것이다. 그러나 도덕률은 그래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도덕률은 옳은 충동을 원래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라고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건반은(본능 1,2) 자신을 다른 건반보다 더 크게 치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 


<예3> 도덕률은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닌 또 다른 확인은 도덕률이 본능의 하나라며, 언제나 선하고 옳은 충동 하나를 우리의 내면에서 짚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란 없다. 모성애나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충동들은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과도한 충동은 악을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충동에는 원래 좋거나 나쁜 것이 없다.(심지어 보편적인 인간애도 그릇될 수 있다. 인간애를 핑계로 정의를 무시한다면 말이다)


도덕률은 본능 중 하나도 아니고 본능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도덕률은 본능들을 지휘하여 일종의 곡조(우리가 선이나 옳은 행동 이라고 부르는 곡조)를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다. 




[반론2]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도덕률이라는 것이 본성적인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 가치관의 영향력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루이스의 답변] 루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답변을 제시한다. 


1.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1) 우리는 누구나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혼자 자란 아니는 구구단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구단이 단지 인간의 관습, 즉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서 낸것으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달리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2) 물론 학습을 통해서 좌측 통행, 우측 통행과 같은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수학과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는 것인데 루이스는 인간 본성의 법칙을 수학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 시대 한 나라의 도덕관은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도덕관과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리고 그 모든 도덕관들을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2) 민족마다 다른 도덕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한쪽의 도덕이 다른 쪽의 도덕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또한 한 민족의 도덕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진보란 이전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치의 도덕이나 지금 우리의 도덕에 우열을 나눌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둘(두 민족의 도덕관, 혹은 두 시대의 도덕관)을 비교할 만한 어떤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참 도덕>이라는 어떤 것과 비교해서 그렇다고 판단하는 행위가 아닌가! 진정한 <옳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루이스의 결론] '바른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종종 자연적인 '행동 법칙'이란 없다는 의심을 하게 되긴 하지만, 사실은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 말로 오히려 그런 '행동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추가적인 반론에 대해] 300년 전 영국에서는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서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이란 말이오?


[루이스의 답변] 마녀사냥이 없어진 것은 더이상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지, 여전히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오늘날에도 마녀사냥은 존재할 것이다. (마녀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 대가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그 힘으로 이웃을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고 날씨를 궂게 만드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살고 있다고 믿는 다면 아마 이 불쾌한 이적 행위자를 사형시켜 마땅하고 하는데 모두 동의했을 것이다.)


마녀가 없다는 지식의 진전은 있었던 것이지만, 이것을 도덕적 진보라고 볼 수는 없다. 집에 쥐가 없다고 쥐덫 놓기를 그만 둔 이를 인도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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