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감을 넘어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려 내는 부활의 능 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 다. 11장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도 록 방치(?)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위독 한 것을 알고도 ‘이틀’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의도적으로 흘려버리 셨기 때문이다(6절). 요한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통 해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4절). 이것이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 가 깨닫게 되는 일차적인 메시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복음을 처음 대하는 1차 독자 입장에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어떻게 읽혔을까?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은 1세기 말엽 대략 주후 90년경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교 회의 형편은 어땠을까? 교회는 로마의 직접적 박해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는 ‘죽음의 위협’을 받 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당시 교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나사로와 같지 않았을 까? 지금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데, 곧 오실 것 같은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행하시 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사로의 위독함을 듣고도 이 틀을 더 머무셨던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성도들의 위협에 대처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의 태도에 성도들은 불안해했을 것이고, 그중에 일부는 믿음까지 흔들렸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요한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언급하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25절)를 다시 한 번 의지하라 고 요청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26절)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라고 성도들의 믿음을 촉구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읽는 1세기 말 의 성도들은 요한의 말씀 앞에서 다시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로마의 박해를 받지도 않고, 신앙 이 있다고 해서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박해나 한국전쟁 중에서 공산 당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 시대는 평안의 시대 요, 풍요의 시대요, 자유의 시대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 을 위협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이다. ‘안정감’은 이 시대의 ‘생명’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목적도, 좋은 직장을 다니려는 근거도 ‘안정감’에 있 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줄 수 있는 안정 감’이 우선이 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불안정감’이다. 안정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불행 은 없다.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안정감’을 보장해 준다면 예 수는 성도의 ‘신’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도들의 안정감을 빼앗으 려 한다면 그 순간 예수는 더 이상 성도들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짓 ‘안정감’을 약속하는 ‘우상’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안정감’을 보장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안정감을 깨기 위해서 온 분이라고 자 신을 설명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 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 주님은 재 물이 많은 청년에게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요청하신다. 불안 정감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 나”(창 12:1)라고 말씀하신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불안정한 나그네 로서의 삶으로 오라 하신다. 이 시대는 ‘안정감’이 없다면 죽을 것 같 은 시대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주님이 빨리 오셔서 지금 불안정한 나의 상태를 안정케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이틀’을 더 머무심으로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키시고,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신다. 왜? 주님과 함께한 ‘불 안’ 속에 참된 신앙이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세상이 주는 허망한 ‘안정감’을 넘어 참된 평안이시기 때문이다.


불안정이 엄습한 시대, 그래서 안정감이 우상이 된 시대. 우리는 다 시 한 번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 러기 위해서는 ‘불안한 상태’를 견디고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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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서 ‘표적’으로

글: 김수억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만을 강조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을 언급하기 전과 그 기적이 마친 이후의 묘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요한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오히려 여기에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6:2).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좇은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miraculous signs)’을 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 표적이란 아마도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과 같은 치유의 기적일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많은 무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찾는다(요 6:24).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miraculous signs)’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26절) 그를 임금 삼으려는 마음에서였다(15절). 아쉽게도 예수님은 표적(miraculous signs, 요 6:2, 26)을 보이셨으나, 무리는 ‘기적(miracle)’을 보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육으로 난 자인 자연인이 가지는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 영적인 것(표적)을 보고도 육적인 해석(기적)밖에는 해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무리 지어 예수님을 좇았지만, 예수님은 이내 난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로 이들을 돌려보내셨다(요 6:66).


전도가 힘들어지는 현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뭔가 ‘화끈한 기적’을 보여 주시면 사람들이 여기에 굴복해서 교회로 찾아올 것이고 당연히 믿음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믿은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내 곧 무능한 하나님, 변덕쟁이 하나님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고 ‘더 확실한 기적’을 제공하는 우상을 찾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만으로는 무지한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기적이 지향하는 바 곧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되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죠이선교회 사역은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떤 사역이 되어야 할까? ‘기적’을 자랑하는 단체가 아니라 ‘표적’으로서 “생명의 떡 되신 예수”를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죠이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요구한다. 아니 내 안에서부터 큰 함성으로 외치는 소리가있다. 죠이선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서 ‘기적’이 되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 되어야 한다. 기적은 육을 지향하고 표적은 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한 것이다. 죠이 스피릿에서 예수님을 첫째로 둔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우선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죠이선교회의 모든 사역이 예수님을 지향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죠이를 통해서 배출되는 죠이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된 죠이어란 예수님을 우선에 두는 죠이어이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지향하는 죠이어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의 생명을 거듭나게 하사 영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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