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9장]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하나 사가지고 갔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옹기를 깨뜨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은 당시의 메시지를 전하시려 합니다. 시청각적 효과를 통한 소통의 노력이지요. 그러나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고 마는군요. 하나님은 탁월한 교사이나, 백성들은 불량학생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에게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림으로서 전하시는 메시지


  1)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 가서 옹기를 사서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내 말을 이르라.

     * 하시드 문: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그 일대에 토기장이의 작업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문 근처에 깨어진 토기들을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문으로 본다.

 

   (1)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듣는 모든 자가 떨게 될 것이라.

   (2)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였다. 우상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 채웠다. (아들들을 바알에게 바치고, 바알을 위해 산당을 건축했다.)

   (3) 이곳을 다시는 도벳이나 힌놈의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죽음의 골짜기라 부르리라.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넘어뜨리며 그 시체를 짐승과 새의 밥이 되게 하리라. 

   (4) 이 성읍을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가 조롱함.


  2) 이 말을 하고 함께 있는 자들 앞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말하라. 

   (1)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을 무너뜨리리라.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는 것만큼 이 성읍에 재앙을 내리리라.

   (2)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한다. 이 성읍에 예언된 재앙이 모든 성읍과 모든 촌락에 내리리라. 

   (3)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토대로 다시 풀어서 작성하기]


하나님께서 옹기를 깨뜨리는 것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신다. 예레미야는 옹기를 사서, 백성들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힌놈의 골짜기(예루살렘 성 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가서 이 곳에 임할 재앙을 선포한다. 이곳이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고, 많은 피를 흘린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지도자들이 볼 때도 이곳은 그와 같은 악한 곳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 갑자가 그 지도자들 앞에서 가지고 온 옹기를 깨뜨린다. 옹기는 한번 깨지면 다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백성도 무너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도벳이 진노의 재앙을 받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과 촌락이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니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도벳의 심판을 예언하는 것처럼 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동일한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정리3. 정리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교훈들]


1. 하나님은 강의(메시지)를 위해 시청각적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옹기를 강의(메시지)에 이용하시려고 했다. 예레미야에게 먼저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옹기를 사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야 함께 있던 지도자들은 약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왜 옹기를 하나 들고 나와서 옹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레미야가 든 옹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적절한 때에 예레미야는 느닷없이 옹기를 깨버린다. 그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옹기를 갑자기 깨뜨리심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소리에 의해서 놀랐을 것이다. 흐릿해지던 사람들의 느슨한 태도가 갑자기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을 낳았을 것이다. 왜 소중히 들고 있던 옹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깨뜨린단 말인가!! 사람들은 다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깨진 옹기를 통해서 말한다. 깨진 옹기는 다시 완전히 회복 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는 다시 완전히는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갑자기 사람들은 깨진 옹기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연결할 것이고, 이것은 잠시의 고난이 아니라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듣게 될 것이다. 


메시지 전달을 위한 하나의 준비된 퍼포먼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들을 모두 활용하신다. 문학적인 표현이 그렇고, 이와 같은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결국을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시는 그분의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도 <불통>인 백성들을 향해서 최대한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좀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할만큼 했다고 말하기 전에 좀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말이다. 


2. 공감할 수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도벳)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당시 백성들의 지도자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보낸 것은 아마, 그곳은 타락한 유다 백성들이 볼 때도 정도가 아주 심할 정도로 타락한 곳이 아니었나 싶다. 그곳에서 바알을 위한 산당이 건축될 뿐 아니라 바알을 위해서 아들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까지 있었던 것을 볼 때(5절) 또한 무죄한 자의 피가 이곳에서 많이 흘려졌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불의와 죄악이 컸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백성의 지도자들을 데리고 가서, 재앙과 심판을 예언할 때 이 지도자들은 별말이 없었던 것이라 보인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이곳은 매우 심각한 곳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끝나지 않는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심판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도 결국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죄의 질과 비교해 볼 때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던 심정으로 듣던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다.(14절)


예레미야서에서는 하나님 그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노력이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 백성들은 듣지를 않는다.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을 통해서도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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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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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8장]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습니다. 하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대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가르침을 줍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메시지
  1) 토기장이의 집으로 예레미야를 보내시는 하나님
  2)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하는 것을 보는데,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터지니,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다.
  3) 메시지: 토기장이가 하듯이 내가 못하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너희는 내손에 있느니라. 
   (1)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어 멸하려 하더라도,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그 민족에게 내리려고 하던 재앙에 대해서 뜻을 돌이킨다.
   (2)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고 할 때에, 그들이 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복주리라는 뜻을 돌이킨다.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였더니 이 백성은 말하기를 헛소리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고 말한다.

 

2.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과 심판
  1) 너희는 이런 일이 있는지 여러 나라에 물어보라.(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2)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한다. (옛길에서 넘어져 곁길로 가는 것)
  3) 그들의 땅으로 말미암아(큰 멸망을 당하므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4)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길 동풍으로 함같이 하리라. 내가 재난의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리라.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3.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다. 
  1) 백성들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고자 한다. 그 하나 없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2) 예레미야의 탄식: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팠고, 그들은 선을 악을 갚습니다. 
   (1)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게 하려고 주의 앞에서 그를 위해 유익한 말을 한 저를 기억하여주시옵소서.
   (2)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며, 그들의 아내는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게 하시며, 장정은 죽임을 당하며 청년은 전장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소서.
   (3)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라. 그들의 악을 사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소서.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을 다시 나의 표현으로 풀어쓰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청각교육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신다.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가 보게 하신다. 토기장이는 그릇 하나를 만들다가, 그릇이 터지자 그 진흙을 다시 뭉개더니 임의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하나님도 토기장이와 같이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멸하시려고 했다가도 그들이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그러나 어떤 민족은 세우려고 하셨다가도 그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시고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셨음에도 그것을 헛소리인줄 알고 계속해서 악을 행한다. 너무나 어처구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멸하고, 원수들 앞에서 부끄럽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들이 고난 당하는 날에도 등을 돌리며, 얼굴을 향하지 않을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호소한다. 이 백성들을 향해서 열심히 변호하고 이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했던 예레미야를 사람들은 오히려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는 모습을 볼 때, 예레미야도 한계를 느낀다. 그는 두려움가운데 하나님께 신원한다. 이들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을 철저하게 심판해 달라고 오히려 신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의 중보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견된 것에 대한 생각들]

 

1. 신실하신 하나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일향 믿을 만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뜻을 마음대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잘 안되면, 임의로 그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은 얼마든지 바꾸시는 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강조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대로 그 뜻을 바꾼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하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늘 불안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이 아니시다. 예측할 수 있는 변화요 은혜로운 변화요 공의로운 변화인 것이다. 경직된 획일, 기계적인 예정이 아닌 것이다.

 

심판을 하시려고 하다가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는 변화다. 잘 세우려고 하시다가도 교만하고 악을 지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접으시는 변화다. 하나님은 문자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기초적인 상호 신뢰를 위해 언약을 통해서 룰을 정하지만, 문자에만 매이지는 않으시고 얼마든지 그 안에서 은혜로운 융통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원칙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변절자로 보일지 모이지만,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진정한 원칙주의자들은 없다. 그 스스로도 그 원칙을 다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2. 중보자들까지도 포기한 예루살렘과 유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고, 올무를 놓으려 하자 그동안 이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가 갑자기 돌연 변해서,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저주는 매우 잔인할 정도로 하나님께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미흡합을 볼 것인가? 아니다. 어쩌면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완악함을 봐야 할지 모른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은 우습게 여긴 자들이다. 그들이 이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행위이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어떻게 하든 중보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이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악함을 더 깊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마지막 자기 편이었던 예레미야까지(중보자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는가!! 이 백성은 더 이상 중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최후의 중보자까지 우리를 등진다면 우리는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히 6:4-6) 나를 위한 마지막 편까지 등돌리게 하는 어리석음은 삼가해야 한다.

 

이 땅에서 부모는 나의 마지막 편이 아닌가 싶다.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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