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8. 주일.(김동호 목사님의 개인 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

1. 사내 아이 셋을 키웠습니다. 그것도 터울이 길지 않은 아이들이었습니다.

2.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 중에 하나는 '억울함'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아이들이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3. 그래서 아이들을 대할 때 첫째, 둘째, 셋째 혹은 큰 애, 작은 애로 대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어떤 일로든지 너는 첫째니까, 둘째니까, 셋째니까 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 언제나 판단기준은 옳고 그름이었습니다. '너는 첫째니까 네가 참았어야 해', '너는 동생이니까 형에게 그러면 안 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5. 하나님의 은혜로 그 면에서 크게 실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 셋이 자기가 몇 째이기 때문에 억울했다는 느낌없이 잘 컸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 셋 사이가 너무 좋습니다. 아이들과 우리 부모 사이가 정말 좋습니다.

6. 저희 아버지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신념이고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았지만 정말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사셨습니다.

7. 어렸을 때 저는 그게 너무 근사했습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의 매력이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아버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8. 그러나 나중에 레위기를 읽다가 그게 근사해 보이기는 하여도 옳지는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 레위기 19장 15절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10. <너희는 재판 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1. 레위기 19장에 유명한 말씀은 8절과 9절입니다.

12.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지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3.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과 배려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14. 늘 가난한 자를 생각하지만 가난한 자의 편에는 서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부자편도 들어서는 안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5. 그러므로 무조건 부자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무조건 가난한 사람 편을 들어서도 안 됩니다. 재판은 약자와 강자의 편이 아닌 옳은 사람 곧 정의의 편만 들어야 합니다.

16.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 편을 들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게 사회의 가장 큰 병입니다.

17. 그래서 용기있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섭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다 지나칩니다.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다가 부자를 억울하게 합니다.

18. 어떤 경우는 강한 사람이 옳은 경우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잘못되었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무조건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면 부자도 억울합니다.

19. <나는 가난하니까>, <너는 부자니까> 이런 생각과 표현은 사람을 많이 억울하게 하고 세상을 너무 편치 않은 갈등의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20. 저는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라 말씀하시면서도 그렇다고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는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좋습니다. 그 균형감각이 좋습니다.

21. 내일 한 번 더 이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2. 오늘도 굿모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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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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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주장은 간단하게 하면 두가지다.


1.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내용을 정리해 보자. 


1. 우리는 많은 다툼을 하면서 살아 간다.


2. 다툼의 근거는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되는 행동 기준>에 호소한다.

  1) 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냐?라고 따지지 그런 기준따위는 집어치워!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기준을 부정하면 싸움이 형성될 수 없기에)

   2) 따라서 대부분의 싸움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의 합당성의 문제다. 

   3) 이로 보건데,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일종의 합의가 없다면 싸움은 무의미하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Law of Nature)이라고 불렀다. 

  1) 오늘날은 자연법하면, 중력 법칙, 유전 법칙, 화학 법칙 등을 가리키지만


  2) 이전 사상가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뜻에서 였다. 즉 중력의 법칙에 모든 인간이 지배를 받듯, 모든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3) 중력의 법칙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 거부할 수 있다. 


  4) 이런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인류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것)

   (1)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히틀러 조차 비난할 수 없다. 


  5) 문명이나 시대에 따라 도덕간에 차이가 나긴 해도, 그것은 전적인 차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1) 예컨데 고대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인도인, 중국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도덕들을 비교해 보면, 그것들이 서로 아주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2) 가족애와 민족애에 대한 규정은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겠지만, 이기주의가 높이 평가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3) 아내를 몇 명을 두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달랐지만, 무분별하게 여자를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는 공통적이었다. 


  6)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예) 조약을 깨뜨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해!와 같은.


  [소결론] 인간은 모든 문화와 시대 속에서 <자연법>으로 받아들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4. 그럼에도 이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1) 우리는 이 자연법을 지키는데 실패했다.(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책을 사서 읽으라!)

  2) 우리는 많은 변명을 늘어놓고,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3) 이것은 싫든 좋든 우리 안에 <자연법>이 얼마나 깊이 있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4) 우리는 자신의 나쁜 습성에 대해서는 여러 변명을 대고,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면서도 좋은 습성에 대해서는 늘 자기 공으로 돌리는 습성이 있다. 


  [소결론] 우리는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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