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새벽예배 마치고 바로 제기동으로 출근했습니다. 회관도 세상도 조용합니다. 어디서 기타소리와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이 아침부터 어디서 나는 걸까요??

 

[정리1. 내용의 정리_어떻게 보면 본문을 다시 쓰는 것 같은데.. 쓰다보면 내용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문단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에 대해서
  1)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림.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함. 여로보암의 죄를 따름.
  3) 여호와께서 노하사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심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니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구원자를 보내주심으로 아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게 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이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
  6) 아람의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고 병력을 약화시켰다.
  7)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됨.

 

2.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 대해서
  1)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렸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의 모든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 행함.
  3)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대지략에 나오고, 그가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왕이 됨.

 

3. 이스라엘 왕 요아스 때에 있었던 한 사건(엘리사의 죽음)
  1)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와 슬퍼하였다.
  2)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3) 엘리사는 왕에게 활을 잡고 동쪽 창을 열도록 하고 그곳으로 쏘도록 했다. 왕이 활을 쏘자 엘리사는 이는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아람을 멸절하도록 칠 것이다.
  4) 엘리사는 왕에게 화살을 잡으라고 하고, 땅을 치라고 했다.
  5) 왕은 세 번만 치고 그쳤고, 엘리사는 왕에게 왜 세 번만 쳤냐고 화를 냈고, 대여섯번을 쳤다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6) 엘리사가 죽고 다음 해에 모압 도적 뗴들이 그 땅에 왔다. 그 땅에서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도적 떼를 보고는 급한 나머지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졌는데, 그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난 일이 있었다.

 

  [여호아하스왕과 요아스 왕의 추가적인 이야기]
  1) 여호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했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불쌍히 여기셨다.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2) 아람에 하사엘이 죽고 벤하닷이 왕이 되자, 요아스 왕이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았다. (부친 여호아하스가 빼앗긴 성읍을)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회복했다.

 

[정리2. 내용을 재구성해서 씁니다. 순서대로라기 보다는 일목요연하게, 내 표현으로 다시 쓴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본 장은 이스라엘 왕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와 그의 아들 요아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호아하스는 17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죄악 중에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때에 아람과의 전쟁이 계속 있었고, 그 때 여러 성읍을 빼앗기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국력은 매우 약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아하스는 범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풀쌍히 여기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여기서 명을 다했을 수 있을 만큼 나라는 위태로웠다.(23절)


여호아하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의 아버지의 평가보다 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는 아람과의 전쟁을 세 번을 이김으로 인해 여호아하스 때에 빼앗긴 성읍을 다시 회복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요아스 때에 병으로 죽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성취이다.


요아스 왕은 엘리사가 죽음에 임박하자 그를 찾아 애통해 했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활과 화살을 잡게하고는 동쪽으로 구원의 활을 쏘개하고, 화살을 바닥에 치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3번 밖에는 치지 않았다. 엘리사는 노하였고 안타까워했다. 왜냐하면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길 수 있었을 것인데 3번 밖에는 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아스 왕은 활을 땅에 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요아스 왕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암튼, 엘리사와 관련된 그 사건은 하나의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대로 요아스 때에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을 이기면서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몰라도 가계의 흐르는 축복은 확실하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왕 중 두 왕,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할만한 것은 여호아하스 왕은 악하고 무력한 왕이었다. 그는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의 집의 죄악에서 떠나지 못했다. 고통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음에도 그는 다시 악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갔다.(5,6절) 게다가 그는 무능했다. 아람의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많은 성읍을 빼앗겼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는 여호아하스를 서술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시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23절) 한마디로 여호아하스는 철저하게 선조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고 유지된 것이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아하스 때에 이미 아람에 의해서 완전히 멸절되었을 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악인의 저주와 의인의 축복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악인의 가계의 흐르는 저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악인의 자녀들이 더 악한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어서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여로보암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그와 같은 죄악이 대를 거쳐 흘러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흐른 것은 아니다. 그 뒤를 이은 왕들이 그것을 개혁하지 못했다는 것이요 그 흐름에 편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선친들이 받은 저주가 계속해서 죄없는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나는 모르겠다.(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진심으로... 나도 궁금하니...) 그러나 선친들의 선행으로, 선친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복을 누리는 것을 나는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중에 하나라고 하겠다.(23절) 남 유다의 아비얌 때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선한 것이 없었지만, 다윗 왕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견고하셨다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왕상 15:1-5)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계에 흐르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긍정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적극적 태도>라는 말이 좋다.  

 

긍정적 사고를 통한 긍정의 힘이 교회 안에서도 강조되고 있는듯 하다. 일반 상식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근거가 성경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늘 교회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선지서는 모두 제거해야 할 책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선지자들의 활동을 모두 부정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 사고와 말에 대해서 나는 긍정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논리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다. 오히려 성경은 <적극적 태도>를 강조한다고 본다.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가 활을 세번 만 친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여섯번을 쳤다면 아람을 완전히 이겼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번만 친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요아스의 입장에서도 활을 땅에 치는 숫자대로 아람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요아스는 열번도 쳤을 것이고 백번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요아스는 자신의 행동과 아람과의 전쟁 승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힌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앞에서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활을 동쪽으로 쏘고는 구원의 화살이라는 힌트를 엘리사가 주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힌트를 가지고 요아스는 활을 땅에 여러번 치는 시도를 해 봤음직 할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아스는 적극적인 태도가 없었던 것이고 수동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적극적인 태도>의 소중함을 본다. 성경은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한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권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우면서 환경에 굴하지 말고 해야할 일을 행하라고 말한다. 사랑할 때도 적극적으로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주라고 한다. 종은 적극적으로 종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적극적으로 주인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남편와 아내 모두 마찬가지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라고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긍정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말을 성경적이라고 하면, 교회 안에서는 비판도 평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건강해지는가? 아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는 적절한 비판과 평가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비평과 평가와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긍정적이란 말보다 적극적이란 말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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