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도덕과 관련하여 기독교가 주고 있지 않은 것>
1.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다. 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황금률에 대해서)
2. 어떤 도덕을 특정시대 특정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세부적 정치 프로그램이 없고 그런 것을 노리지도 않았다.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1. 그것은 기독교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만 그렇다.
2.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단편적인 내용들...
(1) 성경은 사회에 놀고 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분별없는 사치품을 만들지 않고, 그런것을 부추기는 분별없는 광고는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독교는 좌파적 성향을 가지는 것 같다.
(2) 그러나 성경에는 우파적 경향의 요구도 한다. 정당하게 임명된 관리에게 순종할 것,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인기없는 말이지만)
(3) 만약, 경제생활이 아주 사회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보적>이지만, 가정생활과 예의 범절은 오히려 구식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방문한다면 매우 기이한 인상을 받고 돌아올 것이다.(낯선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는 취하고, 일부는 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과 구약시대의 유대인 그리고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에 대해서 우리가 명백하게 거슬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자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 <투자 제도>라는 것으로 들어와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주식회사와 같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세 문명은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 한결같이 비난했다는 점이다.
(4) 자선(charity)과 같은 제도도 성경에서 분명이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선이 필요없는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아도 좋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도덕과 결별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여유있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난, 헌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선을 넘어 주변의 친척과 가족들까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필요들이 있다고 봐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더 큰 위험에 빠지는 일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선의 가장 큰 장애물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돈 욕심보다는 두려움_생활의 안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_입니다.
<정리하면서>
자시의 말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이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말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회의 청사진 그리기를 방해하는 진짜 암초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바를 정말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입장을 지지해 줄 내용을 기독교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_또는 심판자_을 만나야 할 곳에서 '내 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