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1장]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부터 나왔구나 싶은 부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부분들에 대한 이야기와 종교적 제의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신앙에 대한 지적도 다루어 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하는 포인트]

 

1.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죄
  1)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서 던 날에 명령한 것.
  2)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룸.
  3) 이 언약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경계하며 경계했다.
  4)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마음이 완악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언약의 규정대로 그들이게 행하였다.

 

2. 계속되어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반역
  1) 선조뿐 아니라 지금도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다. 이들은 자기 선조들의 죄악을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부르짖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심.
  3)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1) 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집에서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내 집에서 무엇을 피하겠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3)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 부른 유다를 그 위에 불을 피우고 가지는 꺾어 재앙을 선언하였다.

 

4.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로 인하여 그를 죽이려 함.
  1)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해하려고 하고, 그의 결실을 박멸하고 자 했다. 
  2)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대한 보복을 요청했다.
  3)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게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예언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2) 하나님께서 아나돗을 벌하시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고,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 하리라.

 

 

[정리1.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는 것이 포인트]

 

유다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책망하시고 더 이상 용서할 수만은 없음으로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출애굽할때부터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마음을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들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다른 신을 섬겨 언약을 깨뜨렸다. 그래서 기도하며 부르짖어도 듣지 않았고, 그들이 따르는 우상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셨다.

이제 예레미야의 중보의 기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집에서 많은 악을 꾸미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을 향해 좋은 열매를 맺는 푸른 감람나무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주었으나, 이제 그 나무를 불 태우며 가지를 꺽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의 완악함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향해서 예언을 그만하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을 선포하셨다. 자녀들과 청년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들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레미야와 신약과의 연관성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신약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선 이스라엘과 유다가 지은 죄의 내용들은 로마서 1-3장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을 진노를 일으키는 죄의 내용들과 유사하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감람나무라고 비유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그의 가지를 꺾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또한 로마서 11장에 언급된 비유와 유사한 방식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애서 박해를 받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약의 많은 부분이 예례미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는 선지자의 모습과 그의 메시지 속에서 그 시대의 심판, 절대적 심판 속에서도 샘솟는 소망, 그리고 그 일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역...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그림이라 보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반영되고 있는 그림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어두을 보고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사역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사역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이것인 우리의 운명이다.

 

2.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언약을 깨뜨리고 반역하는 네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이랍시고 드리는 고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대한 태도는 잊어버리고 종교적인 제의(그것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드렸든지 상관없이)만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은 대체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보다는 신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중시한다. 그래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종교적인 의식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충성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거룩한 제물이며, 과도한 헌금과 헌신이면 주님을 향한 열정이면 도덕과 윤리와 법도 제맘대로 벗어 던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주를 위한다는 말과 교회를 위한 다는 말이면 도덕과 윤리는 뒤로 던져지는 물건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어찌 우리가 이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이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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