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정리]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 주전 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죽고, 애굽의 영향력 하에서 여호야김이 왕으로 세워진다. 국제 정세의 급변하는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특히 애굽과 바벨론 누구의 편에 설것인가가 나라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결정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여호야김 시대는 그랬다. 


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성전 뜰에서 가감없이 외치라고 명하신다. 이들이 듣고 혹시라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던 뜻을 돌이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마지막 회심의 기회라고 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듣을 돌이킬 것이다. 니느웨의 죄에 대해서도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께서(요나서) 유다의 회개에 대해서 충분히 뜻을 돌이키실 의향이 있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

  1)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내 율법을 행하지 않았다. 

  2)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에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순종하지 않았다. 

  3) 그래서 내가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 하나님은 언제나 한 번의 죄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두번이나 세번...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그 죄를 지적하고 시정하도록 일깨워주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의향이 없는 자에 대해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반역의 의지를 가진자에게 심판을 행하신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

  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고 한다.

  2)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고, 이 성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며 예레미야에게 모여듬

  3)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결함.


  *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생각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 예수님의 죄 명도 성전을 허물어 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유사성을 가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으로 죽음에 위협을 당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죽음에 이른다. 


5. 백성들의 반응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한 예언을 청종할 것을 다시 촉구한다. 그리하면 지금이라도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킬 것이라고 말한다. 괜히 나를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그 댓가를 이 성과 성에 사는 주민에게 돌리지 말게 하라.


6. 고관과 모든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말한다. 

  1)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 

7.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1)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온은 밭가는 경작지가 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했으나, 유다 왕 히스기야가 그를 죽였느냐?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는냐! 

  2) 우리가 예레미야를 죽인다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다. 


  * 흥분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닌것 같다. 그 중에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민감하려고 하고 역사적인 판단을 고려하여 하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고관과 백성들 중에 일부가 그랬고,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그랬다. 예레미야를 죽일 죄목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역대 히스기야 왕 때도 그와 같은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히스기야는 오히려 겸비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예레미야의 경우도 그와 같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무리 중에도 고관과 장로들 중에도 정상적이고 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충동적 마귀적 행동에 대해서 제지하도록 역사하신다.(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대해서 만큼은 그리 침묵하셨는지.. 예수님에게는 왜 그와 같은 대변자가 없었는지...)

 

8. 또 여호야김 왕은 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우리야라는 사람이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로 경고하여 예언하자, 그를 죽이려 했고 그가 애굽으로 도망하자 사람을 보내 끝까지 그를 잡아와 칼로 그를 죽이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지 않았느냐...


  * 여호야김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선지자를 얼마나 잔혹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죽였는지를 그 당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지적한다. 


9.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도와주어 백성들의 손에 그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죽지 않았다. 


  * 다행히도 예레미야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살아난다. 죽을 위협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움 상황임을 확인하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묵상 한 모금]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럽게 한 두 번의 실수와 그릇된 판단으로 임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심판의 근거는 죄의 행위가 아니라 죄를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마음이다. 그것이 우리를 심판과 지옥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26장의 사건은 그 당시 정치와 종교계가 얼마나 죄 가운데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부터 제사장과 고관들 그리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무고하게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도 우리는 같은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그의 역할이 남아있었기에 하나님이 살 길을 열어주시고 살려주신다. 그러나 예수의 역할은 십자가를 향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정작 당신의 독생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서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동원하셨지만, 당신의 독생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예수)에 대해서는 왜 이리 모지셨는가!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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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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