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2. 복음을 듣고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이다.
입장권(티켓)을 가졌다는 것이란, 제한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부터 발부된 ‘입장권’이나 ‘초대장’을 받은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천국의 출입문을 자유롭게 입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티켓을 받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서 옳은 확신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자격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격에 맞는 삶을 살기에 힘쓴다면 천국 행 티켓을 얻었다는 개념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만약, 이제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자격)은 확보했으니, 이후로 나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천국에는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전자의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티켓을 남발함으로서 그 공연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우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개념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다시, 마 22:1-13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비유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보았으시 생략하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금은 길거리에서 모두(악한 자나 선한 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해서 불러모았다. 이들은 새롭게 초대장을 가지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들어와서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자리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고 <예복>을 입지 아니함으로 그 잔치에서 쫓아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롬 13:14, 갈 3:2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예식에 맞는 옷>일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갑작스러운 임금의 초대를 받아 왔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예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이다. 즉 그 공간과 상황에 맞는 질서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은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왔고, 왕이 준비한 풍요를 누리기는 했지만 그 공간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잔치를 원했지만, 질서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임금은 그와 같은 자는 초대되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마침내 선별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입장권만으로는 마지막까지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누릴 수 없음을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들
마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씨’를 ‘천국 말씀’(마 13:19)이라고 하심으로 이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는 씨가 떨어진 4가지 땅의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크게 나누면 둘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는 천국 말씀인 씨가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하는 땅(길 가)과 천국 말씀이 뭔가 효과를 내고 있는 땅으로 구분된다.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한 땅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복음을 들었으나 완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반면 효과를 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라고 해서 그 효과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깊지 못해,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버렸다.(돌 밭) 또 어떤 성도는 잘 자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좋은 땅)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교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교회 밖의 완악한 자도 아니고, 교회 안의 좋은 땅에 속한 자도 아닐 것이다. 마태는 ‘돌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극복함으로 ‘천국 말씀’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서 네가 좋은 밭임을 증명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왕의 잔치에 들어왔느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그 안에서 증명해 낼 때, 그 자리에 머물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념의 확장, 점(點)에서 선(線)으로.
롬 5장에 보면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신 것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받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특징이란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전과 그 이후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의 한 시점에 구원이 왔고 모든 사람은 구원 전과 구원 후라는 두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티켓’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티켓이 있어야 한다. 티켓이 있으면 관람할 수 있으나 티켓이 없으면 관람할 수 없다. 티켓은 그 유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구원 개념과 유사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을 티켓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생기게 된 오해도 있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범법자인지 탈세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티켓만 있으면 아무 질문없이 그를 통과시켜 입장시킨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을 티켓으로 얻은 사람이라면(과거의 고백을 통해)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조건과 제약을 달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시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입장했다가도 끝까지 남아있지 못하는 경우 즉 ‘필터링’하는 시간의 과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얻은 구원이 중간에 잃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입장’만으로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몇 몇 본문을 통해서 말했듯이 잔치에 입장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대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단순히 단회적인 의미를 가진 ‘티켓’으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시간을 통과하는 검증 과정을 통해서 알곡임이 더욱 분명해지든지 아니면 가라지로 판명되든지 확인해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 22장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졌다. 그래서 길거리에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선별해 냄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아무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는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허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아무나’라고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장권에서 시민권으로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다시 나가야 한다. 놀이공원이 폐장하게 되면 자유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퇴장해야 한다.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기간이 끝나고, 비자기간이 끝나면 나와야 한다. 왜?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입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에 영원히 살 수 없다. 오직 시민권을 가진 시민만이 그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빌 3:20)
그렇다면 누구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인가?
입장권에는 어떤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 입장권으로는 보고싶은 것, 놀곳 싶은 것을 즐기다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민권에는 책임이 부여된다. 그것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함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진지한 서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귀화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귀화하고 싶다고 모든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귀화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기준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최소한 귀화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준수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맹세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은 부족하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고 하는 책임있는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책임있는 서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입장권을 가지고 잠시 즐기가 가는 사람, 여권과 비자를 받아 잠시 다녀가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복>은 그 상황과 그 공간에 맞는 질서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사람은 혼인 잔치가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유익과 풍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잔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과 공간 속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질서인 <예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아니라 입장권으로만 들어온 그 사람은 결국 그 잔치의 공간에서 퇴장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