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Felix Koutchinski

Photo by Felix Koutchinski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21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절.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절.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성경내용 정리]

1. 첫 비유를 말씀하신 이후 이어서 말씀하신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밝히고 드러나게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경을 가져와서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 둔 것은 타나기 마련이다.(새번역)

-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하신다. 드러내시고 밝히시려는 의도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숨겨 둔 것과 감추어 둔것은 결국 밝혀지기 마련임을 강조한다.

2. 또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기준으로(판단하는 것) 너희가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이상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자는) 그대로 (관용을) 받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자는) 그 사람이 받을 기본 관용조차도 받지 못하고 빼앗기게 될 것이다. 

- 24절의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보면 25절은 ‘관용, 용서, 자비, 은혜’를 넣어서 이해하는게 적절할듯 하다. 


[질문하기]

1. 비유 중간 중간에 비유의 내용이 아닌 비유의 목적과 관련된 내용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 막 4:1-9에 비유가 있고, 막 4:10-13절에 ‘비유의 목적’에 대해서 언급한다. 막 4:14-20에 비유 내용에 대한 해설을 해주시고 막 4:21-25에 ‘비유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다룬다. 이는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해서 자주 다루시고 비유가 드러내려는 것인지, 오히려 감추려고 하시는 것인지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의 목적’을 정확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인듯 하다. 비유는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2. 25절에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은 맥락 속에서 보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까? 

  - 24절에서 ‘헤아림’(판단, 정죄)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을 주셨으니 그 와 대조되는 개념(용서, 이해, 은혜, 관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서 관용과 은혜가 없이 다른 사람을 헤아리기만 한 사람은 역으로 자기 자신도 관용과 은혜가 없는 헤아림, 자신에게는 더 엄격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라 보인다. 

3. 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비유로 알려주시면서 갑자기 주제를 ‘헤아림’(<-> 관용)으로 전환했을까? 

  - 천국의 가치관은 정확한 판단이나 헤아림이 아니라 은혜와 관용이라는 메시지는 마 18:21-35, 마 20:1-16에서도 나타난다.(천국 비유) 따라서 관용은 천국의 비유와 관련해서 무관하지 않고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묵상하기]

1. 감추고 숨기는 것은 천국의 방식은 아니다. 현재 이해하는 사람들의 한계 때문에 감추어 지고 숨겨진 것처럼 보이는 영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고 기회만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밝히시려고 애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보이는 말씀으로 오셨고,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그것을 분면히 한다. 예수님은 비유를 포함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힘쓰셨다. 

감추고 숨기는 사람들, 그 비밀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말 아래에 두고, 평상 아래에 두려고만 하는 사람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관 중에 하나는 ‘관용’이다. 엄격한 헤아림을 통한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엄격함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엄격한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자녀들과 백성들에게는 ‘관용’과 ‘자비’의 방식으로 대하시는 분임을 하나님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백성들이 스스로도 할 수 없는 엄격성을 들어 한 백성, 한 가족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2. 복음을 듣고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이다.


입장권(티켓)을 가졌다는 것이란, 제한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부터 발부된 ‘입장권’이나 ‘초대장’을 받은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천국의 출입문을 자유롭게 입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티켓을 받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서 옳은 확신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자격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격에 맞는 삶을 살기에 힘쓴다면 천국 행 티켓을 얻었다는 개념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만약, 이제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자격)은 확보했으니, 이후로 나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천국에는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전자의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티켓을 남발함으로서 그 공연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우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개념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다시, 마 22:1-13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비유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보았으시 생략하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금은 길거리에서 모두(악한 자나 선한 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해서 불러모았다. 이들은 새롭게 초대장을 가지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들어와서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자리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고 <예복>을 입지 아니함으로 그 잔치에서 쫓아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롬 13:14, 갈 3:2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예식에 맞는 옷>일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갑작스러운 임금의 초대를 받아 왔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예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이다. 즉 그 공간과 상황에 맞는 질서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은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왔고, 왕이 준비한 풍요를 누리기는 했지만 그 공간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잔치를 원했지만, 질서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임금은 그와 같은 자는 초대되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마침내 선별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입장권만으로는 마지막까지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누릴 수 없음을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들


마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씨’를 ‘천국 말씀’(마 13:19)이라고 하심으로 이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는 씨가 떨어진 4가지 땅의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크게 나누면 둘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는 천국 말씀인 씨가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하는 땅(길 가)과 천국 말씀이 뭔가 효과를 내고 있는 땅으로 구분된다.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한 땅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복음을 들었으나 완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반면 효과를 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라고 해서 그 효과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깊지 못해,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버렸다.(돌 밭) 또 어떤 성도는 잘 자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좋은 땅)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교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교회 밖의 완악한 자도 아니고, 교회 안의 좋은 땅에 속한 자도 아닐 것이다. 마태는 ‘돌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극복함으로 ‘천국 말씀’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서 네가 좋은 밭임을 증명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왕의 잔치에 들어왔느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그 안에서 증명해 낼 때, 그 자리에 머물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념의 확장, 점(點)에서 선(線)으로.


롬 5장에 보면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신 것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받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특징이란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전과 그 이후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의 한 시점에 구원이 왔고 모든 사람은 구원 전과 구원 후라는 두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티켓’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티켓이 있어야 한다. 티켓이 있으면 관람할 수 있으나 티켓이 없으면 관람할 수 없다. 티켓은 그 유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구원 개념과 유사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을 티켓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생기게 된 오해도 있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범법자인지 탈세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티켓만 있으면 아무 질문없이 그를 통과시켜 입장시킨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을 티켓으로 얻은 사람이라면(과거의 고백을 통해)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조건과 제약을 달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시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입장했다가도 끝까지 남아있지 못하는 경우 즉 ‘필터링’하는 시간의 과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얻은 구원이 중간에 잃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입장’만으로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몇 몇 본문을 통해서 말했듯이 잔치에 입장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대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단순히 단회적인 의미를 가진 ‘티켓’으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시간을 통과하는 검증 과정을 통해서 알곡임이 더욱 분명해지든지 아니면 가라지로 판명되든지 확인해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 22장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졌다. 그래서 길거리에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선별해 냄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아무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는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허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아무나’라고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장권에서 시민권으로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다시 나가야 한다. 놀이공원이 폐장하게 되면 자유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퇴장해야 한다.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기간이 끝나고, 비자기간이 끝나면 나와야 한다. 왜?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입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에 영원히 살 수 없다. 오직 시민권을 가진 시민만이 그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빌 3:20)


그렇다면 누구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인가? 

입장권에는 어떤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 입장권으로는 보고싶은 것, 놀곳 싶은 것을 즐기다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민권에는 책임이 부여된다. 그것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함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진지한 서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귀화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귀화하고 싶다고 모든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귀화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기준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최소한 귀화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준수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맹세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은 부족하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고 하는 책임있는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책임있는 서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입장권을 가지고 잠시 즐기가 가는 사람, 여권과 비자를 받아 잠시 다녀가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복>은 그 상황과 그 공간에 맞는 질서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사람은 혼인 잔치가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유익과 풍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잔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과 공간 속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질서인 <예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아니라 입장권으로만 들어온 그 사람은 결국 그 잔치의 공간에서 퇴장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0과. 우리가 구원과 복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


1.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구원이 그 사람에게 확인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치는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중생)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시간을 거쳐서 확인되어지는(그래서 끝까지 구원에 이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음을 수 있음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 22:1-13 천국 비유


마 22장 1-13절의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2)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임금의 말과 행동을 잘 살핌으로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지는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3)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한 대상들이 종들을 모욕하고 왕을 능멸한 것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래서 원래 청함을 받은 자는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4) 그러자 임금은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혼인잔치는 금세 손님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 우리가 아는 복음은 보통 여기까지다. 유대인들이 거절했기에 원래 초대받지 못한 우리들에게까지 기회가 열렸다. 이방인인 우리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인에게까지 기회가 열린 것, 이 상태가 우리가 알고있는 복음과 일치한다. 

 5)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금은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을 살피고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선별해서 잔치 밖으로 내보낸다. 


임금의 마지막 행동이 성도인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은 혼인잔치(천국)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10절에서 끝나지 않고 11-13절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이 이 내용에까지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이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흔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의 이야기는 의외로 적지 않다. 특히 마태복음에 많은데, 마 7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마 7:21에는 예수님께서 ‘나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구원받은 성도일 것이라는 확신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성도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대단한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마 7:26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신앙이라는 번듯한 집을 지었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집도 제대로 된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재한 사건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시간’을 통한 과정이 필요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고, 그것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


우리가 잘 알 듯 마 13장에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기 위한 여러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마 13:24-30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것과 쌍둥이 비유로 알려진 ‘그물 비유’(마 13:47-50)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으니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펴봄으로서 천국의 특성을 알 수 있다.

 

 1) 그 주인은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2) 그런데 이 주인의 원수가 주인과 종들 몰래 그 밭에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

 3) 그런데 그것을 시간이 한 참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결실할 때가 되어서)

 4) 종들은 주인에게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을까요?하고 주인의 뜻을 물었다. 

 5)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하고 오히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명한다. 그 때가서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기 위해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즉, 천국은 지금 당장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서 심판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말은 심판 날까지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도록 두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천국의 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곡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중에는 가라지도 함께 공존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마치 알곡인양 천국의 밭에서 함께 자란다.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알곡’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 13:47-50에 언급되고 있는 ‘그물 비유’도 마찬가지다. 


 1)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든 그물과 같다.

 2) 우선 그 그물 가득히 물고기를 잡고, 물가로 끌어 낸다.

 3) 그물을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한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잡아 올리지 않는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그물로 잡아 올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잡아 올린다. 즉, 그물(천국) 안에 있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못된 것도 그물에 잡힌다. 그러나 그 못된 것까지 그릇에 담겨져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분류되어 버려진다. 즉,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이 세상에서 끌어올린다. 마치 가라지까지도 천국의 밭에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특정 시간을 거쳐 분별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그 프로세스를 통해서 마지막에 선별된 자만이 최종합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얻은 구원이 확실한가’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만약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롬 8:24)이기에 미래적인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근거한 확신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은 얻은 것이 아니기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도 실체가 없는 헛된 확신에 불과하다. 위에서도 살펴 봤듯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이들의 확신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에게 구원이 없음을 선언한다.(마 7:23)


따라서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은 지금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전제 될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이제 새로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자.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중동교회 한가족예배 예수님의 비유 설교


본문: 마 25:14-30

제목: 달란트 비유1_경쟁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글: 김수억 간사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많은 비유의 많은 비중을 '천국'이라는 주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쉽게 '천국은 ... 와 같으니'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은 상식일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아닌 마가 복음서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와 조금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비교, 마 4:17 / 막 1:15)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봐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글자의 차이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국'이라고 할 때, 성도들의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가 '이 곳'이 아닌 '저기 어딘가'로 규정되기 쉽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천국'의 반대말은 '이 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면 그 의미는 약간 달라진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하늘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다. 이곳일수도 있고, 저곳일 수도 있다. 우리 안 일수도 있고, 우리 밖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이냐?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와 다스림으로 운영되는 곳인가로 읽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런 이해가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 주인(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상한 행동(왜냐하면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천국 비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행동은 오후 5시(십일시)까지 아무 일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아 1시간이라도 일했다는 것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포도원 주인의 호출이 없이는 하루를 공친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하루 해가 지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포두원 주인은 그 사람을 불러 들였다. 


왜 이 사람은 오후 5시까지 놀고만 있었는가?(마 20:6) 이 사람들은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0:7)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변명에 귀기울이지는 않다. 인력은 언제나 넘치니까. 어쩌면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었지만 고용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체격이 외소해서 노동 효율이 적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인상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암튼, 오후 5시가 되도록 이들은 부름을 받지 못함으로 소외 되었다. 이는 이 사람이 이 사회에 무능하며 무가치한 존재 즉 잉여에 불과하다는 무언의 싸인이였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 말처럼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정말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아 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가장이 어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포도원 주인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사람을 포도원 주인인 천국은 불러들인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20:7)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는지 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그들만을 위해 오신것처럼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예수가 복음(자기와 같이 버려진 존재를 담아주셨기에)인 것처럼,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된다. 왜?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오후 5시까지 놀고 있는 잉여들에게 자기의 포도원에는 들어 올 수 없다는 신호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처지를 알자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포도원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일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신을 부른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인은 다른 일꾼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삯은 은혜다.(롬 4:4,5)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고 본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모순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공감되는 항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일꾼으로 생각하는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하나님에게 불합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불평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이 세상에서는 '잉여'로 판명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간이역 2.0 / 2014. 2월호에 실린 글.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중동교회 한가족예배


본문: 마 20:1-16

제목: 포도원 주인 비유를 통해서 본 천국(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6. 말 3:10-18 지금은 공존하나 그 때는 구분하리라.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 십일조 문제를 다룬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채우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또한 거친 말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무리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따로 책에 기록하여 그렇지 않은 자와 구별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절별 해설

3:10 <<십일조를 가져와 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라>> 유다 백성들의 십일조로 하나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다는 것은 성전을 통해서 생활해야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말라기가 쓰여졌다고 보는 느헤미야 시대에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음으로 레위인들이 생계 문제로 자기 밭으로 흩어진 일이 있었다.(느 13:10)


3:12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지금 말라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만군의 여호와 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지적하신 것이 문제의 본질임을 말씀하시고, 그 본질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이후에 되어진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히 이루어 지게 될 것이 강조되는 표현이다. 


3:13 <<너희가 거친 말로 나 주를 욕되게 했다>>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없이 함부로 말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든지, 율법을 지켜봤자 소용이 없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복이 있고, 악한 사람이 성공한다(14,15절)와 같은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다.  


3:16 <<그 때에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 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책에 기록하도록 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아버지가 자식을 아끼듯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아끼신다고 말씀하신다. 


3:18 <<그 때... 차이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던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추수 이전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다가 추수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완전하게 분리하여 놓는 것처럼 말이다.(마 13장)  


기도

하나님, 저 자신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여 주세요. 나의 말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묻어나게 하시고, 나의 삶 속에서 경건이 흘러나오게 하여주세요.

 

맺는 이야기

하나님의 크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종종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함부로 말하고 하나님이 아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능력을 당장 드러내시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왜 당장 알곡만 남겨두고 가라지는 모두 제거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질문이 나올만 하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 없이 함부로 말하는 자를 당장 심판하시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따로 책에 기록했다고 나중에(그 때) 악인과 명확하게 구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종적 천국(하나님 나라)은 이런 중간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이루어 진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중동교회 한가족예배 설교(2014.1.26)


본문: 마 18:21-35

제목: 일만 달란트 비유의 교훈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중동교회 한가족 예배/ 2014.1.19


본문: 마태복음 13:24-43

제목: 천국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소망


1.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도피주의나 몽상의 한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다. 


2.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만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4. 천국에 대한 생각들

  1) 어리석은 사람이 택하는 방식: 지금 현재의 부족함을 모두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조건을 바꾸어가면서 뭔가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보낸다. 이번에는 진짜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매번 실망하게 된다. 


  2)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이 택하는 방식: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려 버린다. 어린적에 누구나 가지는 꿈 정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난친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환상을 좇는데 쓰이는 기능을 억제하려고 한다. 앞의 경우보다 낫다고 볼 수 있지만.. 

 

  3) 그리스도인의 방식: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는 채워 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하다. 배고픔을 느끼니까 음식이 있고, 성욕을 느끼니까 성관계라는 것이 있고,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채워질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정리]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서 이 소망은 나중에야 이루어지겠지만, 그 욕구가 다른 욕구에 밀려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천국을 하프나 타면서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어린이처럼 읽은 것에 불과하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