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Helena Lopes

Photo by Helena Lopes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1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하시니


6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절.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절. 그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본문내용 정리하기]

1.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금새 소문이 났고 그 집에는 발디딜틈도 없을만큼 사람이 많았다. 주님은 그 모인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셨다.(1,2절)

2. 그러는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풍병자의 친구 4명이 중풍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게되자 지붕을 뜯고 중풍병든 친구를 상에 달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친구들)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3-5절)

3.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서기관은 마음에 의혹을 품었다. 예수님의 행동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사하는 권세가 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서기관의 마음을 아셨고 당신이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6-10절)

4.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갔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11-12절)


[질문하기]

1. 중풍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질병을 고쳐주신 다른 기록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1)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데리고 나왔다는데 차별성이 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4명이 데리고 왔다는 것, 사람이 많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고 환자를 위에서 내려오도록 했다는 것 등 친구들의 마음, 태도, 열심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함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믿음(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가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을 때, 그 친구들이 주님께 데리고 가서 고침받게 하겠다는 그 마음도 귀히 여기심을 알게 된다. 

  2) 중풍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논란이 발생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논쟁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사하는 권세를 가졌는가? 한 서기관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심으로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했고, 그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과 같은 권세가 있음(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권세(가르침, 병고침, 귀신쫓음)와는 차원이 다른 권세(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신 사건이라 하겠다. 

2. 친구들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중풍병자를 들고온 친구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것처럼)

  교리적인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은 본인의 진실한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주변 사람(친구, 가족 등)의 도움으로 스스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사람이 예수를 만나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적극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친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데리고 오기 위한 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 또한 그들의 믿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신념 때문일수도 있고 과거 교회와 교인에 대한 상처때문일수도 있고 무관심 때문일수도 있다. 이 때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반드시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열심과 헌신이 필요하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말씀은 그와 같은 메시지로 성도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을 것이다. 


[묵상하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을 알리셨다.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행하심으로 이 땅의 권세와 질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에 반응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등장한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회적인 제약을 넘어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고, 중풍병자는 스스로 나올수 없는 한계를 친구들의 도움으로 주님께 나왔다. 본인에게 사회적인, 신체적인 어떤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의 도움과 환대,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직접 진행하시고 성취하시지만, 그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것이 포함되고 있다. 본인의 간절함, 친구들의 도움과 간절함 등이 그것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오늘은 히브리서 9장에 대한 내용 정리를 해봅니다. 복잡할 것 같은 내용도 논리적 전개를 따라 저자의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좀 더 단순화될 수 있고, 강조점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익숙한 구절이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되는 것도 발견합니다.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와 같은 구절들은 본 장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아닌 구절인듯 합니다. 물론 조연으로서 필요한 구절임은 당연하구요. ^^

-----------

옛 언약(첫 언약)에도 제사장이 성막에서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법과 성소는 비유지 실제로 온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혁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 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장막으로 들어가셨다.

따라서 옛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그 백성들의 부정을 정결하게 했다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완전한 제물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지 못하겠는가? 충분히 넉넉히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 동물의 피(죽음을 통해)가 있을 때 죄사함의 효력이 인정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피)이 있어야만, 유언한 자의 죽음이 유언의 효력시점이 되듯이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의 효력시점이 되는 것이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역사적 시점이 성도가 죄를 사함받는 역사적인 시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것을 번거롭게 여러번 하신 것이 아니라(구약의 제사장은 여러번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물 효과의 불완전함 때문에) 마지막에 단 한번으로 모든 죄사함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다시 나타나시겠지만 이것은 또 다른 죄사함을 위함이 아니다. 죄와 상관없이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