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Leon Liu

Photo by Leon Liu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21절.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절.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절.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절.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절.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절.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성경내용 정리]

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다. 그 기회라는 것은 헤로디아에게 좋은 날임을 알 수 있다. 헤롯이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 귀신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서 춤을 추었고 그것은 헤롯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이야기했고, 맹세하기를 구하는 것을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다. 

2.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를 찾아가 무엇을 구할까를 묻고, 어머니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도록 지시한다. 헤로디아의 딸은 왕에게 급히가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한다. 왕은 당황하고 근심했으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함께 있는 사람들로 인해 거절하지 못하고 요한의 목을 베어 그 소녀에게 주고 만다. 그 소녀는 헤로디아에게 요한의 목을 가져다 준다. 

3.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지냈다. 


[질문하기]

1. 헤롯은 왜 요한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 

  1) 헤로디아의 딸에게, 공개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했다. 

  2) 헤로디아의 딸이 요한의 목숨을 달라고 할줄은 생각도 못했다. 

  3) 그럼에도 왕으로서 공개적인 맹세를 한 것을 취소할 수 없었다.(취소한다면 권위가 서지도 않을 뿐더러,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4)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요한을 죽이고자 했고, 결국 헤로디아의 계략에 헤롯이 넘어가고 만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1) 세례 요한의 죽음이 생각지 못한 순간에, 허무하게 벌어지고 말았다.(한 소녀를 계기로)

  2) 예수님의 죽으심 사건과 유사하다. (헤롯-빌라도, 무죄한 죽음 등)

  3)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많은 선지자가 죽었던 시대처럼, 세례 요한도 헤롯과 헤로디아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고 결국 예수에게까지 이 억울한 죽음이 이어질 것에 대한 예고편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묵상하기]

헤롯과 헤로디아를 보고 있으면 아합과 이세벨의 조합이 떠오른다.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요한도 헤롯과 헤로디아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어처구니 없이 죽고만다. 주님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렇게 아무 저항없이 신속하게 일어나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제자들은 허탈한 마음에 엠마오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의인의 억울한 허무한 죽음처럼 보인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 이후 주님께서 제자를 둘씩 파송하신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Mohammad Metri

Photo by Mohammad Metri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14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절.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하되

16절. 헤룻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절.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절.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절.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에 대한 소문이 크게 일어나게 되자 뜻밖의 사람이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헤롯 왕이었다. 

2. 헤롯 왕은 예수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예수에게서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서 엘리야라고도 했고, 옛 선지자 중 하나와 같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헤롯 왕은 ‘자신이 목 벤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3. 과거에 헤롯과 세례 요한 사이에 이런 일이있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드렸다. 그리고 헤로디아를 위해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옳지 않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4.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생각해 죽이고 싶었지만,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기에 요한을 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죽이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들을 때 번민하긴 하면서도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질문하기]

1. 왜 헤롯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에게 한 잘못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1) 예수가 엘리야나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세례 요한도 선지자였기에. 헤롯은 세례 요한도 평범하지 않은 선지자라고 생각했고, 그는 의로운 중에 죽임을 당했기에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 헤롯은 세례 요한은 죽을 사람이 아닌데 자신의 손으로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지속되었고, 예수의 이야기를 듣자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 헤롯은 왜 세례 요한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 

  1) 헤롯은 세례 요한이 늘 옳고 바른 지적을 하기 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요한의 지적을 무시하지 않고 달갑게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요한은 헤롯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했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이미 헤롯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였기 때문이었다. 부도덕적 행동임을 지적한 것이다. 

  2) 헤롯 자신은 요한의 지적을 아프지만 달게 받고 넘어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로 맞은 헤로디아는 그렇지 못했다. 요한의 지적을 불편해했고 불쾌해했다. 그래서 헤롯은 헤로디아를 위해서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그렇게 해서 헤로디아의 마음을 다독이려 했을 것이다. 

  3)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헤로디아의 모략을 통해서 헤롯이 결국 요한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묵상하기]

1. 헤롯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정당하거나 옳은 사람은 아니었다. 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일만큼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세례 요한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거룩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인 것을 헤롯은 알았다.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그를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사람이다. 그 선을 넘지 않았던 헤롯이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거 놓은 선을 넘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한 말 때문이고, 자신이 선택한 여인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서였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를 지키기를 원했다. 나는 헤로디아의 꾀에 빠진 것이다라고 핑계를 댈지 모르겠다. 그러나 헤로디아를 자신의 곁으로 부른 자도 헤롯이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도 그 자신이다. 

힘과 권력이 있으면서도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그릇된 선택이 자신의 분별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맞게 된다. 

2. 헤로디아는 어떤 사람인가? 

헤로디아는 권력을 지향하는 여인으로 보인다. 헤롯의 아내로 옮겨가면서 어떤 불편함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그것이 그릇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말한 세례 요한을 향해사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 그 불편함의 끊임없는 요구로 헤롯도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잡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헤로디아는 결국 장애물로 여겨지는 요한을 죽이는 자리로까지 간다. 헤로디아가 얼마자 권력지향적인지,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지를 잘 보여준다. 

왕은 헤롯이지만 헤롯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자가 있으니 그는 헤로디아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헤로디아는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Photo by Torsten Dederichs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5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막 4:1)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왔다.

2. 그러는 중에 큰 광풍이 불었고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해주시길 바랐다. 

3.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질문하기]

1.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경외함을 가지게 되는가? 

  1) 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2)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것

 -> 예수님은 자연현상(사람이 임의로 할 수 없는)에 대해서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연 세계 조차도 그 말씀 앞에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서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1) 상황 상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예수)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풍랑과 바다 앞에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 해석을 확대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함께 하실텐데 세상의 풍랑과 바다(고난, 환난 등)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상하기]

어부들인 제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에는 물이 넘치고 흔들렸을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과 대처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자는 척 누워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큰 풍랑으로 불안과 공포의 상황이겠지만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날 믿고 의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었을 것이고, 믿음은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도 마치 없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옆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주무시고만 계시니.. 더 답답하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자는척 하시지만, 실눈 뜨고 지켜 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제자들처럼 보통 두려움으로 주님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느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한 번은 마치 아무일 없는것처럼 태평하게 기다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닥치 위험을 먼저 막으시도록.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이 놈의 '믿음'은 위험한데? 주님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주님이 움직이시도록 믿음을 발휘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Rob Mulally

Photo by Rob Mulally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0절.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절.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절.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다른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그 나무 그늘에 깃들일 만큼 그 작은 씨가 성장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그런 특징을 가진다. 

2.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많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가능하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해가 부족할 경우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 주셨다. 


[질문하기]

1.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매우 작은 씨처럼 이 땅에 심겨지듯이 왔다. 

  2) 그러나 겨자씨가 자라면 꽤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듯 하나님의 나라도 이 땅에 매우 작은 모습으로 왔지만 훗날 큰 나무가 되고 그 그늘에서 안식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강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작고 약한 모습이라고 해서 없어지고 무력해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고 강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2.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유라는 의미인가? 

  1)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 중 이 땅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시기 위해 비유를 많이 사용하시기는 하셨지만 모든 말씀이 다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또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다양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소통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하기 위함이지 모호하고 난해하게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아무리 잘 하시려고 해도 상대가 들을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경우를 안타까워 하셨을 뿐) 

  2) 위의 구절은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다 정도로 이해하든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비유로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다(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이 땅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정도로 이해해야지 정확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다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다' 정도로 이해해야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씨보다 절대적으로 작다고 이해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더 작은 씨도 있을테니)


[묵상하기]

1. 하나님 나라는 매우 작고 무력하게 이 땅에 심겨진다. 예수님도 이 땅에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탄생과정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숨어다니셔야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왔으나 너무 초라하고 불안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세상의 나라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땅 속에서 죽은듯 지내다, 작은 싹을 틔우고, 점차 이삭이 되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특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씨만 봐서는 곧 세상의 나라가 더 신뢰할만 하게 보인다. 그래서 훗날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비유를 많이 하셨지만, 비유의 목적은 숨기고 감추려는 것에 있지 않다. 알수 없는 개념, 낯선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는것이 비유이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는 다른 영역이기에 비유가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유의 목적은 분명하다. 드러내시는 것이고 밝히시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것도 마지막 때에 가장 명확한 방법(성육신과 십자가)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성경에 너희는 알수없는 다른 의미가 있고, 그것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에 기본이 안된 사람들이다. 믿지 마라. 쫓지 말고 배우지 마라.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Evie Shaffer

Photo by Evie Shaffer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26절.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의 두번째 비유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인데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는 것이다. 

2. 땅에 씨를 뿌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씨가 나서 자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모른다는 의미보다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그 씨가 자라는 것에 어떤 원인을 제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마치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같은데(그 사람이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없다) 처음에는 싹이 나고, 이후에는 이삭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난다. 그리고 곧 열매가 익는다. 

4.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면, 씨가 신기하게도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2) 씨를 뿌린 것은 사람이지만, 땅이 그 씨를 받고 나면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된다.(싹->이삭->곡식->열매)

  3) 그 씨가 완전한 열매를 맺고 나면, 곧 낫을 대는데 이는 추수때 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심판까지 이어진다.

2.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는가?

  1) 일단 땅에 뿌려진 씨는 멈출수 없이 그 이후 과정을 진행한다.(복음의 시작으로 이 땅에 심겨진 예수와 그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성장한다.)

  2)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마침내 완성(열매)에 이른다. 

  3) 하나님 나라가 완성에 이르면, 그 때는 동시에 심판(추수)의 때가 된다. 


[묵상하기]

이 비유를 통해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심기운 하나님 나라의 씨라고 볼 수 있다. 그 씨를 뿌린 하나님의 손에서 떠난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이 땅의 능력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이라 보인다. 이 땅의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다. 무능하지만 무릎꿇을 수 없고, 절망스럽지만 희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거름이 되고 그들의 눈물이 물이된 이 땅을 양분삼아 뿌려진 씨는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씨는 단순히 척박한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생명력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온전히 살아서 열매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심판이 시작된다.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들이고 그 열매 맺기를 방해한 모든 세력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님 나라의 씨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심기우셨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그것을 살펴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Perry Grone

Photo by Perry Grone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1)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2)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3)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절. 또 안드레(4)와 빌립(5)과 바돌로매(6)와 마태(7)와 도마(8)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9)와 및 다대오(10)와 가나나인 시몬(11)이며

19절. 또 가룟 유다(12)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으셨을 때(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제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13절)

2. 열 둘을 세웠는데 이들을 세운 이유를 살펴보면(14-15절)

  1)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2) 보내사 전도도 하며

  3)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었다.

3. 열 두 명의 제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시몬(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시몬(가나나인), 가룟 유다.

4. 이들 중 특징적인 제자는

  1) 원래의 이름 외에 새로운 이름을 더한 제자는 시몬(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2) 예수를 판 제자: 가룟 유다


[질문하기]

1.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 전략(?)을 찾아 볼 수 있을까? 

  - 예수님께서 복음의 시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다. 다양한 문제 제기에 대해 답하시면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사람을 위하시고, 안식일의 주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명확하게 하셨다. 그 결과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주목했고, 심지어 유다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주변 이방 지역에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확장하는 일을 홀로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 중에서 따로 사람을 세워 일하시기를 원하셨다. 열 두 명을 따로 세우셨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게 했으며,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행하게 하심으로서 예수님 홀로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이루어 가시길 기대하셨다. 사역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된 것이다. 

2. 열 두 명의 제자 중 다른 이름을 부여한 세 명의 제자에 대한 언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란 새 이름을 주었다. 본문에서는 새 이름을 주신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이란 뜻이므로 베드로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셨다고 볼 수 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기질과 성향을 특징적으로 드러낸 말이 아닌가 싶다.(이후 성경을 읽는 중에 그 의미가 좀 더 밝혀질 수 도 있으리라)

3. 왜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 중에 예수를 팔 사람을 포함하셨으며, 성경은 굳이 가룟 유다를 언급하며 숨기지 않았을까? 

  - 예수님의 제자가 열 둘이라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 둘 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열 두명을 제자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열 둘의 숫 자 안에는 배신자(예수를 파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 어쩌면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는 이 땅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열 두 명 중 한 명은 배반하게 될 것을 모르지 않으셨음에도 그 배반자를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동행하셨고 마지마까지 함께 하셨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요소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팔리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 같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그림 안에 있으며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묵상하기]

1. 완벽한 완성을 위해 치명적인 문제를 심는다. 예수님께서 열 두명의 제자를 선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다.  열 두명의 제자 중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완벽한 성취와 결과를 위해 무흠한 사람을 찾고 방해가 될 모든 변수를 제거하는 것에 힘쓴다. 그렇게 준비하고도 기대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에 불안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가장 불완전한 요소를 심어 놓으신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요소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 극복하시고 그것을 넘어 완전에 이르신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이 땅을 살면서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Chris Gallimore

Photo by Chris Gallimore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7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절.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절.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께서 제자들과 다시 갈릴리로 가셨고 그곳에서 큰 무리가 따랐다. 그 무리는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뿐 아니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까지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다.(7,8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작은 배를 타고 나가셔야 할 정도였다.(9절) 

 - 갈릴리에 가실 때마다 많은 무리가 따랐다(막 2:13)

2. 물론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다.(10절)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렸고,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짖으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되심을 언급했다.(11절)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12절)


[질문하기]

1. 갈릴리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전의 기록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1) 이전에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음이 강조된다.(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를 대기함, 몰려왔다 등) 

  2) 많은 무리 중에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아왔다는 것이다. 

- 점점 더 늘어나는 무리와 다양한 사람들(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에게 나아오게 된 것

2.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께 보이는 반응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이전에 귀신들린 자는 '예수여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문구의 차이는 있지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줄 알고 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밝힌다. 

->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귀신들도 인정하고 엎드러졌다. 

3. 왜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는가? 

  오늘 본문 뿐 아니라 막 1:34에서도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는 마을로 다니시면 전파하시길 원하셨지만(막 1:38) 귀신들의 고백에 의해서 예수님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원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후에 그에게도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막 1:44) 예수님 당신은 마을에서 마을로 전도하시며 직접 다니셨지만, 사람의 말에 의해서, 귀신들린자의 입을 통해서는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셨다. 이 정도만 정리하자. 


[묵상하기]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거침없이 확대되었다. 무리는 점점 더 많이 예수를 쫓았고, 예수에 대한 소식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넘어 주변 이방 민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들이 주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열광하게 된 것은 '병을 고친다'는 것이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다. 예수님도 사역의 시작은 이 땅의 고통(사람들의 절실한 필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시작하셨다. 우리의 사역이 사역 대상자들의 필요와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 필요가 표면적이고 임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병을 가진자에게 병고침을 받는 문제가 실로 중요한것처럼 인생의 현실적 필요를 등안시 해서는 안된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본질적인고 영원한 것으로 향해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rawpixel

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절.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고침받기를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다. 

2. 예수님은 오히려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신듯 하다.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고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질문하시고 그들 스스로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답하도록 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무엇이 옳은 일인가?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무리는 잠잠했지만 그것은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반응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었다. 

3.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에 있는 것이었다. 안식일 규정도 문제가 없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잊고 껍데기를 율법주의적으로 붙잡고 강요하고 있는 이들의 ‘완악함’이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탄식하시고 노하셨다. 

4.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가 내밀매 손이 회복되게 하셨다. 

5. 이런 현장을 직접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왜 굳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위협에 빠지도록 자처하셨는가? 

  -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으시고 손 마른 사람은 긴급한 환자는 아니기 때문에 다음날 오라고 해서 고치셔도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괜한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고, 실속도 있는 행동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공개적으로 고치심을 통해 ‘안식일이 무엇을 위한 날’인지, ‘하나님이 왜 안식일 규정을 주셨는지’ 명확하게 알리기 원하셨다. 그렇게 하려면 안식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것 만큼 좋은 효과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그 손 마른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효과적)

2. 과연 안식일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인가? 

  - 안식일은 구별된 날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날이다.(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 그러나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날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나 선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3.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분노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완악함이다. 가르쳐주어도 듣지 않고, 깨닫게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귀를 닫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 주님은 탄식하시고 분노하신다. 

[묵상하기]

1. 안식일은 자신의 생명, 자신의 확장,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여주는 날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회적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 땅에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일꾼으로서의 충성을 보여주는 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2. 사람들이 죄 때문에 망하는게 아니다. 죄를 짓고도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죄를 숨기고 부정하고 죄를 드러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완악함이 결국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unsplash-logorawpixel

Photo by rawpixel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40절.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절.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절. 보내시면 엄히 경고하사

44절.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서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나아오더라.


[성경내용 정리]

1.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깨끗하게 해 주시길 원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주님은 '당신이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니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그대로 이루어졌다. 

2.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해지자 '곧' 말씀하셨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엄중히 말씀하셨다. 1)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2) 다만 제사장에게만 가서 몸을 보이고 깨끗하게 된 것을 입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일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 일을 많이 전파했고 널리 퍼졌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은 사람많은 곳으로 다니지 않으시고 변두리 한 적한 곳에 계셨지만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 왔다. 


[질문하기]

1. 일반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구별해서 구체적으로 한 나병환자를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1) 나병환자는 일반적인 병자와 구분해서 '부정한 병'이라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었고 부정한 자라고 여김받았던 병이다. 그런데 그 병을 가진자가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물리치지 않고 받아주셨다.(부정한 자, 죄인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2)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고치실수 있다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내가 원한다'는 것으로 화답하심으로 정말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에 원하시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 내시는 분)

  3)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후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것을 경고하시면서도 제사장에게는 보이라고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제사장'으로부터 입증을 받고 온전한 회복을 이루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셨다.(모세의 법을 인정, 제사장 인정,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강요하셨을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순종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숨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숨겨지지도 감출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마을을 피해 한적한 곳에 머물렀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 예수님은 감추고 숨기려했으나 참출수도 숨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원하시면 그 원하시는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많은 것을 원하시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고통당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나병환자의 경우 그는 얼마나 많이 그 병이 낫기를 원했을까? 얼마나 오랜시간 간절히 기도했을까? 그러나 그런 원함과 소망만으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그 일은 실행된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혐오했다. 그들이 낫기를 원하기 보다 그들이 자기 주변으로 오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나병이냐 아니냐를 판단하기는 일에는 정확했을지 모르지만 그 병을 가진 사람의 아픔과 간절함에는 무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았고 오히려 '나병환자가 낫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낫게 하셨다'. 어떤 사람이든 나병환자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회복된다.(확실히 구원이 임한다)

2.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고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그 분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스스로 확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출수가 없었다. 그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를 숨길 수가 없었다. 마을 변두리에 숨어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빛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 올 수 밖에 없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 빛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를 향해서 나아오게 된다. 

최근 한국 사회에 기독교의 영향력이 추락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감추어지는 것이고, 그릇된 전통이 추락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감출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비판은 예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빛인데 예수를 예배하고 섬긴다고 하는 너희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왜 어둡냐고 힐난 하는 것이다. 이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예수'에 집중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중동교회 주일낮예배(2016.8.21)


제목: 예수 은혜의 지속성(중보)

본문: 히 7:25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