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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절.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절.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절.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다. 그리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댓는지 물으신다. 이유를 모르는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상황에서 누가 손을 댓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한다. 

2.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셨고,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서 몸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던 혈루병 걸렸던 여인은 자신이 에수님의 허락도 없이 몰래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 모든 사실을 예수님 앞에 실토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인이 병에서 놓여  건강할 것임을 주님의 입을 통해서 확인받게 되었다. 

3. 그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음을 알린다. 딸이 죽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더 이상 번거롭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오히려 절망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독려하신다. 예수님은 긴급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신다. 

4.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딸의 죽음으로 인해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비웃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아이의 부모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딸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자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다.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5. 아이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놀랐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야기가 마친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왜 급한 상황 속에서 굳이 멈추어 혈루증 걸린 여인의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을까? 

  1) 단순히 혈류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되었다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다. 

  2) 그 이후 예수님의 행동,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혈루병 걸린 여인이 회복되었고 단순히 혈루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과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리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세상의 모든 의사들은 날 고치지 못했지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예수님은 기꺼이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옷 자락만 손을 댄다는 측면에서 작은 믿음이라고 할 수 도 있고, 세상 의술은 실패했기 때문에 유일한 소망이라는 측면에서 절박함으로 예수님을 의지했다는 측면에서는 큰 미음이라고 볼 수 있다.)


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한 이야기가 다른 병 치유 사건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1) 회당장 야이로의 딸 사건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예수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전의 치유 사건과 다른다. 

  2)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자 더 이상 예수님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비웃었다. 사람들에게 기적의 한계는 사망 전까지다. 사망 이후에는 누가 오더라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위독한 순간에는 예수님을 의지했지만, 사망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도 죽음의 영역만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긴급하고 신속하게 그 소녀를 살려내셨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극복해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 구체적인 첫 사건이다. 


[묵상하기]

1.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찾아가 물어보시고 낫게 해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무심히 지나가시는 상황(적극적으로 미리 찾아와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자가 에수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분의 옷 자락에 손을 대면 낫겠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도 그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문제를 가진 인생이 먼저 적극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 오는 것을 통해서 구원이 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그 믿음대로 병이 낫게 하셨고 구원을 말씀하셨다. 

2. 사망은 인류가 가지는 한계일 뿐, 하나님의 한계는 아니다. 하나님의 한계가 있을 수 없듯이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다.  인생이 먼저 한계를 긋고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 조차도 자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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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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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5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막 4:1)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왔다.

2. 그러는 중에 큰 광풍이 불었고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해주시길 바랐다. 

3.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질문하기]

1.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경외함을 가지게 되는가? 

  1) 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2)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것

 -> 예수님은 자연현상(사람이 임의로 할 수 없는)에 대해서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연 세계 조차도 그 말씀 앞에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서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1) 상황 상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예수)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풍랑과 바다 앞에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 해석을 확대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함께 하실텐데 세상의 풍랑과 바다(고난, 환난 등)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상하기]

어부들인 제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에는 물이 넘치고 흔들렸을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과 대처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자는 척 누워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큰 풍랑으로 불안과 공포의 상황이겠지만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날 믿고 의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었을 것이고, 믿음은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도 마치 없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옆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주무시고만 계시니.. 더 답답하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자는척 하시지만, 실눈 뜨고 지켜 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제자들처럼 보통 두려움으로 주님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느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한 번은 마치 아무일 없는것처럼 태평하게 기다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닥치 위험을 먼저 막으시도록.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이 놈의 '믿음'은 위험한데? 주님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주님이 움직이시도록 믿음을 발휘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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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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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절.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하시니


6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절.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절.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절. 그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본문내용 정리하기]

1.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금새 소문이 났고 그 집에는 발디딜틈도 없을만큼 사람이 많았다. 주님은 그 모인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셨다.(1,2절)

2. 그러는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풍병자의 친구 4명이 중풍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게되자 지붕을 뜯고 중풍병든 친구를 상에 달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친구들)을 보시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3-5절)

3.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서기관은 마음에 의혹을 품었다. 예수님의 행동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사하는 권세가 있단 말인가? 주님은 그 서기관의 마음을 아셨고 당신이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6-10절)

4.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갔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11-12절)


[질문하기]

1. 중풍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질병을 고쳐주신 다른 기록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1)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데리고 나왔다는데 차별성이 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4명이 데리고 왔다는 것, 사람이 많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고 환자를 위에서 내려오도록 했다는 것 등 친구들의 마음, 태도, 열심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함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믿음(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가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을 때, 그 친구들이 주님께 데리고 가서 고침받게 하겠다는 그 마음도 귀히 여기심을 알게 된다. 

  2) 중풍병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논란이 발생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논쟁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사하는 권세를 가졌는가? 한 서기관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심으로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했고, 그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과 같은 권세가 있음(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권세(가르침, 병고침, 귀신쫓음)와는 차원이 다른 권세(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신 사건이라 하겠다. 

2. 친구들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중풍병자를 들고온 친구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가 고침받은 것처럼)

  교리적인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은 본인의 진실한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주변 사람(친구, 가족 등)의 도움으로 스스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사람이 예수를 만나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적극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친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데리고 오기 위한 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 또한 그들의 믿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신념 때문일수도 있고 과거 교회와 교인에 대한 상처때문일수도 있고 무관심 때문일수도 있다. 이 때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반드시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열심과 헌신이 필요하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말씀은 그와 같은 메시지로 성도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을 것이다. 


[묵상하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을 알리셨다.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행하심으로 이 땅의 권세와 질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에 반응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이 등장한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사회적인 제약을 넘어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고, 중풍병자는 스스로 나올수 없는 한계를 친구들의 도움으로 주님께 나왔다. 본인에게 사회적인, 신체적인 어떤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의 도움과 환대,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직접 진행하시고 성취하시지만, 그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것이 포함되고 있다. 본인의 간절함, 친구들의 도움과 간절함 등이 그것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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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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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하기]

21절.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절.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절.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성경내용 정리하기]

1. 마가복음은 여전히 사건 전개가 급하게 진행되는 형식으로 전한다. ‘곧’ 안식일이 되었고(21절)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28절) 

2. 안식일 회당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다.(22절) 예수의 가르침은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형식적이거나 뻔한 내용의 반복이 아니었다. 그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으로 생명력이 느껴지는 가르침이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가르침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권세있는 말씀(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순종하게 되는)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깊은 통찰이나 깨우침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권위’(말을 하면 그 말대로 되는. 심지어 귀신조차도)있는 새 교훈인 것이다.(27절)

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가르침과 귀신을 내쫓는 말씀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듯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가르침과 권위는 순식간에 온 갈릴리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질문하기]

1.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시작된 일을 정리해 보자.

제일 처음 하신 것은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다.(부름받은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그 이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권위있는 말씀(귀신을 쫓아내심)을 행하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동점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에 대한 반응(순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람(백성. 12명의 제자)이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심지어 귀신조차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이 나가게 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귀신을 내쫓는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역과 구별된다. 귀신을 내쫓았다고 말하지 않고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귀신 조차도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모든 사람이 순종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대적자, 인간의 대적자인 귀신까지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14절) 그리고 첫 사역은 향후 12사도가 될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고, 가르침(율법과 대비되는)을 주셨고, 권위있는 일(귀신에게 명하고 귀신이 순종하는)을 하셨다. 이 일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말씀하시면 바로 순종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 일은 신속하게 확장되었다.(말씀에 권세가 있다는 것과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소문으로 갈릴리 사방에 퍼져나갔다.)

공생애를 시작하자 거침없이, 신속하게 예수님의 영역이 확장되고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가복음은 1장은 진행된다. 사람들의 불순종과 무지 그리고 귀신들의 방해로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해왔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귀신들의 방해에서 귀신들을 내쫓음으로 전환되었음을 마가복음 1장은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2. 한 나라의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많은 노력이 열매를 거둘 수 없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면 그 동안 쌓여왔던 적폐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전의 권세를 대체하고 새로운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동안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 시작을 보여주시는 장면이라 하겠다. 아직 모든 영역에 그 질서를 실현한 것은 아니지만,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 

3. 우리는 지금 그 시작을 과거에 두고 있고, 그 완성을 미래에 두고 있다. 그 시작을 믿는 자는 완성을 확신해야 하며 그 완성을 믿기에 오늘을 흔들림없이(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를 믿지 못하는 자가 미래를 논할 수 없다. 과거의 시작을 믿지 못하는 미래의 완성을 확신할 수 없고 당연히 오늘의 믿음이라는 것도 시련과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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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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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ing Jun Tan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하기]

12절.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절.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절.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절.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절.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성경 내용 정리하기]

1. 성령님은 예수를 급히 광야로 몰아가셨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계시면서 시험을 받았다. 들짐승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문화 공간이 아닌 자연 세계에 있었음을 말하는듯 하다. 그 시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험을 잘 통과하셨음을 보여주는듯 하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 시험도 필요한 과정이지만(성령이 인도하셨다는 측면에서도) 예수님은 잘 통과하셨음을 당연하다는 듯이 서술해가고 있다. (12-13절)

2. 복음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복음의 시작을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본격적인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통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고, 우리가 해야 할 일'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촉구를 하는 것으로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셨다. (14-15절)

3. 그리고 예수님은 해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고기잡는 어부를 선택하셨고 그들은 그물과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곧 좇았다. 첫 대상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였고, 그 다음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었다. 이들은 곧 예수를 따라갔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자신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를 따라간)' 첫 제자들이었다.(16-20절)


[질문하기]

1. 마가는 왜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 대해서 자세한 기술을 하지 않았을까? 드라마틱한 스토리인데.

  1) 마가는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해나가고 있는듯 하다. '곧'이란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만 3번 언급되고 있다. 신속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굳이 알만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수 있다.

  2) 이미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 것과 능력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 나아와 세례를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은 충분히 인정해 주고 있음이 분명함이 이미 언급되었다. 굳이 추가해서 광야 시험의 자세한 내용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온 것인가 아직 안온 것인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분이 과업을 완성할 것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관한 일이다. 수업 시작 시간이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다음 수업을 진행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고 곧 시작 종이 울릴 것이므로 '떠드는 학생들은 조용히 하고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자'라는 선생님의 말은 헛된 말이 아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선생님의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안되었다고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떠들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그 때 매점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수업시간은 임박했고 선생님은 이미 교실에 들어와 계신 것이다. 


[묵상하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혹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대로 이 땅의 나라에 속해서 살아간다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나라를 준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래서 멸망당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놓여진 과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기존의 삶이 방식과 태도에서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방법과 태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 되심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세상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구원을 위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회개: 현재의 삶에 대한 돌이킴

* 복음을 믿으라: 곧 완성될 미래에 대한 확신

현 세대에 대한 환멸만 있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혁명(인간이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그림은 현 세대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자기 욕구의 발현이거나 관념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현 세계와 하나님 나라의 대조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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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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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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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8> (정리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

  (이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


2. [권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절)

   (이유)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으니

   (결과) 이런 사람은(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7절)

   (원리)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구절간에 논리적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병렬식 주제 나열인가? 

  1) 2-4절은 시험과 인내와 성숙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고 서로 인과관계가 있었다. 

  2) 5절의 주제는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으로 앞의 주제과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3) 6-8절의 주제는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에 문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짐으로 인과관계가 있고 앞의 주제와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이어진다 할 수 있다. 즉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라(5절. 기도의 내용),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라(6-8절. 기도의 태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2. 큰 틀에서는 '기도'라는 것으로 주제를 잡을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험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도들은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으셨다. 큰 원리에 대한 내용과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케이스를 언급하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기초로하여 이 땅에서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 즉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 시험을 극복하며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있고, 하나님은 그렇게 구하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지혜'로서 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를 구하라는 권면은 2-4절에서 언급한 '시험'이란 주제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3.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라고 권면한다. 이 세상의 구체적인 지침까지 모두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왜 그런지, 여기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지혜를 구한다. 그 구체적인 '지혜'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구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험'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하여 숨거나 도망치지 말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되, '믿음으로'구하라는 요청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신념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시험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도 얻지 못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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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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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11_룻3:14-18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3:14-18]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오늘 본문은 룻이 타작 마당에서 돌아오기까지 보여준 보아스의 마지막 배려와 보아스와의 만남에 대한 과정을 전해 들은 나오미가 긍정적인 확신에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핵심적인 약속을 한 보아스는 룻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준다.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기 전에 룻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돌아가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룻에게 준다. 

이른 새벽에 돌아온 룻의 이야기를 듣고 보리 여섯되를 가져온 것을 본 나오미는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 분명히 보아스가 약속한 것을 성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 

[문장요약]

1. 보아스는 룻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는 일까지 신경써 준다. 

  1) 여인이 보리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14절)

  2) 또한 보아스는 돌아가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가져가게 한다.

 -> 보아스의 배려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보아스는 마지못해 룻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진심으로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 나오미는 룻의 이야기에 확신을 가진다. 

  1) 룻은 나오미에게 지난 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 한다. 그리고 보리 여섯 되는 룻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증해 주는 증거가 된다. 

  2) 나오미는 이제 안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음을 인식한다.(앉아 있으라. 18절)

  3) 보아스가 그 일을 성취하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리라 확신한다. 보아스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 룻의 이야기를 통해 나오미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보아스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다 할 것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의 시선이 보아스에게 향하게 된다. 보아스가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것인가?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보아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백성들을 향한 그 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처럼 마지못해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 책임은 마음의 태도와 일치한다. 우리는 책임과 태도가 다를 수 있으나 하나님은 다르지 않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2) 룻의 안전을 생각하고, 룻의 가난함을 생각하는 보아스의 배려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3. 나오미는 보아스를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오미가 보아스를 신뢰할 수 있었던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1)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 하나다.

  2)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 가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2장)

  3) 보아스가 룻에게 타작마당에서 기업 무를 것에 대한 책임을 약속해 주었다. 여전히 호의적이다. 

   4) 보아스의 이와 같은 모습에 나오미는 보아스를 믿었고, 앞으로 되어질 일을 확신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이유도 이와 같은 근거에 있는 것이다 .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룻에 대한 보아스의 태도를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 하나님은 나에게 대해서는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보자. 최근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2.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가? 나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는가? 

  -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 역사적 사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 외에 또 다른 개인적인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 있습니까?(간증적 사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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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9_룻3:1-5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3:1-5]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오늘 본문은 추수가 마치고 타작할 때가 되었을 때, 나오미가 룻에게 특별한 지시는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목욕하고 의복을 잘 차려입고 보아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다가 저녁이 되어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우면 조용히 그 발 밑 이불에 누으라고 지침을 준다. 

그 이후에 일이 어떻게 될지 나오미도 알수없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을 보아스가 말할 것이라 한다.(보아스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획을 세운듯 하다)


[문장요약]

1. 나오미는 타작할 때가 되었을 때, 이제 룻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1절)


2. 나오미는 룻에게 지침을 준다. 

  1)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2) 너는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장 마당에 내려가지만 보아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하라.

  3) 저녁이 되어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울때 그 누운 곳을 알았다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3. 그 이후의 일은 나오미의 전략 밖의 것이다. 보아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운명은 달라진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해줄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사사 시대라는 시대적 수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보아스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룻의 전략은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 백성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죄송하지만 그것 밖에는 살 방법이 없기에)

  1) 인간적인 치밀함이 돋보임

  2) 창 38장. 유다를 통해 기업을 이어가려고 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게 됨 

  ->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간절함에 반응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3. 룻의 순종: 룻의 무력(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인생)

  1) 보아스가 룻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 알 수 없는데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됨

  2)  나오미의 권유, 보아스의 은혜에 대한 막연한 기대(다른 방법은 없기에)

 -> 나오미는 마지막 남은 자기 권리의 입장에서 전략을 세우고, 룻은 마지막 남은 소망(인생을 구원해 줄)으로서 순종하여 나아갔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나오미의 전략은 어떤 면에서 긍정될 수 있는가? 나오미와 같은 신앙이란 무엇인가? 

   - 성도로서 언약관계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율법(자신은 율법을 어겼지만, 필요시에 율법을 근거로 행동함)

   - 우리가 얻은 구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인생의 바닥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줄을 잡는다. 첫 시작은 순전히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 구원의 자리에 들어선다. 

   -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나오미의 이런 요구에 대해서도, 언약 가운데 약속하신 일들을 이루어 주신다. 


2. 룻의 입장에서 순종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나오미는 언약적 법을 의지했지만, 룻은 그저 보아스에 대한 기대(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나아갔다.

  - 놀라운 곳은 보아스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룻과 나오미는 실패했을 것이다. (후에 아무개라는 사람은 기업 무를 책임이 더 큰 사람이지만 책임지려하지 않았다)

   -  순종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순종할만한 의지할만한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것이 더 중요하다. 룻은 베들레헴으로 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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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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