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여호수아 20장]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 이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도피성>이다. 잔인하 피의 보복을 막게 하시려고, 무고한 자의 피를 더 이사 흘리게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피할 수 있는 성을 정해 놓는 것이다. 모든 죄에 대한 도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라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인권 옹호적인 제도적 장치이신 것이다. 이방인에게도 보장된 제도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도피성의 유래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한 도피성을 너희 중에 정하라고 말씀하심.

  2) 도피성은 부지중에 실수로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할 수 있도록 해서 피의 보복자를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 이 성읍 중에 하나로 도망하는 자는 그 문 어귀에 서서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다. 

   (2) 그 사건을 들은 장로는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함

   (3) 피의 보복자가 오더라도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라.(미움없이 부지중 살인이니)

   (4)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혹은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 

  3) 도피성으로 정한 곳(요단서편: 게데스, 세겜, 헤브론 / 요단동편: 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

  4)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지도에서 빨강으로 표시된 곳이 도피성입니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한 후에 하나님은 이전에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도피성에 대한 명령을 주셨다. 도피성은 악의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의 보복자로부터 정당한 보호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부지 중에 살인한 자는 도피성을 찾아 장로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장로는 그 안으로 그들 들여서 성 사람들과 함께 거하도록 하고,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 가운데 거류하는 거류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재판을 하거나 혹은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그 이후에는 자신의 성읍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요단 동편에 세 곳, 요단 서편에 세 곳을 도피성으로 정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하나님은 인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도피성을 정하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부지중에 악의 없이 사람을 죽인 사람의 경우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도피성 제도를 두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류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도였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 뿐 아니라, 죄가 일어나는 과정도 살펴보시고, 그 과정이 명확하게 설명되고 확인될 때까지는 개인적인 판단을 보류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설사 그 사람의 잘못이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이 아닌 공식적인 재판을 통해서 판결이 나도록 제도화 하셨다. 만약 이런 제도가 없다면 언제나 세상은 강한 자의 편이 될 것이고, 정의라는 것은 강한자의 기준이 되고 말것이다. 


2.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해 피할 곳을 예비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조차도 피할 곳을 예비하신다. 숨을 곳을 마련해 주시고 일단은 재판을 받을 기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도 속에서도 우선 피할 곳, 숨을 곳을 마련해 주심으로서 범죄한 자들에게 조차도 숨쉴 수 있는 공간, 시간을 마련해 주신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하나님 안에는 숨을 곳이 있기 때문이고 피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발가벗긴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주의 피로 우리 죄와 수치를 가리소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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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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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히브리서 9장에 대한 내용 정리를 해봅니다. 복잡할 것 같은 내용도 논리적 전개를 따라 저자의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좀 더 단순화될 수 있고, 강조점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익숙한 구절이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되는 것도 발견합니다.

22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와 같은 구절들은 본 장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주인공은 아닌 구절인듯 합니다. 물론 조연으로서 필요한 구절임은 당연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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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첫 언약)에도 제사장이 성막에서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법과 성소는 비유지 실제로 온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혁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 둔 것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하늘)장막으로 들어가셨다.

따라서 옛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로 그 백성들의 부정을 정결하게 했다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완전한 제물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지 못하겠는가? 충분히 넉넉히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 동물의 피(죽음을 통해)가 있을 때 죄사함의 효력이 인정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피)이 있어야만, 유언한 자의 죽음이 유언의 효력시점이 되듯이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의 효력시점이 되는 것이다.(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역사적 시점이 성도가 죄를 사함받는 역사적인 시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것을 번거롭게 여러번 하신 것이 아니라(구약의 제사장은 여러번 할 수 밖에 없었다. 제물 효과의 불완전함 때문에) 마지막에 단 한번으로 모든 죄사함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다시 나타나시겠지만 이것은 또 다른 죄사함을 위함이 아니다. 죄와 상관없이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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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장은 완전한 대제사장에서 새언약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와 같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불완전한 (대)제사장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새언약과 대치되는 옛 언약은 어떤 것이며 어떤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지 살펴봐야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그와 같은 개략적인 내용은 히브리서 8장을 읽어봐도 대략 알 수 있다. ^^

 

히브리서 8장 내용의 골자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으리라 생각한다.

전에도 언약이 있었지만, 그 언약을 이루어 낼 능력이 사람 안에는 없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이 가지는 한계였다. 율법 그 자체, 옛 언약 그 자체는 옳고 맞는 것이나,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받은 그 백성의 연약함과 죄(성)가 그 언약에 신실하게 응답하지 못하게 함으로 언약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언약의 신실성을 통해 회복을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요원해지는 것 같았다.(구약의 역사)

그러나 하나님은 새 언약을 준비하셨다. 새 언약은 내용의 새로움이 아니다. 그 언약을 체결한 자와 그 언약을 성취해 가는 방식이 새로운 새 언약이다. 율법과 언약을 문서(돌판)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새기는 방식으로 언약 성취의 방식을 바꾸신 것이다. 전에는 내 힘과 능력에 의존해서만 언약의 성취여부가 결정되었지만, 새 언약은 그 방식이 달랐다. 언약을 내 생각 내 마음에 새기심으로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능력(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한 도우심, 성자 하나님의 중보하심으로 성취가 보장되는)으로 언약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새 언약(성취되도록 하는)을 전해주신 분이요, 이 분이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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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1-14에서 저자가 멜기세덱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은데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의 수준이 충분치 못해(너무 연약해서) 말하고 있지 못하다가 히브리서 7장에 가서야 조금씩 저자가 하려고 하는 내용들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은 하나의 중간 삽입적 내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7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처음에는 멜기세덱의 독특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을 통해서 볼 때, 아브라함보다 높은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1,7절). 이런 행위는 또한 당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레위 지파까지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격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레위지파(제사장) 보다도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9,10절)

더불어 제사장의 혈통과 활동에 대한 규정을 주고 있는 율법을 통해서 볼 때, 멜기세덱의 제사장적 역할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의 바뀜을 말하는 것이다.(11,12절) 사실 율법은 약하고 무익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시고 다른 방식으로 제사장을 세우신 것이다.(15,16절)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워진 제사장은 더 완전하고 온전한 제사장이다. 오히려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장는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려야 하는 존재였으나,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악이 없이 거룩하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제사드릴 필요도 없고,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사를 드리심으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으셨다.(22-28절)

예수님은 레위 지파를 따라온 제사장은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요 이는 오히려 레위 지파를 따른 제사장 보다 더 월등한 것이다. 물론 율법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오히려 율법은 연약하고 무익하여 폐한 것이고(18절) 하나님이 더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운 것인데, 이는 오히려 더 뛰어나고 월등하여 구원의 더 큰 소망이 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제사장 지파가 아니라는 혈통적 문제와 율법과 다르다는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벗어나 더 큰 소망을 가진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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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장은 1장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1,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와 비교해서 천사 우위에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모세와 비교해서 모세(하나님의 집의 종) 우위에 있는 예수그리스도(하나님의 집의 아들)를 소개합니다. 4장에 이르러서는 <안식>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면서 참된 안식을 이스라엘이 얻지 못했지만, 그 아들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참된 안식에 이르게 될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완고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한다면 광야에서 엎드러진자와 같이 안식에 이르지 못할 것을 경고하신다.)

오늘 5장은 천사와 모세에 이어 대제사장이신 예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것이지요.(대제사장 보다 월등하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와 같은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유대인에게 대제사장은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신 자에 한해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어 내 아들이라고 하셨다. 더불어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던 대제사장의 역할은 특별하지만, 그 자격됨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때문이다.(2절) 그래서 백성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존재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세우실 때, 대속해야 할 사람과 대속의 과정을 도와야 할 사람의 격차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대속해야 할 사람을 능히 용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대속의 과정을 돕는 본인도 연약함에 휩싸여있는 존재니까) 하나님은 일부러 다른 사람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같은 연약한 자를 부른 것이다. 왜?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해서 능히 용납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하셨고, 우리와 같은 연약함이 되도록 환경을 만드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리면서 살수 밖에 없도록 하셨다.(7절) 그리고 그 아들되신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예수님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무식하고 미혹된 우리 인생을 용납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이 표현은 능력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정서적 동질감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묵상]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아론의 혈통을 따라 온 분은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전혀 다른(그러나 아론보다 더 본질적 제사장인) 혈통을 따라 온 대제사장임을 지적한다. 더불어 그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고 왔다는 것이 우리가 메시야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한 조건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충분의 조건(연약함에 휩싸여야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용납할 수 있기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를 좇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다. 예수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줄 때(능력자와 강한 자로 나타날 때)는 그를 따르다가도 그가 무력한 자, 연약한 자로 드러나게 될 때는(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두가 그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무력함에 휩싸였기 때문에,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달고 살아야 하는(살면서 기도제목이 많은_평생 잘 안풀리는 성도와 같이) 삶을 살아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메시야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무력함과 연약함이 그가 진실로 모든 사람들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합당함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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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의 이야기는 모세보다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강조하면서 너희는 모세의 신실함 속에서도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함으로 믿지 못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으로 마쳐진다.

4장은 안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4:1)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창조때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3절)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참된 안식은 준비가 이미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가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광야 때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의 이야기가 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여호수아 때에도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3절, 8-9절)

따라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어떤 시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가 그 약속에 믿음으로 결부할 때(2절)에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완고하게 하지 않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그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그 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10절) 아마 이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 안에서 살다가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주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위해서 힘쓸 것을 요청하면서, 현재의 삶 속에서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광야 이스라엘 백성중에 불순종함으로 엎드러졌으므로)

우리가 큰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다. 또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성도가 되고난 후에도 우리의 믿음이 잃어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며, 또한 우리를 우리 입장에서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그래야 주의 안식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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