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

2013년 8월 4일(청년수양회 후 주일 저녁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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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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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3일간 제주답사를 청년들과 다녀오면서 유행한 말 중에 '새로고침'이란 말이 있었다. 이는 함께 간 청년 중 자매 한 명이 중간 중간 화장을 고치는데 스스로 이것을 '새로 고침'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컴퓨터에서 인터넷 화면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클릭하는 것인데, 중간 중간 화장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로 고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모습인 것이다.

느헤미야 13장은 그와 같은 것이다. 새로고침.

이전에 세팅하고 정했던 것들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다시 옛모습(생얼)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간 중간 새로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개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반복적인 연약함과 죄 때문에 이스라엘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보면서도, 어쩌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새로고침'(계속되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정리1. 본문에 나온 내용 정리]

1. 섞인 무리 중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시킨 이유

  1) 그 날(이전의 어떤 날인듯)에 모세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모압과 암몬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알게 됨

  2) 이는 과거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오는 과정 속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따듯하게 영접해주지 못할망정,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셨다.

  3)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하였다.

2. 그런데 암몬 사람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를 잡게 되다.

  1) 성전의 방을 담당했던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2) 도비야를 위해 큰 방을 만들어주었는데 원래 그곳은 소제물을 보관하고,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다.

  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왕에게 잠시 다녀와서 보니 이와 같은 악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4) 느헤미야가 도비야의 세간을 다 치워버리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소제물과 유향으로 다시 채워넣음.

3.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1 (레위인을 불러옴)

  1) 레위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함으로 레위인들이 각기 자기 밭으로 도망하여 성전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되었다.

  2) 느헤미야가 레위인들을 다시 불러오고 책임을 맡기고, 그들의 필요한 양식을 채워 넣었다.

  3)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느헤미야가 한 선한일을 기억하소서.

4.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2 (안식일을 다시 지키도록 함)

  1)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여러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장사를 함.

  2) 느헤미야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책망함.

  3) 문지기를 세워 안식일에 문을 닫고 장사하는 사람이 없도록 함.

  4) 자신이 주를 위하여 한 이 일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함. 주의 큰 은혜로 나를 아끼소서!

5. 다시 고치는 느헤미야의 개혁3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킴)

  1) 유다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다.

  2) 그 통혼한 자녀들 중에 아스돗 말을 반쯤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는 자녀도 있었다.

  3)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고 그들 중 몇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다.

  4) 그들에게 우리의 딸을 주지 말고, 그들의 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맹세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왕 솔로몬도 아내로 맞은 이방여인들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큰 악을 하나님께 범하겠는가?

  5) 느헤미야는 대제사장의 아들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것을 알고, 그를 쫓아내어 제사장의 직분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들로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했다.

  6)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일을 기억하사 복을 달라고 소망했다.

[정리2. 본문의 재구성]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 12장과 잠시 시간적인 공백이 있다. 성벽재건과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과의 약속(다시 돌아오겠다는) 때문에 왕에게도 돌아갔다. 그리고 몇 일후 다시 왕에게 요청하여 말미를 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왕을 만난 시간은 몇 일이지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는 시간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1년 이상되지 않았을까?)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그 짧은 시간에 다시 옛 모습을 돌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4가지의 큰 죄악이 있었다.

1. 과거 발람 사건으로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는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버젓이 제사장 엘리아십과의 관계 속에서 성전에 곳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른 본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세간을 다 꺼내고, 다시 원래의 것으로 채워 넣었다.

2.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과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아니함으로 이들이 생계 때문에 다 성전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다시 이들을 불러오고 직분을 맡기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했다.

3.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것을 어겼다. 안식일임에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문을 닫게 하고 그 주변을 얼씬 거리는 사람마저 경계하여 있지 못하도록 했다.

4.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도 심각했다. 대제사장의 자손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어 있을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느헤미야는 이들 중에 일부를 때리고 털을 뽑아 버림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맹세하여 그렇게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개혁을 행할 때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와 같은 노력과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사람들은 하드웨어적 요소와 인적 자원, 컨텐츠 만으로 개선이 일어나지 않는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을 통해서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내적 개혁을 통해서 말씀과 성전 제사와 직분과 이들이 장기적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이전의 모세의 때와 같이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남은 자 이스라엘은 온전해 질 수 없었다.

즉, 이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람과 인류가 변화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모든 개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옛 죄악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메시지도 함께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멋진 개혁과 변혁을 일구어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는 한계가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이들의 외부적 환경이 아닌 내부적으로부터 오는 개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내적 생명의 탄생,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새생명의 탄생이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2. 반복적인 새로고침이 필요하다.

중간 중간 화장을 고쳐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은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출동하고, 에스라가 출동했어도 개혁은 다시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탁월한 지도자의 부재가 아니라, 그 만큼 우리의 본성이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느헤미야처럼(미리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개혁을 일상으로 생각하고 정기적인 자기 평가와 새로 고침의 사역을 꾸준히 감당해야 필요성을 가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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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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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아웃리치 답사 관계로 7/5-7 제주도에 다녀오는 관계로 생각만큼 묵상 작업을 진척하지 못했네요. 물론 느헤미야 11장은 제주도에서 작업한 것이기는 하지만요.^^

오늘은 느헤미야 12장입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성벽을 재건하고 나서도 상당히 긴 내용을 성벽 건축 이후에 다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성벽 재건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적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자.

그리고 내용 정리가 어려우면 성경에 이미 적혀있는 소제목을 따라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어쩔 경우는 그것이 더 안전하다. ㅋ

 

[정리1. 본문을 내용에 따라 나누고 정리한다]

1.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명단

  1) 제사장들의 명단(1-7)

  2) 대제사장 예수아의 자손들(8-11)

  3) 제사장의 족장들(12-21)

  4)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 관한 기록

   (1)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다.(다리오 왕 때)

   (2)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

  5) 당시의 지도자: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던 일이다.

2. 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다.(27-43)

  1)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옴.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 마을을 이룸.

  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케 함.

  3) 찬양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움직였고 성전에 머물러 그 날에 그곳에서 큰 제사를 드림.

3.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준 몫(44-47)

  1)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을 곳간에 쌓음.

  2)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인하여 즐거워했다.

  3)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했다.

  4)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더라.

[정리2. 본문을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정리한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벽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다. 또한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이다. 이 봉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이들로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기도 했다.

또한 백성들은 이들을 기뻐하며, 이들의 섬김을 즐거워했다. 그들은 정한 예물을 드리고 그것을곳간에 잘 넣어 보관했다. 그것을 통해서 성전 안에서 노래하는 자나 문지기도 생활을 보장받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행하는 것에 전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3. 묵상및 적용]

1. 하드웨어의 구축이 전부는 아니다.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사역의 전체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를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성전이 필요했고, 성벽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나 느헤미야는 그 이후까지 밀고 나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적 성과가 성과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스템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은 그 시스템을 유익하게 사용할 컨텐츠와 인적 자원이 지속적으로 운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잠시의 폭죽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불을 피워내지는 못하고, 그 불로 사람들에게 따스한 열을 공급해주지는 못한채 불꽃 놀이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느헤미야 12장은 성벽 재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2. 결국은 인적 자원이 중요하다.

  느헤미야 12장은 성벽 재건 봉헌식을 통해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등장이 많다. 역할도 많다. 또한 곳간에 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었다는 것을 통해 이들의 장기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백성들은 이들을 기뻐했고, 이들은 자신만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단순히 성벽을 재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성벽이라는 하드웨어적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전에서 제사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일이 지속될 수 있는 인적 자원과 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사람이 희망이다. 이런 문구를 대할 때, 우리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사람이 희망일 때, 그것은 결국 인본주의적 경향성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희망이다. 모든 하드웨어적 조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3. 성직자의 생계 문제에 대한 고찰

성직자들의 생계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본문이다. 가장 단순하게만 말하면 성직자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성직자들은 다시 성전에 모여 본연의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직자는 먹는 것과 같은 저급한 것에 좌우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먹을 것이 없더라도 부르심 받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당시의 많은 문제가 성직자들의 생계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환경이 되었을 때(여호와 신앙이 약화되었거나, 우상숭배가 강화되었을 때)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성직자들의 생계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영성과도 맞물려 있으며, 집중력과도 맞물려 있다. 삶의 여백하고도 맞물려 있다. 아웃리치 답사를 하면서 조그마한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그 분들의 상황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생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람이 얼마나 쉽게 변질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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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에 와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 밖의 성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조건과 명단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2. 그 남은 백성 중에서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3.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었다.
4.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했다
5. 예루살렘 거주자의 명단(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
1) 베레스 자손 아다냐와 마아세야
2) 갑배와 살래
3) 요엘이 감독이 되었고,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다.
4) 제사장 중에
5)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제사장)
6) 레위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기도할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7) 성 문지기..

8)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다.

9) 유다의 아들 세라의 자손 곧 므세사벨의 아들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다.
10) 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일부는 베냐민과 합하였다

[묵상과 적용]
1.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먼저 있어야 할 대상을 배치하고, 그외의 사람들은 제비뽑아 결정함.

모든 사람을 제비뽑지 않았다. 성전을 중심으로 섬겨야 할 대상을 먼저 세우고 그 나머지 인원을 제비뽑았다. 민주적 절차가 우선인 지역이 아니라 사역과 사명이 우선인 지역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권이라기 보다는 사명이었다.

사명과 직책에 의한 혜택과 특혜는 구별되어야 한다.

2. 예루살렘 외의 유다 땅에도 흩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예루살렘이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유다에만 살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주변 도시가 발달하고 견고해야 예루살렘도 든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모두 중요하고 중심적인 일만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는 지체가 있을때 중심적인 일도 감당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보조적 역할의 도움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인근 주변에 살아야 하고, 누군가는 2차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누구나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1차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2차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잉영의 존재로 인식하고 무시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역으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열등감에서 오는 불편함일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지만 원했던 사람들에게 복을 빌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중심이 되지 못한자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회가 위의 갈등을 해소해 주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서로를 잉여의 존재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고 서로의 상황에 복이 임하기를 원하는 관계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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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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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이야기는 성벽 재건 이후에도 상당히 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는것 같습니다. 느헤미야 = 성벽 재건, 땡.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성벽 과정 처럼 다이나믹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벽 재건 이후의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과정 뿐 아니라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까지 모두 설명해야 느헤미야서를 기록한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지요.

암튼, 6장에서 성벽을 재건하고 나서도 7장, 8장, 9장, 10장까지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1차 정리. 본문 내용 중심으로]

1. 언약에 인봉한 자들의 명단(1-27절)

  1) 총독 느헤미야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사장들, 레위인들,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인봉에 참여

2. 맹세한 사람들의 맹세의 내용들(28-39절)

  1) 언약에 인봉하지는 않았지만 그 언약에 맹세한 사람들은 남은 백성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한 사람과 가족들.

  2) 저주로 맹세하기를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과 계명과 규례를 지켜 행한다.

   (1) 우리 딸을 이방인에게 주지 않으며, 이방인의 딸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

   (2) 안식일에는 물건을 사지도 않고 팔지도 않는다.(이 땅 사람들이 요구하더라도)

   (3)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

   (4) 스스로 규례를 정하여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해씀

   (5) 항상 드리는 전설병, 소제, 번제를 드리고, 안식일과 초하루에 쓰는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의 속죄제를 드리고.

   (6) 제사를 위해 사용되는 나무를 하나님의 전에 바쳐 제단에 사르게 하고

   (7) 해마다 토지 소산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고

   (8) 맏아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전에 가져가 드리고..

   (9)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고

   (10) 레위인들은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넣어 두라.

   (11)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2차 정리. 본문을 저자의 의도에 맞춰 내 방식으로 재구성]

귀환한 온 국민적인 회개의 운동이 마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다시 언약을 맺기로 결심했다. 이제 느헤미야 10장에서는 그 언약 체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실현할 인봉한 사람들의 명단이 언급되고, 그 외에도 모든 사람이 그 언약을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어떻게 보면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여호수아가 너희가 믿을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제안하고 그 제안에 모든 사람이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한 선조들의 모습처럼, 이들이 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결심이면서도 동시에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결정입니다.

그들이 결심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을 것이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이며(안식년도 지킴) 성전을 통해서 드려야 할 제사와 절기의 예물을 온전히 드릴 것과 또한 성전에 바쳐야할 것을 바쳐서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주고, 성전 자체를 버려두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심이다.

이들의 이와 같은 결심이 잘 지켜지게 되는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선조의 역사를 통해 깨달았는지 아니면 깨달았어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지를 봐야 할 일이다.

[3차 정리. 묵상과 적용]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재 언약의 체결은 매우 공식적이고 무게감있게 진행되었다.

다시 언약을 맺고 그것을 인봉한 사람들의 이름이 일일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맺은 내용들에 대해서 하나씩 구체적인 실행 지침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귀환한 공동체는 새로운 언약식을 통해서 조상들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들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새로운 마음으로 언약식에 임했다. 책임있는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적어, 역사에 남김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살것을 결심했을 것이다.

우리가 뭔가 새로워지길 원한다면, 내적으로 개인적으로만 결심하는 것으로는 약할 수 있다.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형식을 통해서 나의 결정의 무게를 더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말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서 나의 결심에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요, 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서 나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요청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변화는 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정치인들의 정견발표, 연예인들의 기자회견, 대통령의 담화문...자신의 의지와 견해를 오해없이 분명하게 함으로 자신의 의지와 입장을 강화하고, 오해를 불식시키고 또 자기 자신도 그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또한 공개적으로 행한 것이기에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제어장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제발, 이런 의지와 무게감으로 이런 장치들을 활용해 주셨으면 좋겠다. 언론 플레이가 아니라.. 어떤 꼼수로서의 말장난이 아니라... 무게감있고 책임감있게...

 

2.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했던 항목들을 잘 살펴야 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돌아온 백성들이 맺은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의 공약을 잘 살피고, 그 공약대로 진행하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하는 것처럼 백성들의 구체적인 의지와 결단의 내용들이 잘 진행될 것인지 우리는 살펴봐야 한다.

만약 꾸준히 그렇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행한 이들을 향해 어떤 복을 허락하시는지 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왜그렇지 못했는지를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언약을 성실하게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을 예측하며 성경을 보는 것은 좋은 성경읽기다. 한 마디로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이고, 성경의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이렇게 했었는데 과연 지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안목을 기반으로 한 예측이라면 더욱 유익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 통혼하지 않는 것

2.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거래행위 금지)

3. 성전과 관계된 제사, 절기, 봉사자들에 대한 생계보장 등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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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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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라는 단어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포함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는 다른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의라는 단어의 한 측면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다룬다)

단어는 텍스트 안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느헤미야 9:8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땅을 그의 씨에게 주시리라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룬 것을 보면서, 주는 <의>로우시다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서 <의>란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에 성실하게 행하심을 의미한다 하겠다.  

(느 9: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의=차다크, 체데크의 동사형)

 

창 38장의 내용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이다. 유다는 다말에게 해야 할 도리로서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반면, 다말은 그 언약에 근거해서 무리한 방식(비도덕적 방법)을 통해 언약 성취를 이루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유다는 다말의 그와 같은 행동을 향해서 그것을 <옳도다> 평가하고 있다. 비윤리적인 행위를 옳다고 평가한 것은 <옳다>라는 행위가 여기서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언약에 있어서 신실하고 정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옳도다=차다크, 체데크의 동사형)

롬 3:25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의 말씀 속에서도 언약 백성들이 지은 죄를 오래 참으시고 간과하셔서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와 심판을 내리지 아니했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라 말할수 있으며,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에서 의란 바로 언약적 개념 속에서의 성실함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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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가 읽은 모세의 말씀을 읽고는 백성들은 울고 말았지요. 그러나 충분히 회개하고 울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성일 이었고, 즐거운 날이어야 했으니까요.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의 7일을 보냈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것이 일곱째 날 22일(15일부터 일주일을 초막절로 지키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곱째 날 24일이 되었습니다. 절기는 마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째달 24일에 사람들은 다시 모여 온 민족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이후에 새로운 언약 체결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다시 구하게 되지요.

 

[1차 정리. 내용정리]

1.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이스라엘 역사관

  1) 일곱째 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씀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함.

   (1) 낮의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함

   (2) 낮의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3)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은 단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2.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5- 37)

  1)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원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합니다.

  2)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심(7,8절)

  3) 애굽의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로 애굽을 치셨다.

   :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

  4) 시내산에서 강림하셔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다. 안식일 알리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 (11-15) 그 땅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거역했으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17절)

  6)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의 것을 차지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이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거역하여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다.(18-26)

  7) 그래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환란때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다시 구원하였으나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러기를 계속 반복하는 역사를 보냈다. 그래서 결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았다.(27-31)

  8) 앗수르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소서.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고, 그들이 우리의 소산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32-37)

3. 재 언약을 약속하는 귀환한 백성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였나이다.

 

[2차 정리. 성경 내용을 내 것으로 재정리]

에스라가 읽어 준 말씀에 순종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회개했고, 일곱째 날 15일에 7일간 초막절의 절기를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였다. 아마 에스라가 처음 말씀을 읽었을 때, 사람들이 회개의 마음으로 울려고 했던 것(8:8-10)을 성회이기에 즐거워하라고 했었던 것에 대해서 절기를 지나 따로 회개의 날을 잡아 진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백성들은 우선 이방인과의 절교를 하고, 죄를 회개했다. 한 낮의 사분의 일은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여 듣고, 또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레위인들은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인데, 그 분의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그리고 그 분은 성실하게 우리의 필요들을 채우며 인도해주셨는데, 우리 조상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큰 긍휼로 다시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도록 보낸 선지자마저 듣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결국은 하나님은 앗수르에 손에 이스라엘을 붙였다. 그러나 아주 멸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견고한 언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오니 하나님이여 돌이키시사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3차 정리. 묵상과 적용]

 1. 반드시 죄의 문제는 퉁치고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이들은 이들이 직면한 이 모든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계며,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성일이요 기쁨의 날이었다. 이들은 이들의 감정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맞춰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감정이 상하거나, 감정이 흥분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요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아팠고 슬펐지만,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초막절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났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갈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초막절을 마치고 이틀만에 다시 모였다. 본격적인 회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종종 회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무뎌진다. 잠시 회개의 내용들을 말한 후, 아니면 그 감정의 때를 놓치고 나면 회개에 대한 의식조차 잊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회개의 무게가 가볍기 때문이다. 통회, 통증있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의 파장이며, 느낌이었지 우리의 심비에 새겨질만한 아픔이 없는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귀환한 이들은 그런 회개는 아니었다. 이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달았던 본인들의 죄는 거대한 파도같아서 자신을 덮쳐왔고, 그 충격과 감정은 우리의 이성에 새겨지는 아픔이었다.

절기를 마친후 이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쉽게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쉽게 죄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아픔과 파장과 파멸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으로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아픔과 크기를 잊게 하는 복음이 우리를 방종으로, 무례함으로 교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긍휼이란 단어 만으로도 호의가 느껴진다. 그런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에 <크신>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긍휼>이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신 긍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긍휼을 베푸셨는지... 얼마나 많은 거절과 완고함과 교만에 대해서 다시 긍휼을 베푸셨는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너무나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긍휼하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은 참으로 크다라고 놀라고 감탄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긍휼하시다는 말씀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큰 죄를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는 큰 긍휼을 성경은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우리의 큰 죄 <<<<< 하나님의 크신 긍휼

믿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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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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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에 와서 지도자에서 백성으로 중심 축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지도자 느헤미야를 통해서 진행되던 예루살렘의 회복은 마지막 백성들의 움직임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 본문입니다.

 

[정리 1. 내용 정리]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모세의 율법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1) 일곱째 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를 불러 모세의 율법 가져오기를 청했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서다.

  3) 에스라는 나무로 만든 강단에 섰고, 백성 앞에서 말씀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났다.

  4)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모든 백성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굽혀 경배했다.

  5)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레위인들은 그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해석해 주었다.

  6) 그 말씀을 깨달은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울었다.

  7) 느헤미야는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울지 말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요청한다.

  8) 레위 사람들도 백성을 정숙하게 하고는 오늘은 성일이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함.

2. 이튿날 또 다시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임.

  1) 에스라는 말씀 속에서 초막절 절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그 말씀대로 행할 것을 요청.

  2) 백성들은 초막절 규례에 따라 무성한 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이레를 지냄

   : 지붕 위, 뜰 안, 하나님의 전 뜰, 수문 광장,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음.(16절)

  3) 이와 같은 열심히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 때부터 그 때까지 없었던 일이다.(17절)

  4)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다.(18절)

 

[정리2. 내용을 내 방식으로 재 정리]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후속 작업을 모두 했다. 지도자를 세우고, 명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여 훗날의 혼돈을 막도록 조치를 취해 놨다. 여기까지는 지도자의 몫이고 느헤미야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의 완전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 느헤미야 8장은 그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백성들이 스스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를 청하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에스라는 그들의 요청에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레위인들은 그것이 잘 깨달아지도록 열심히 중간에서 힘쓴다. 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자신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깨달은 것 같다.) 온 백성이 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일임을 강조하고 먹고 마시고 축제의 날이 되도록 요청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것이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 에스라를 찾아 온다. 율법의 말씀을 더 알고 싶어서이다. 에스라는 내친김에 초막절을 가르치고, 지금이 초막절을 지켜야 할 때임을 말한다.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마음을 다해 초막절 절기를 지킨다. 그 열심과 진지함이 얼마나 컸는지, 여호수아 이래로 이처럼 초막절을 지킨 일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루살렘 성벽 공사의 최종적인 마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다.

성벽이 재건되고, 그것을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서 마지막으로 완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 성벽도 계보도 제사도 .... 모두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점은 말씀으로 찍어야 한다. 모든 회복을 마무리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최종 점검을 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 안에 말씀으로 채워짐이 있는가다.

내용없는 껍데기에 속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껍데기에 도취되어 알맹이를 간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성장을 교회의 건물과 사람 수와 재정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교회와 그 성도의 영혼을 채워줄 말씀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성벽이 있고, 성도도 있고, 재정도 있고 좋은 프로그램과 영상 장비도 갖추었는데, 말씀은 비어있는 교회. 껍데기에 성도도 목사도 모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역사도 있고, 치유도 있고, 기적도 있고, 선교와 지역사회 봉사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먹을 것 없는 잔치집처럼, 요란하기만 하고 성도는 모두 굶주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나는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먹고 내가 말씀을 익혀야 한다.

잊으면 안된다. 잊으면 안된다.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

 

2. 말씀을 채우는 일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시작된 일이다.

말씀을 잘 가르치고 먹이는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말씀을 달라고, 우리는 말씀에 갈증이 있다고 요청하고 구해야 하는 사람은 백성들인것처럼 우리 성도여야 한다.

참된 성도는 교회의 시설과 크기와 프로그램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을 때에라도 우리에게 말씀을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이 성도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요청이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부터 나올 때, 이것은 제대로 된 회복이다.

성도들은 말씀을 달라고 삐약거리고, 목사는 그 간절한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그들의 입에 넣어주는 교회. 그래서 성도도 말씀을 강건해지고 목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할 수 있는 교회.

전도든, 선교든, 지역 봉사든, 제자훈련이든.... 모든 것은 그 후에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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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4:7-14

4장 전체를 다 다룬 것이지만, 죠이 여름수양회의 주제를  따와서 만든 제목이고 설교의 컨셉도 그렇게 잡았습니다.

여름 행사를 앞둔 우리 청년들에게 우리 비상 모드로 바꿉시다라고 제안한 말씀입니다. (용량은 에버노트로 녹음했더니 약 3메가 이내. 시간은 30분 이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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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지나고 새롭게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주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공간적으로 교회는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 일어나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까지 달고 그 이후의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뿐 아니라 일을 이루고 나서 그 성취한 일을 잘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까지...느헤미야는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암튼, 느헤미야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 주제로 문단나누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

1. 성벽을 재건하고 느헤미야가 한 후속 작업

  1) 성벽을 건축하고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을 세웠다.

  2) 동생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이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다.

   :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3)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한 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지키는 지침을 줌

   : 높이 해가 뜨기 전에는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꾼이 있을 때 문을 닫고 빗장을 지름.

   : 주민들이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라.

   : 왜? 성읍은 광대하고 주민들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다시 한 번 옛 귀환자의 명부를 확인하다.

  1)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들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했다.

  2) 그 때 느헤미야는 첫 귀환자(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자)들의 계보를 살펴본다.

  3) 6-69절까지 이전 기록에 적힌 명부를 다시 기록한다.(에스라2장에 언급된 것과 거의일치)

   : 그 중에 그들의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에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61-65절)

3. 성벽 재건을 위한 헌금과 헌물

  1) 어떤 족장은 성벽 재건을 위해 보조하였다.

  2) 총독은 금 1000 드라크마와 대접 50개와 제사장의 의복 530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다.

  3) 어떤 족장들은 금 2만 드라크마와 은 2200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다.

  4) 나머지 백성은 금 2만 드라크마와 은 2000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67벌을 드렸다.

4.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한 사람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들,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의 성읍에 거주하였다.

  * 느디님 사람들은 이들은 원래 이방인이었다가 이스라엘에 포로로 끌려온 후 성전의 막일을 부여받은 자들의 명부다. 이스라엘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57절)들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 왕궁의 경비 등에 종사하도록 된 자들의 명부이다. 이들도 느디님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민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호크마 주석 참고)

 

[정리2. 정리 1에서 한 내용을 기초로 해서 나 만의 표현으로 다시 바꾸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특징과 독특함(주로 이런 곳에서 메시지가 나오는데)을 잡아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문짝을 달고 난 후 휴가를 가지 않았다. 그는 그 다음 일을 생각했고, 그 다음 일을 진행했다.

먼저는 성을 다스릴 사람을 세운다. 충성스럽고 신앙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을 세워, 그들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구체적으로 성문을 언제 열고 언제 닫아야 하는 지침까지 주었다. 그리고 아직 성읍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일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집 앞을 책임지고 지키도록 했다. 성전을 위해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다시 한번 귀환한 백성들의 명부를 확인했다. 스룹바벨 때에 돌아온 명부를 기초로 해서 예루살렘 성에 있는 사람들의 혈통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는 온전한 혈통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유다의 귀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제사장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계보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제사장의 일에서 제외시켰다.(64절)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성전을 활성화 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보조하고 헌물해준 지도자들이 있었다. 총독과 족장들이 앞장섰다. 그리고 백성들도 힘을 모아 헌금하는 일에 힘썼다. 그런데 백성들이 모은 것과 비슷한 것을 족장들 중에서 낼 정도의 재력이 있는 자도 있었던 것 같다.

귀환한 사람들 중에 옛 이방인들의 명부도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포로로잡혀와 성전과 궁궐에서 막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이들고 귀환한 백성가운데 있으며 그들도 귀환 공동체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다시 생각해 본다.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까지의 리더십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성벽 재건 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성을 다시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성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까지 챙겼던 사람이 느헤미야다.

  많은 리더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도취되기 쉽고, 그 영광에 스스로 만족하며 그 일을 끝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참된 리더는 세운 역사가 유지되고 확대되기 위한 초안까지 마련해 놓는다. 그런 측면에서 조직이 필요하고 계보의 정리가 필요하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잘 지킬 총독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세웠다.(아마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을 평가해 왔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살펴봤던 것 같다.) 또한 귀환한 백성들의 혈통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은 장기적인 오염을 막는 기초가 되는 작업이었다. 지금은 느헤미야의 지도력 안에서 다 통제가 되지만, 느헤미야가 없으면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느헤미야는 그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2. 귀환자의 명단에 옛 이방인들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57절)과 느디님 사람들(46절)은 모두 이방인으로 옛날 이스라엘의 전쟁 포로로 잡혀와 성전과 궁궐에서 막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도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고, 어쩌면 그곳에서 예루살렘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조차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소식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강제로 유대 사회로 유입된 자들이며 억지로 유대인화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대인이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공동체에 함께 하기를 원했고,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원했으며 함께 목숨을 걸고 피땀을 흘리며 성벽 재건에 힘썼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들을 그들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 귀환한 백성들 속에는 순수혈통 유대인들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후천적인 백성들이 있었으며, 그 기업을 얻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함께 유업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깨알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유입되었다는 것, 또한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닌가? 왜 기록하셨겠는가? 너희도 이 자리로 들어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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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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