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시편 40편]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수 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지요.(12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롬 1:19)가 자신 위에 임한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할 유일한 분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12절)이것이 바로 다른 한가지입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에게 손을 뻣어야 하지만, 손을 뻣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그를 응시하여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바라볼 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에는 당당함이나 자기 공로나 자기 의가 털끝만큼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정리/발췌]


2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을 끌어올려서 안전한 발판 위에 놓아준 모습이 연상된다. 하나님은 허우적 거리며 절망한 사람을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반석과 같은 안전한 곳에 두사 우리로 평온케 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험한 이 세상을 살면서(많은 원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겠는가!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 주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그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나를 생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극정성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일을 다 말하고 싶지만, 셀 수 없는 이야기에 오히려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은혜와 도우심으로 누군가 나를 살펴주신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행복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누리라!


12절.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나는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 수많은 재앙이 덮쳐서 하나님을 불러야 할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찾기에는 나의 죄가 너무 많아 면목이 없다. 오직 도움을 주실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는데 그 분에게 행한 나의 죄가 크기에 감히 그 앞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도움은 커녕 심한 책망 밖에는 받을게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 분에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격이 되지 않고, 송구함이 크지만 그 분의 신실하신 의를 의존해서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지했던 사람들은 실패함이 없이(부끄러움이 없이) 응답을 받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당당하다는 말도 아니고, 뻔뻔 하다는 말도 아니다. 송구하지만, 다른 구할 곳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러 나온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교만과 방종이 존재할 수 있는 틈이 없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절)


17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 편임을 기정 사실화 하고, 빨리 개입해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당당함이 아니라, 관계적인 경험 속에서와 신학적인 확신 속에서 나오는 당당함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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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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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순전한 기독교_4-9 대가를 계산하기]


1. 너희도 온전하라

  -> 네가 온전해지지 않으면 도와 주지 않겠다?(틀림)

  -> 내가 유일하게 도울 일은 너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그 이하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하에 만족하지 않겠다.(바름)


2. 우리는 통증만 제거해 주길 원하지만, 치과의사는 문제 있을 다른 치아까지 손보길 원하신다. 

일단 그분을 끌어들인 이상, 완전하게 치료받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계산하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다. 

   : 우리가 첫 걸음을 뗄 때,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만족할 아버지도 없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작고 낡은 오두막집을 수리해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작은 오두막집을 부수고 궁전을 지으시길 원하신다. 

성경은 우리를 '신'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요 10:34)



[32 순전한 기독교_4-10 호감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질문1. 기독교가 진리라면 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인가?


 1. 맞는 측면: 체온계의 눈금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한 아무리 환자의 기분이 좋아졌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2. 틀린 측면: 그리스도인 A와 비그리스도인 B를 비교해 볼 때, A보다 B가 더 호감이 간다고 할 경우

  1) A가 처음부터 환경적으로 불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B는 더 나았을 수 있다. 이것은 환경을 바꾸어 보면 서로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2) B가 A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은 조금의 차이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같은 것이다. 게가다 B가 호감 주는 성품을 가진것은 하나님이 B에게 주신 선물이지, B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3) 호감주는 성품이 자기 자신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한, 그 성품은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다. 자기의 것으로 붙잡는 한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다.(많은 경우 호감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찾는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4)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라에게야 쓸데 있다.


[적용]

  1) 호감을 주는 유형이라면, 조심하라!

      여러분이 받는 좋은 것들이 여러분을 더 쉽게 부패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2) 여러분이 가난한 피조물이라면, 절망하지 마십시오.

 고장한 기계를 가지고라도 열심히 돌려 보려고 힘쓰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새 기계로 만들어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 고된 학업을 받는 과정에서 새 기계 돌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정리1. 호감을 주는 성품은 좋은 것이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호감을 가진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리2. 개선이 곧 구속은 아니다.(주님은 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경고: 괜히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한 명을 희생삼아, 그리스도과 그리스도인을 무시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변명할 생각마라)


[33 순전한 기독교_4-11 새 사람]


1. 새 사람은 개선이 아니라 변형이다.(말을 더 높이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날개하는 것이다.)


2. 루이스는 변형이라는 기독교적 개념을 '진화'와 연결하여 설명한다.(진화라는 개념으로 비유하여 설명)

  1) 거대한 몸집과 단단한 껍질로 무장한 동물의 등장 -> 더 단단한 껍질과 힘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생각함.

  2)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 물리적 힘이 아닌 '두뇌'를 쓰는 힘으로의 진화.

  3) 진화라는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기대대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일대 전환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 

  4)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다음 단계를 더 두뇌가 커지고,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참다운 변형이 아니다. 약간의 개선이다. 그러나 인간은 변형될 것이고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3. 기독교에서 말하는 관점은 '다음 단계가 이미 나타났다는 것'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변화다. 


4. 진화는 과거를 연구하다가 나온 결과이지만, 새 단계는 자연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1) 새 단계는 성적 재생산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2) 진화는 그들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새 단계, 즉 피조물이 아들로 바뀌는 이 단계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우리가 고집을 피우며 새 인류의 출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다.)

  (3) 그리스도는 새 사람의 '최초 사례'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한 종의 표본, 즉 한 새 사람이 아니라 그 새 사람(그로부터 그 종이 퍼져나가는)이다. 그는 모든 새 사람의 기원이며 중심이자 생명이다. 

  (4) 새 단계의 진행 속도는 이전 단계들의 속도에 비하면 번개처럼 급속히 퍼졌다고 할만하다. 우주 역사에 비하면 2천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초대교회다. 

  (5) 우리는 자궁 안에서 출산의 날을 선택하는 아이와 같다.(실제로는 출산되어지는 것이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의 자궁 안이 가장 안전하게 보이겠지만, 나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5.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그들은 여러분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지만, 그 누구보다 덜 필요로 한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모두 똑같아 지는 것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소금의 맛이 같지만 음식마다(재료마다) 소금의 맛을 내면서도 자신의 재료 맛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예1) 자연 상태 그대로의 나는 내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큼 주체적인 개인이 못 된다.(본인은 주체적인 정치적 이상으로 여기는 것 역시 사실은 정치적 선전에 놀아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2)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이다.(자기를 의식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 스럽지 못하게 된다.)


[도전]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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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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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기독교가 진리라면 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인가?


맞는 측면: 체온계의 눈금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한 아무리 환자의 기분이 좋아졌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틀린 측면: 그리스도인 에이와 비그리스도인 비가 비교해 볼 때, 에이보다 비가 더 호감이 간다고 할 경우

  1) 에이가 처음부터 환경적으로 불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는 더 나았을 수 있다. 이것은 환경을 바꾸어 보면 서로 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2) 비가 에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은 조금의 차이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같은 것이다. 게가다 비가 호감 주는 성품을 가진것ㅇㄴ 하나님이 비에게 주신 선물이지, 비가 하나님게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3) 호감주는 성품이 자기 자신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한, 그 성품은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다. 자기의 것으로 붙잡는 한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다.(많은 경우 호감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찾는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4)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라에게야 쓸데 있다.


적용

  1) 호감을 주는 유형이라면, 조심하라!

      여러분이 받는 좋은 것들이 여러분을 더 쉽게 부패하게 만들것이기 때문이다. 


  2) 여러분이 가난한 피조물이라면, 절망하지 마십시오.

 고장한 기계를 가지고라도 열심히 돌려 보려고 힘쓰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새 기계로 만들어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 고된 학업을 받는 과정에서 새 기계 돌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호감을 주는 성품은 좋은 것이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호감을 가진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선이 곧 구속은 아니다.(주님은 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괜히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한 명을 희생삼아, 그리스도과 그리스도인을 무시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변명할 생각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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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온전하라

  -> 네가 온전해지지 않으면 도와 주지 않겠다?(틀림)

  -> 내가 유일하게 도울 일은 너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그 이하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하에 만족하지 않겠다.(바름)


우리는 통증만 제거해 주길 원하지만, 치과의사는 문제있을 다른 치아까지 손보길 원하신다. 

일단 그분을 끌어들인 이상, 완전하게 치료받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계산하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다. 


우리가 첫 걸음을 뗄때,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만족할 아버지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 한 두가지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해결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을 겸손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기대는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가 크고 높다. 결코 중간에 만족하실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작고 낡은 오두막집을 수리해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작은 오두막집을 부수고 궁전을 지으시길 원하신다. 

성경은 우리를 '신'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요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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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1) 


1.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믿음의 두가지 의미

  1) 단순한 신념(Belief): 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루이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충격을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충분하면 믿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충분한 증거에도 믿지 못한다면 명석하지 못다하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한데도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가 되어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상상이 반대편이 되어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하는 이쁜 아가씨에게 속지 말아야지.... 사람은 물에 뜨니까 수영 선생님의 손을 놔도 괜찬지...


기독교가 충분히 믿음만한 증거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거나, 이런 저런 공격을 받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충분한 증거에 의해 생긴 믿음이 흔들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기분은 이성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이다. 따라서 믿음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분명한 논증을 거쳐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1) 선을 행하기 위해 한 주간이 아니라 6주간 정도를 살아보도록 하자.(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에게 실망할테니...)

   (2)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 누워서는 바람의 세기를 알수 없다. 바람을 거슬러 본사람만이 바람의 세기를 안다. 따라서 정작 악한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왜? 늘 악게 굴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악과 진짜 싸워보기 전에는 악의 힘을 알 수 없다. 

   (3) 이 상황이 되었을 때(하나님은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 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사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 아빠, 아빠 선물사게 6펜스만 주세요.


믿음(2) 


두번째 믿음은,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지킬려고 힘껏 노력해 본 다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까지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 믿음이 두번째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조건을 제기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다 틀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덕적인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항복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선행을 강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의 역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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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만의 덕목 3가지: 믿음, 소망, 사랑.


1. 사랑을 다루려고 한다. 사랑은 앞에서 용서라는 주제로 부분적으로 다루었다. 


2. 사랑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선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랑이 자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 

  1) 자선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2) 기독교적인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의지의 상태로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3.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꼭 호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좋아 한다는 것은 호감이 있다는 것인데, 좋아한다는 것은 선과 악의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4. 물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데 도움이 된다. 


5. 비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는 몇 몇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쓴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6. 선과 악은 복리로 증가한다. 


7. 루이스는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고 제안한다. 가만히 앉아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라. 


8. 사랑한다는 것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기독교적 사랑은 의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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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이 악은 누구에게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누구에게라도 그와 같은 악이 나타나면 한치의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악이란 바로 교만(Pride)과 자만(Self-Conceit)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적인 덕목은 <겸손>이다.


1. 겸손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중심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은 교만이라는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교만한 행동들

  1)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 교만이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간다. 

  2) 어떤 물건이 충분하지 못할 때: 탐욕이 경쟁으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3) 돈에 대한 탐욕과 교만은 차이가 난다. 탐욕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 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되면 더 많이 쓰기 위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는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것의 극대화가 권력욕이다. 권력은 교만한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없다. 

  4) 예쁜 여자가 가는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니다. 교만이다. 

  5) 교만은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교만의 특성이다. 


3. 교만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리고 상호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4. 교만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1) 이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특히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5. 인간의 다른 죄는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래서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종 교만이 선한 일에 효과적인것 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자신의 체면과 수준 혹은 품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때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상을 치료하는 정도일 뿐, 실은 더 큰 병, 암을 유발하는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6. 이야기를 마치기 전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주는게 좋을 듯 하다. 

  1)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즐거워하고 좋아 하니까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그런 칭찬을 받고 상태를 즐겁게 해주다니 나는 대단해! 로 가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으로 빠지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2) 허영심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만에 비한 그래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허영심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을 얕본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3)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교만인가요? 루이스는 만약 그 의미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의미라면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야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완전한 영적 파멸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교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만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만의 상대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5)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것에서 부터 겸손이 시작된다. 


[결론]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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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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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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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te.com/view/20130218n00351?mid=n0411

영성 2.0 ④ 김용택 목사
신앙, 자녀교육, 살림 모두 함께
초기기독교 공동체 6년째 실험
기성 교회·가정 반성에서 출발
최소한의 자급자족, 할 수 있어요

경기도 연천에서 신앙공동체 실험을 하는 김용택 목사 가족.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 목사, 성은군, 성찬(아들)씨, 아내 김지숙씨, 성경(딸)씨. 사회적 기업 해피 트리도 운영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교회는 원래 신앙공동체였다. 함께 생활하고 나눠 쓰며 하나님을 섬기는 모임이었다. 예수 제자들의 복음을 전파한 기록인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모습이다. 당시 교회는 요즘처럼 예배당 건물이나 교회 세습에 연연하지 않았다.

 감리교 김용택(53) 목사는 그런 초기 교회의 실현을 꿈꾸는 목회자다. 2008년부터 ‘주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뜻 맞는 이들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자녀 교육, 신앙 생활을 함께한다. 살림살이도 합쳤다. 함께 벌어 똑같이 쓴다.

 교회 건물, 물론 없다. 공동체 식구들이 식사를 함께하는 공간이 주일이면 예배 장소가 된다. 현재 구성원은 김 목사 가족 7명을 포함해 8가족 30명. 휴전선과 한탄강 유원지가 지척에 있는 경기도 연천군 초성리가 근거지다. 20∼30평대 저층 아파트 5채에 나뉘어 산다.

 지난 8일 공동체를 찾았다. 제도권 교회와 학교, 일자리 등을 등지고 ‘극단적인’ 공동체 실험을 하게 된 이유와 의미가 궁금했다.

 김 목사는 ‘해피 트리’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 나와 기자를 맞았다. 2011년 가을 세운 사회적 기업이다. 새터민(탈북 정착민)을 고용해 우리밀 빵을 만드는 해피 베이커리, 동네 도서관과 재활용 의류매장을 겸한 카페 행복한 나무, 지역특산물인 자색 고구마 등을 재배하는 해피 팜 농장 등을 거느리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공동체 식구들의 한 달 월급은 모두 600만원. 김 목사는 “그게 공동체 수입의 전부”라고 했다. 모기 눈물만한 돈으로 대식구가 먹고 살 수 있는 비결은 큰 교육비가 들지 않기 때문. 아이들은 학교·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 어른들이 과목별로 돌아가며 가르쳐 검정고시를 치르게 한다. 그런데도 김 목사는 2011년 큰딸 민애(24)와 둘째 딸 신애(21)를 캐나다 토론토의 세나카 칼리지에 나란히 입학시켰다.

 농장 덕분에 먹거리도 웬만큼 해결된다. 어른은 한달 13만원, 청소년은 6만원씩 용돈을 준다. 이에 비하면 도시의 우리들은 너무 많이 먹고 쓰는 것은 아닐까.

 김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것을 잘 모아 나눠 쓰면 최소한의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공동체는 기성 교회와 가정,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김 목사는 감리교신학대 운동권이었다. 목사 안수 이후 경남 마산에서 도시빈민 등을 상대로, 소위 민중사목을 했다. 하지만 나날이 거칠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 서울의 번듯한 교회에서 한 10년간 교회 성장을 위해 뛰었다. 그러나 교회 바깥의 시대와 역사에서 동떨어졌다는 회의가 들었다. 아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 교육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채 이중적 생활을 하는 ‘선데이 크리스천’ 신자들도 목사로서 보기에 안타까웠다.

 김 목사는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살아온 배경이나 성격,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이라는 파이의 크기는 어떤 사람과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게 공동체다. 그는 “신앙을 새로운 형식 안에 담아내라는 시대의 명령 앞에서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 그릇, 새로운 가치를 찾아 순례하는 신앙적 보헤미안들의 기착지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젊어서부터 영성운동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그에게 영성운동은 신앙이 깃드는 처소인 영혼, 그걸 살펴 바른 신앙의 길로 향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공동체는 그 밑바탕인 셈이다.

 그의 실험은 여태까지는 성공적인 것 같다. 원년 멤버 정연훈(43)씨에게 만족스러운지를 물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인천에서 아내와 함께 사설 공부방을 운영하다 공동체에 발을 들였다. 다음은 그의 대답이다.

 “사람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함께 못 살 정도는 아니다. 누가 물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우선 기도를 드리고 상대방 의사를 존중하며 해결책을 찾아 나간다.”

연천=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신준봉.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박종근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jokepar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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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도덕, 즉 그리스도인의 '순결'(chastity)이라는 덕목에 대해서


1.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결'과 사회적 규범인 '정숙함'(modesty)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1) 정숙함은 예의 범절 중 하나인데, 이 규범은 주어진 사회 집단의 관습에 따라 생긴다. 

     예) 노출 정도, 대화의 주제 허용 범위 등 따라서 시대마다 바뀜

  2) 그러나 순결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 태평양 제도의 소녀나 옷을 칭칭 감고 살았던 빌토리아 시대의 숙녀나 다른 의상을 입었음에도 동일하게 정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순결'에 대한 기준은 서로 있어왔다. 

  * 욕정을 일으키려고 예의범절을 깨뜨리는 것은 순결을 범하는 것이지만, 무지와 부주의로 깨뜨리는 사람은 그저 예의없는 것에 불과하다.  


2. 순결은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덕목이다. 


  1) 성욕은 식욕하고 다르다. 식욕은 종종 식욕의 본능을 넘어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욕은 다르다. 사람의 성적인 욕망을 모두 허용한다면 엄청난 사회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다. 


    (1) 스트립쇼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 만약 먹는 음식을 보여주는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구경을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볼 것이다. 물론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오늘날 이시대가 과거 빅토리아 시대(스트립쇼 공연이 없던 시대)보다 성적인 소비가 적은 시대일까요? 더 풍요로운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적인 욕구에 있어서 만큼은 끊임없는 욕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 성적인 욕구는 음식에 대한 욕구와 다르다. 음식 아닌 것을 먹거나 음식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적인 욕구는 그런 방식으로 점점 극대화된다. 사람들은 억제된 성욕이 변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성욕을 억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지난 20년간 성에 대한 쉼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욕은 건강해 졌는가?  오히려 그렇지 않다. 더욱 큰 골치거리가 되었다. 성에 대해서 쉬쉬해서 골치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성이 이런 골치거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가 쉬쉬했던 것이다. 


3.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1) 인류가 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번식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란 의미

    :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한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위의 말을 지지한다. 


  2) <현재 성적 본능이 도달한 상태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1) 음식을 즐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절반이 음식을 삶의 주된 관심사로 삼고 음식 그림을 보면서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느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부끄러운 성욕이 된 것에 대한 책임

  1)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뒤틀려 있는 기관 때문에

  2) 우리의 순결하지 않은 삶을 옹호하는 선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는 자란다. 

  3) 돈을 긁어 낼 목적으로 우리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사람들이 많다.(성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매 저항력이 약하다.)


  * 하나님은 이런 상황, 이런 시대를 감안해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치료를 받을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럴 마음조차 없는 것같다. 그것이 문제다.


   (1) 우리의 뒤틀린 본성과 마귀의 유혹 그리고 현대의 온갖 선전들이 합세하여 <우리가 억누르는 욕망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하며 지극히 온당한 것이므로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거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태도>라는 거짓 의식을 가르친다. 

    : 욕망을 분출해서 행복해지는 경우는 없다.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가 필요한 법이다. 강하게 발동되는 욕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유는 다르지만, 본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이는 위생학적의미로, 어떤 이는 사회학적인 의미로) 기독교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이 다른 것보다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원칙중에 하나인 것이다. 


   (2) 많은 이들이 기독교적인 순결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음.

      :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할려고 하고, 해 내는 것은 멋진 일이다. 온전히 하지 못했다면 용서를 구하면서 거듭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과정이 그 덕목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습관을 훈련시켜 줍니다. 


   (3)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을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한 '억압된'이란는 용어는 '거부하다', '참다'라는 뜻의 억제된(suppressed)과 구별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성적 욕망은 성적 욕망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에 잠재의식 속에 파고들어 왔다가(대게는 아주 어렸을 때) 알아 볼 수 없는 형태로 위장해서 현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성인이나 청소년들이 의식되는 욕망을 거부하려는 노력은 과거의 억압 때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다. 


5. 성도덕이 기독교 도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하지 않는 것을 최악의 악으로 여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육체의 죄는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쾌락 중에가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이다. 영적인 쾌락이란.


  (1) 잘못을 남에게 미루고 즐거워하는 것

  (2) 남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선심 쓰는 척하면서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3) 험담을 즐기는 것

  (4) 권력을 즐기는 것

  (5)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 말로 악한 죄다. 


내 안에 있는 동물적 자아가 짓는 죄보다 악마적 자아가 짓는 죄가 더욱 악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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