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목사님~

마음속의 의문이 있습니다.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불의에 대해 단호하고, 이웃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있으며, 자신의 부나 이익을 챙기는 것에 가지는 관심보다 내 것을 내 놓아 더 많은 공동체 구성원이 혜택을 받기를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보기엔  철학과 유학을 깊게 공부하고, 사회과학에 젊은 날 심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정의 추구나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이로움을 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분깃이 없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해야 알곡이 될 수 있는 건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에게도 상급을 주실까요?


<답변>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훌륭한 분들이시죠. 이런 분들을 보면 저희들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요. 이런 분들의 구원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분들의 희생적이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시는 삶 때문에 우리도 혜택을 입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에 따른 존경을 받아야 할 분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을듯 합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볼 때, 특히 구원에 대한 입장에서보자면 하나님의 입장은 분명한듯 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와 삶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근거한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인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자리는 없을듯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인간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하나님은 기뻐 환영할 것입니다.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면 하늘에서의 상은 없을지라도 이 땅에서의 상을 받으리시라 생각합니다. 주변으로부터의 존경일 수도 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으로 혜택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인한 만족일수도 있고요. 사람의 나라에서 수고한 것은 사람들에게 상을 얻는 것으로(정도의 차이는 있고, 시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갚아주시기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해보기는 했습니다만 많은 책들을 살피면서 드리는 답변이 아니라 많이 미흡합니다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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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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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절.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절.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절.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다. 그리고 무리 가운데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댓는지 물으신다. 이유를 모르는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상황에서 누가 손을 댓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한다. 

2.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셨고,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서 몸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던 혈루병 걸렸던 여인은 자신이 에수님의 허락도 없이 몰래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 모든 사실을 예수님 앞에 실토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인이 병에서 놓여  건강할 것임을 주님의 입을 통해서 확인받게 되었다. 

3. 그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음을 알린다. 딸이 죽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더 이상 번거롭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오히려 절망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독려하신다. 예수님은 긴급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신다. 

4.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딸의 죽음으로 인해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비웃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아이의 부모와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딸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자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다.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5. 아이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놀랐다.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야기가 마친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왜 급한 상황 속에서 굳이 멈추어 혈루증 걸린 여인의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을까? 

  1) 단순히 혈류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되었다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다. 

  2) 그 이후 예수님의 행동,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혈루병 걸린 여인이 회복되었고 단순히 혈루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과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리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세상의 모든 의사들은 날 고치지 못했지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예수님은 기꺼이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옷 자락만 손을 댄다는 측면에서 작은 믿음이라고 할 수 도 있고, 세상 의술은 실패했기 때문에 유일한 소망이라는 측면에서 절박함으로 예수님을 의지했다는 측면에서는 큰 미음이라고 볼 수 있다.)


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한 이야기가 다른 병 치유 사건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1) 회당장 야이로의 딸 사건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예수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전의 치유 사건과 다른다. 

  2)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자 더 이상 예수님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비웃었다. 사람들에게 기적의 한계는 사망 전까지다. 사망 이후에는 누가 오더라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 위독한 순간에는 예수님을 의지했지만, 사망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도 죽음의 영역만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긴급하고 신속하게 그 소녀를 살려내셨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극복해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 구체적인 첫 사건이다. 


[묵상하기]

1.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찾아가 물어보시고 낫게 해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무심히 지나가시는 상황(적극적으로 미리 찾아와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자가 에수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분의 옷 자락에 손을 대면 낫겠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와도 그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문제를 가진 인생이 먼저 적극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 오는 것을 통해서 구원이 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그 믿음대로 병이 낫게 하셨고 구원을 말씀하셨다. 

2. 사망은 인류가 가지는 한계일 뿐, 하나님의 한계는 아니다. 하나님의 한계가 있을 수 없듯이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다.  인생이 먼저 한계를 긋고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 조차도 자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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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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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서와 같은 설화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룻기서를 시작하는 글 (http://hunmill.tistory.com/1230) 을 참조해주세요. 왜 룻기인지? 설화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성경관찰해석적용샘플] 설화체_룻기09_룻3:1-5

어렵지 않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기초적인 내용 파악(문자적 이해)을 중심으로 훈련하는 차원

[본문] 

본문 

관찰(1차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

[본문: 룻 3:1-5]

본문 구절은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모든 구절을 반복해서 넣을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다만, 본문을 읽고 본인이 스스로 본문 내용을 요약하는 훈련을 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과 글로 요약할 수 있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


오늘 본문은 추수가 마치고 타작할 때가 되었을 때, 나오미가 룻에게 특별한 지시는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목욕하고 의복을 잘 차려입고 보아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다가 저녁이 되어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우면 조용히 그 발 밑 이불에 누으라고 지침을 준다. 

그 이후에 일이 어떻게 될지 나오미도 알수없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을 보아스가 말할 것이라 한다.(보아스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획을 세운듯 하다)


[문장요약]

1. 나오미는 타작할 때가 되었을 때, 이제 룻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1절)


2. 나오미는 룻에게 지침을 준다. 

  1)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2) 너는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장 마당에 내려가지만 보아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하라.

  3) 저녁이 되어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울때 그 누운 곳을 알았다가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3. 그 이후의 일은 나오미의 전략 밖의 것이다. 보아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운명은 달라진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해줄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사사 시대라는 시대적 수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 룻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로 들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보아스의 은혜를 입고자 하는 룻의 전략은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 백성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죄송하지만 그것 밖에는 살 방법이 없기에)

  1) 인간적인 치밀함이 돋보임

  2) 창 38장. 유다를 통해 기업을 이어가려고 하는 유다의 모습을 보게 됨 

  ->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간절함에 반응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3. 룻의 순종: 룻의 무력(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인생)

  1) 보아스가 룻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 알 수 없는데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됨

  2)  나오미의 권유, 보아스의 은혜에 대한 막연한 기대(다른 방법은 없기에)

 -> 나오미는 마지막 남은 자기 권리의 입장에서 전략을 세우고, 룻은 마지막 남은 소망(인생을 구원해 줄)으로서 순종하여 나아갔다. 


[적용]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서 바른 고민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적절하다. 

1. 나오미의 전략은 어떤 면에서 긍정될 수 있는가? 나오미와 같은 신앙이란 무엇인가? 

   - 성도로서 언약관계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율법(자신은 율법을 어겼지만, 필요시에 율법을 근거로 행동함)

   - 우리가 얻은 구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인생의 바닥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줄을 잡는다. 첫 시작은 순전히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 구원의 자리에 들어선다. 

   -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나오미의 이런 요구에 대해서도, 언약 가운데 약속하신 일들을 이루어 주신다. 


2. 룻의 입장에서 순종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나오미는 언약적 법을 의지했지만, 룻은 그저 보아스에 대한 기대(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나아갔다.

  - 놀라운 곳은 보아스가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룻과 나오미는 실패했을 것이다. (후에 아무개라는 사람은 기업 무를 책임이 더 큰 사람이지만 책임지려하지 않았다)

   -  순종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순종할만한 의지할만한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것이 더 중요하다. 룻은 베들레헴으로 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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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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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1.25)_영상만 되고 음성은 안되네요 ㅠㅠ



제목: 빛이 어둠에 비추다III

본문: 요 1:1-13


 *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했을 때, 그 죄가 어떤 성격을 가진가진 죄인지에 대해서 설교함.



[녹음이 안되어 있으니, 설교 원고를 올립니다.]


본문: 요 1:1-13

제목: 빛이 ‘어두움’에 비추다III


I. 들어가는 말

 1. 지난 시간: 우리의 상태가 ‘어두움’이라고 말씀드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내는 존재라는 말씀을 드림. 

 2. 이 어두움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더 깊은 어두움을 향한 경향성을 가지는 것.(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오염’이라고 함)

 3. 성경이 이 세상과 우리 각 사람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측면을 포함햐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적용]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사람이 모든 면에서, 영원히 완전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는 언제든지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성교제: 밀폐된 공간으로 따로 가는 것을 경계

  - 재정관리: 지출을 결의하는 사람과 지출하는 사람이 구분/ 또한 정기적인 제 3자의 감사가 필요.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빨리 발견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 

  -> 이런 제도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죄성에 대한 인식을 경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서 서로간의 불필요한 의심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II. 본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죄의 성격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죄도 크게 둘로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이해될만한 죄가 있을 수 있고,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둑질과 같은 경우. 명백히 죄다.

   (1) 생계형 범죄(실직, 초범, 우발적, 생계문제 때문에...)

   (2) 상습적, 향락을 위한 비용만련(술, 도박, 여자...)

  -> 같은 도둑질이지만 죄의 형량도 다르고, 죄에 대한 감정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살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 우발적 살인, 정당방위로서의 살인이 있다.(이해, 용납..)

   (2) 그러나 용납되지 않는 살인이 있다.


   예) 2015.1.13. 안산에서 발생한 인질극, 살인사건의 경우

   - 아내를 의심해서 전 남편을 죽이고, 의붓 딸도 성폭행 후 살해 /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


  [정리]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인간의 죄란 바로 후자와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고 까다로우셔서 그 분의 까다로움의 기준 때문에 우리가 죄인으로 정죄단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기준을 제시하는 분의 엄격함과 까다로움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그래서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고 억울해 한다. 하나님이 그런것까지 이해를 못해주시고.. 나만 그런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언제나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우리들에게 ‘고발’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누가 잘못한 것인지, 한 번 논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마치 배심원 재판을 하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1. 사 1:2-4 하나님의 울분과 분노의 근거(부모 자식의 비유)

  1) 이스라엘은 부모를 거슬르는 자식이다. 

  2) 이스라엘은 짐승만도 못한 자식이다. 

  3) 이스라엘은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그 시작 자체가 일방적인 은혜 관계로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늙으면 자식이 부모를 공양해야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부모도 그것을 담보로 해서 자녀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시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느끼듯이 그와같은 부모의 희생을 통해서 자라난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것은 패륜아, 불효자라고 불리우고 사회적으로 인간이라 여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습니다.(낳으신 것입니다) 조건없이 낳으셨고, 길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냉담할 정도가 아니라 부모를 없신여기고 배신합니다. 

   - 그렇게 낳고 길렀던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가버린 것입니다. 왜요? 그가 더 좋은 것을 준다고 말입니다. 


  [적용] 그러니 내가 이스라엘에게 화내고 분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하나님이 오히려 유다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잘못이 아닙니다. 실수나 충동, 한 때의 반항이 아닙니다. 


 2. 호 2:2-5, 8절. (부부의 비유)

  1) 부정한 여인을 데려다가 아내를 맞으라

  2) 부정한 자식을 낳으라.(누구의 자식인지 알수 없는)

  3) 당당하다 못해 무지한 태도에 어이없음

  4) 남편을 버리고 떠남

  : 부부관계라는 언약관계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언약의 당사자들이 공정한가? 그렇지 않다.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운 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인 이스라엘은 ‘배은망덕’으로 행동함을 성경은 말한다. 


  [적용] 부부의 도의를 깨뜨린 것이다. 누가 들어도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하나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대가를 바라거나, 거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은혜를 베푼 관계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3. 마 21:33-41 (사업의 관계)

  1) 주인: 포도농장, 울타리, 망대, 포도즙짜는 틀 / 임대

  2) 때가 되어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냄(3명)

  3) 더 많은 종을 보냄

  4) 아들을 보내면 어쩌지 못하겠지...

    : 아들을 보자 오히려 이를 죽이고 이 땅을 차지하자./죽임

   : 이 포도원 농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주어야 한다.(누가 읽어도 공감함) 이렇듯 성경은 우리 인간의 죄가 바로 이와같은 죄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지적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죄인 것입니다. 이해되거나 용납될 수 있는 그런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행한 당사자가 들어도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을 행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지 않을 수 있고, 정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4. 그런데 정말 더 심각한 상황은 본인이 그와 같은 ‘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두운 우리의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 따라서 절대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너무 큰 죄를 향하고 있는데, 본인이 그런 상황을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할 때... 개선의 여지가 없음)


따라서 이 상태로 그대로 간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 종합건짐검사: 위암 초기라는 결과가 나옴

   - 암이 모든 경우 사망에 이르지는 않지만, 비유로 말하자면

   (1) 그 결과를 모르면: 모른 채로 진행되어 결국은 사망

   (2) 그 결과를 알지만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


 위암 초기야 별로 자각 증상이 없을테니 일반적인 생활에 문제가 없어서 평소처럼 문제의식없이 먹고, 마시고 살아간다면..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깊은 죄’가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별반 이상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조취도 취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 모른다고 해서,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5. 복음이 바로 여기에 개입되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위태로운 운명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CT촬영을 통해서든 초음파를 통해서든 MRI를 통해서든 정확한 실체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당신의 실제 상황입니다. 위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적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 

  - 요 1:10-11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각 증상은 아직없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실체적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알아 그 문제를 지적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오히려 복된 삶의 길로 인도되게 된다는 것.

  - 요 1:12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를 주셨으니.

 

III. 결론


1. 다윗이 어떻게 빛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 

   삼하 12:1-6. 나단이 지적하기 전까지 죄를 알지 못한 다윗

  1) 나단이 한 사건의 판결을 의뢰함 / 다윗이 분노. 사형선고

  2) 나단: 다윗은 더 나쁜 사람임을 직면시킴


 [정리] 없던 죄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어둠에 가려져있고, 변명과 핑계에 가려져있고, 무지와 무감각 속에 알아채지 못했던 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리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2. 우리가 죄인인 것을 언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는 대상과 똑같은 패턴의 행동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발견되시거든, 급히 그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는 복을 얻으시길 축언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죄를 지적하거나 깨닫게 해 주고 있다면,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을 비추고 있는 줄 알고 그 빛 가운데로 나아오시길 축언합니다. 


 롬 2:1-2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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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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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10.19)


본문: 벧전 1:10-12

제목: 나, 구원의 중심


 * 설교 앞부분이 약간 잘렸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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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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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2. 복음을 듣고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이다.


입장권(티켓)을 가졌다는 것이란, 제한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부터 발부된 ‘입장권’이나 ‘초대장’을 받은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천국의 출입문을 자유롭게 입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티켓을 받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서 옳은 확신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자격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격에 맞는 삶을 살기에 힘쓴다면 천국 행 티켓을 얻었다는 개념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만약, 이제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자격)은 확보했으니, 이후로 나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천국에는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전자의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티켓을 남발함으로서 그 공연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우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개념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다시, 마 22:1-13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비유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보았으시 생략하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금은 길거리에서 모두(악한 자나 선한 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해서 불러모았다. 이들은 새롭게 초대장을 가지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들어와서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자리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고 <예복>을 입지 아니함으로 그 잔치에서 쫓아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롬 13:14, 갈 3:2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예식에 맞는 옷>일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갑작스러운 임금의 초대를 받아 왔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예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이다. 즉 그 공간과 상황에 맞는 질서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은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왔고, 왕이 준비한 풍요를 누리기는 했지만 그 공간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잔치를 원했지만, 질서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임금은 그와 같은 자는 초대되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마침내 선별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입장권만으로는 마지막까지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누릴 수 없음을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들


마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씨’를 ‘천국 말씀’(마 13:19)이라고 하심으로 이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는 씨가 떨어진 4가지 땅의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크게 나누면 둘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는 천국 말씀인 씨가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하는 땅(길 가)과 천국 말씀이 뭔가 효과를 내고 있는 땅으로 구분된다.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한 땅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복음을 들었으나 완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반면 효과를 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라고 해서 그 효과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깊지 못해,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버렸다.(돌 밭) 또 어떤 성도는 잘 자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좋은 땅)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교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교회 밖의 완악한 자도 아니고, 교회 안의 좋은 땅에 속한 자도 아닐 것이다. 마태는 ‘돌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극복함으로 ‘천국 말씀’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서 네가 좋은 밭임을 증명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왕의 잔치에 들어왔느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그 안에서 증명해 낼 때, 그 자리에 머물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념의 확장, 점(點)에서 선(線)으로.


롬 5장에 보면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신 것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받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특징이란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전과 그 이후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의 한 시점에 구원이 왔고 모든 사람은 구원 전과 구원 후라는 두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티켓’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티켓이 있어야 한다. 티켓이 있으면 관람할 수 있으나 티켓이 없으면 관람할 수 없다. 티켓은 그 유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구원 개념과 유사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을 티켓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생기게 된 오해도 있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범법자인지 탈세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티켓만 있으면 아무 질문없이 그를 통과시켜 입장시킨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을 티켓으로 얻은 사람이라면(과거의 고백을 통해)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조건과 제약을 달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시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입장했다가도 끝까지 남아있지 못하는 경우 즉 ‘필터링’하는 시간의 과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얻은 구원이 중간에 잃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입장’만으로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몇 몇 본문을 통해서 말했듯이 잔치에 입장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대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단순히 단회적인 의미를 가진 ‘티켓’으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시간을 통과하는 검증 과정을 통해서 알곡임이 더욱 분명해지든지 아니면 가라지로 판명되든지 확인해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 22장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졌다. 그래서 길거리에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선별해 냄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아무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는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허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아무나’라고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장권에서 시민권으로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다시 나가야 한다. 놀이공원이 폐장하게 되면 자유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퇴장해야 한다.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기간이 끝나고, 비자기간이 끝나면 나와야 한다. 왜?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입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에 영원히 살 수 없다. 오직 시민권을 가진 시민만이 그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빌 3:20)


그렇다면 누구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인가? 

입장권에는 어떤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 입장권으로는 보고싶은 것, 놀곳 싶은 것을 즐기다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민권에는 책임이 부여된다. 그것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함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진지한 서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귀화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귀화하고 싶다고 모든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귀화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기준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최소한 귀화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준수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맹세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은 부족하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고 하는 책임있는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책임있는 서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입장권을 가지고 잠시 즐기가 가는 사람, 여권과 비자를 받아 잠시 다녀가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복>은 그 상황과 그 공간에 맞는 질서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사람은 혼인 잔치가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유익과 풍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잔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과 공간 속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질서인 <예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아니라 입장권으로만 들어온 그 사람은 결국 그 잔치의 공간에서 퇴장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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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0과. 우리가 구원과 복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


1.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구원이 그 사람에게 확인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치는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중생)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시간을 거쳐서 확인되어지는(그래서 끝까지 구원에 이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음을 수 있음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 22:1-13 천국 비유


마 22장 1-13절의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2)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임금의 말과 행동을 잘 살핌으로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지는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3)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한 대상들이 종들을 모욕하고 왕을 능멸한 것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래서 원래 청함을 받은 자는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4) 그러자 임금은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혼인잔치는 금세 손님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 우리가 아는 복음은 보통 여기까지다. 유대인들이 거절했기에 원래 초대받지 못한 우리들에게까지 기회가 열렸다. 이방인인 우리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인에게까지 기회가 열린 것, 이 상태가 우리가 알고있는 복음과 일치한다. 

 5)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금은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을 살피고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선별해서 잔치 밖으로 내보낸다. 


임금의 마지막 행동이 성도인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은 혼인잔치(천국)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10절에서 끝나지 않고 11-13절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이 이 내용에까지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이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흔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의 이야기는 의외로 적지 않다. 특히 마태복음에 많은데, 마 7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마 7:21에는 예수님께서 ‘나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구원받은 성도일 것이라는 확신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성도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대단한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마 7:26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신앙이라는 번듯한 집을 지었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집도 제대로 된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재한 사건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시간’을 통한 과정이 필요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고, 그것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


우리가 잘 알 듯 마 13장에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기 위한 여러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마 13:24-30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것과 쌍둥이 비유로 알려진 ‘그물 비유’(마 13:47-50)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으니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펴봄으로서 천국의 특성을 알 수 있다.

 

 1) 그 주인은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2) 그런데 이 주인의 원수가 주인과 종들 몰래 그 밭에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

 3) 그런데 그것을 시간이 한 참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결실할 때가 되어서)

 4) 종들은 주인에게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을까요?하고 주인의 뜻을 물었다. 

 5)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하고 오히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명한다. 그 때가서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기 위해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즉, 천국은 지금 당장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서 심판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말은 심판 날까지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도록 두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천국의 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곡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중에는 가라지도 함께 공존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마치 알곡인양 천국의 밭에서 함께 자란다.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알곡’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 13:47-50에 언급되고 있는 ‘그물 비유’도 마찬가지다. 


 1)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든 그물과 같다.

 2) 우선 그 그물 가득히 물고기를 잡고, 물가로 끌어 낸다.

 3) 그물을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한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잡아 올리지 않는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그물로 잡아 올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잡아 올린다. 즉, 그물(천국) 안에 있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못된 것도 그물에 잡힌다. 그러나 그 못된 것까지 그릇에 담겨져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분류되어 버려진다. 즉,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이 세상에서 끌어올린다. 마치 가라지까지도 천국의 밭에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특정 시간을 거쳐 분별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그 프로세스를 통해서 마지막에 선별된 자만이 최종합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얻은 구원이 확실한가’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만약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롬 8:24)이기에 미래적인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근거한 확신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은 얻은 것이 아니기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도 실체가 없는 헛된 확신에 불과하다. 위에서도 살펴 봤듯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이들의 확신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에게 구원이 없음을 선언한다.(마 7:23)


따라서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은 지금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전제 될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이제 새로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자.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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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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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바냐 2:1-7 마지막까지 열린 문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본 구절에서 두가지 이야기를 한다. 하나는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전 여호와를 찾고 겸손을 배우면 혹 다가올 진노를 피할 수도 있음을 선지자는 말한다. 심판이 이르기전 마지막 남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 블레셋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살아 남은 유다 자손이 그 땅에 거주하게 될 것이고 번성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절별 해설

2:1 <<함께 모여라>>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함께 모이라고 권면하는 것은 단순한 회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임박하게 다가올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겸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 위한 회집을 요청하는 것이다. 


2:2 <<기회가 겨처럼 날아가기 전에>>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거나, 다시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스바냐의 이 제안이 최후의 통첩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기회마져 때를 놓치면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라는 것을 말한다. 


2:3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블레셋의 대표적인 성읍은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 이렇게 5개다. 그 중에 <가드>를 제외한 블레셋의 대표적 성읍 4개를 언급함으로 브레셋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 <가드>를 제외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미가 뿐 아니라 아모스와 스가랴도 스바냐와 동일하게 블레셋에 대한 신탁을 전하는 과정에서 <가드>를 제외 시키고 있다. 


2:6 <<지중해 해안은 목초지가 되어>> 지중해 해안이 목초지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농사짓고 밭을 일구는 땅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곳에서는 결코 양떼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블레셋 땅에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사람이 거할 수 없는 곳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2:7 <<밤이 되면 아스글론에 있는 집에서 잠잘 것이다>> 아스글론은 블레셋 사람들의 성읍인데, 살아 남은 유다 백성들이 블레셋 땅에서 양을 치고는 마치 자기 집처럼 아스글론에 와서 잠잔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블레셋의 완전한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모두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회>는 겨처럼 바람에 금세 날아갈텐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스바냐가 여호와의 진노의 날을 선언하고 그 날에 임할 재앙을 예언하나 그 목적이 심판에만 있는 것이 아님이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스바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예견되어 있으므로, 그 중에 주의 율법을 지키고 겸손한 자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올바른 일을 하고 겸손을 배워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3절)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재앙이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편에 선자들은 구원을 얻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 심판과 사망에 이르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초청>으로 마친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생명수를 마음껏 마시십시오"(계 22:17) 성경의 복음은 심판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마지막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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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훔 1:1-8 단회적 회개가 온전한 구원은 아니다.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하나님이 니느웨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엘고스 사람 나훔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특히 주를 거스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은 견딜자도 막을 자도 없을 만큼 두려우신 분이다. 그런데 그 무서우신 하나님이 니느웨을 멸하시려 하신다. 


절별 해설

1:1 <<엘고스 사람 나훔이>> 엘고스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많은 학자들은 엘고스가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에 있는 유다 남부의 한 마을로 나중에 <엘케시>라고 불린 곳이라 생각하여 나훔을 남유다의 선지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견해 중 하나다. 


1:2 <<보복하시며 몹시 노하시는 하나님이다>> 나훔서에서 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심판하시는 여호와다. 특히 악한 사람들에게 보복하시며, 몹시 노하시는 하나님으로 강조된다. 이는 이전에 알고 있던 용서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니다. 


1:3 <<여호와는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이 말씀은 여호와는 쉽게 노하시지 않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호와께서 몹시 노하신 것은 니느웨의 죄가 얼마가 크고 깊은 지를 지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분노가 참고 있는 것에서의 폭발한 것임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구름은 주의 발에 밟혀 일어난 흙먼지다>> 이 표현은 문학적인 비유인데, 마치 사람이 메마른 땅을 걸을 때 흙먼지가 일어나듯 하늘에 떠있는 구름들이 거대하신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해 움직이실 때 일어나는 흙먼지 같음을 표현한 것이다. 


1:4 <<바산과 갈멜 지역이 메마르고 레바논의 꽃들이 시든다.>> 바산과 갈멜 그리고 레바논과 같은 비옥한 곳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물을 말리시면 메마른 곳이 되고 만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광대한 지역에 재앙을 일으킬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심을 그 재앙의 영향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1:8 <<그러나 홍수로 니느웨를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이 표현은 7절에서 하나님께 자기에게 피하는 자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해서는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심을 강조한 것이다. 이제 니느웨는 물로 심판을 받아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  


기도

주여, 우리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훔의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경외함을 더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선지나 나훔은 니느웨 백성을 회개로 이끈 이전 선지자 요나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한다.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다. 이전 요나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들었던 니느웨의 백성들은 급속한 회개를 통해 그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나훔 때에는 달랐다. 나훔이 전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그래도 이루어졌고, 바벨론에 의해서 니느웨는 멸망당했다.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킨 니느웨는 하나님의 용서 이후 다시 옛 자리로 돌아왔다. 영적 각성을 잊어버렸고, 폭력과 우상 숭배와 교만의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그 결과 니느웨는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단회적 위기의 극복이 온전한 구원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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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장]


1. 재앙의 상태가 된 이스라엘의 모습


  1)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이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사모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1) 무리라 피흘리려고 하고, 매복하여 형제들을 잡으려 한다. 

   (2)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한다. 

   (3)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한다. 

   (4)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라, 친구를 의지하지 말라, 네 품에 누운 여인이라도 믿지 말라.

   (5)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고, 딸이 어머니를 대적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이다.


  * 이것은 재앙을 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재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황폐함... 최소한의 공동체인 형제와 가족이 서로를 대적하고 믿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린다. 지도자와 권세자들은 힘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급급하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배신과 배반이 일상이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아의 시대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던 모습이 연상되며, 자연스럽게 홍수심판이 임했던 것 처럼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 이와 같은 진노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와 대적했던 자의 운명


  1)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우러르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신다. 따라서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곳에 앉았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2)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에 진노를 당하겠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어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3) 하나님의 백성은 진노 중에라도 구원받게 되는 것을 대적이 보고 자신의 조롱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 있으면 증명해 보라며 조롱했던 자인데, 그는 이제 진흙처럼 밝히게 될 것이고 우리는 구원가운데 그들의 멸망을 보게 될 것이다. 


  4) 그 날에는 우리의 지경이 넓혀질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땅은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약속이 이스라엘 전체(민족)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이방인들이 돌아오더라도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로 나아오는 것임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유대 교회 공동체에서 초기에 가지고 있던 신학적인 의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방인은 반드시 유대인이 되는 절차(할례)를 거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바울과 유대 바리새파 교인간의 신학적 갈등이 지속된 것으로 보이다. 


  5) 원하건데

   (1) 애굽에서 나오던 날과 같은 이적을 보이소서.

   (2) 그래서 여러 나라가 이것을 보고 자기 세력을 부끄러워하게 하소서.

   (3) 그들은 뱀처럼 티끌을 핣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두려워하며 

   (4)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게 하소서.  


  * 창세기 3장 뱀의 등장과 뱀이 저주를 받는 모습이 연상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이방민족들을 뱀으로 묘사하였고,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심판으로 티끌을 핣고 땅을 기는 모습이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다. 



3. 이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겠는가!


  1) 이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어디에 있겠는가!

  2)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신다. 

  3)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 

  4) 주께서는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 인애와 성실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묵상 한 모금]


1. 이스라엘은 마지막 심판때의 회복을 전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의 씨를 통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만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신학적인 갈등이 되었던 것 같다. 


2. 마지막 날에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12절) 말씀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귀화하게 되어 하나님의 구속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신약의 유대인들은 본듯 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서도 반드시 유대인으로 귀화하는 통과의례, 즉 할례를 고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갈등하는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유대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할례를 받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3. 창 3장 14,15절에 뱀에게 내리는 재앙의 내용과 미가 7장 17절의 내용의 유사하지 않은가 싶다. 창세기는 뱀에 대한 저주인데, 미가서는 이방민족(이스라엘을 대적했던)에 대한 재앙의 묘사이다. 이 둘이 서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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