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13-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있다면)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행함을 보이라.(13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너는)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14절)


(원리)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임(15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6절)


(원리)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1.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17절)

2.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절)


(정리하기)

1. 정말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을 행함으로 보이라. 지혜와 총명이 가득한 자에게서는 성결과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것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할 태도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2. 반면 이 땅의 지혜는 정욕적인 것이고 귀신의 것이다. 이 땅의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 너희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말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너희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따라 성경,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을 행함으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기와 다툼, 편견과 거짓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땅으로 부터 온 지혜요 마귀적이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는'(15절)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혜라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이 아니다. 지혜라고 불리고 인식되고 있지만 어떤 지혜는 땅에서 나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인지? 땅에서 나온 지혜인지 구분해야 한다. 

2. 본문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행함(선행, 13절), 자랑하지 말라(말, 14절), 화평을 심으라.(18절)이다. 

약 3:1-12은 '말'에 대한 주제로 권면하고 있다. 약 1:19-27 말보다 행함을 강조한다. 약 2:14-26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앞에 언급한 주제를 다시 정리하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의 유의함과 행함의 강조가 시기와 다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되고 오히려 화평의 방향으로 가야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화하고 있다. 


(묵상하기) 

1. 그리스도인은 말보다 행함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한다.(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고,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 그러나 우리는 '지혜'라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도 지혜를 말하면서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낸다.(물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을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긍휼'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3.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견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화평을 추구할 것인가? 싸우지 못하도록 말을 통제할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속마음을 여과없이 다 쏟아내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죠이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 수준을 고려해야한다. 그런 이해없이 완전한 미래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과거의 전통에만 매여서도 안된다. 현재 우리 수준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완급을 조정하고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 화평을 이룰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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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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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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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8-9>(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형제들아,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1) 무엇에든지 참되며(허위의 반대말)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3)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즐겁고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4)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정중한, 고상한, 우아한)

  5) 무슨 덕이 있든지(도덕적으로 뛰어남)

  6) 무슨 기림(worth of praise)이 있든지(도덕적으로 인정받아 칭찬을 받는것)


2. (권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최종적으로 빌립보 교회에게 주는 권면은 무엇인가? 

  [정리]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기림'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묵상] 바울은 이 6가지의 항목이 어떤 상황과 처지 속에서도 성도들에게 흘러 나와야 하는 것으로 권면하고 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외부적으로는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것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참, 경건, 사랑받을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존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도덕적으로 뛰어나야 하며 인정받을 수 있도록 되기를 힘써야 한다. 완전함에 도달이 아니라 지향점을 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것이다.(3:12)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한 다툼을 자제하고 한 마음이 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 교회를 세움(4:1)을 위한 권면이라면 특정상황 뿐 아니라 보편적인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추구해야 할 6가지의 덕목을 권면함으로서 빌립보서의 본론적인 메시지를 마무리 한다. 


2. 배우고 듣는 것의 목적은 '행하는 것'이다.(9절)


  [묵상]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교회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준다. 또 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권면을 듣고 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정말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낮출 것인가? 교회의 권위 앞에 죽기까지 복종할 것인가?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순종할 마음은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지만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경쟁자인 상대방에게 바울의 권면을 근거로 요구하려고 하는 자세는 아닌가?(낮아짐을 요구하고, 죽기까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영적 폭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울의 권면을 따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상대에게 이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는 아니다. '내가 행하는 것' 빌립보서를 공부한 목적이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면서 기대했던 것이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으로 인해 내가 낮아지고, 내가 죽기까지 복종할 것을 결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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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야고보서를 통해서 본, 믿음과 율법, 믿음과 행함간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 율법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


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란 <율법을 행함으로 얻으려하는 자기 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믿음>이다. 아주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라는 의미로서의 <믿음>이다. 이 때, 믿음의 반대말은 행함이 아니라, 자기 의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얻은 성도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누차 강조해서 말한다. 


2. 행함과의 관계 속에서의 믿음


주로 야고보서 2장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다. 여기서의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이란, 지식과 행함이 함께 통합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진정한 믿음의 반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즉 지식으로서만의 믿음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3. 정리하면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엄밀한 의미는 서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반대말은 <율법>이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반대말은 <행함은 없는 지식>이다. 


참된 믿음이란, 자신이 알고 신뢰한 것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행함이 있어야 하지만(야고보의 주장) 그 행함에는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는 것(바울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복음에는 율법적 삶에 대한 권면을 부정하지 않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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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1편] 시편 1편에서 말한대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와 같다. 똑같다. 그러나 그걸 믿고 확신하여 늘 의인의 자리에 있는 것은 참 힘들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성경이 강조할 때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든지, 그것을 꼭 해야 하든지하기 때문이다.


[정리1]


1. 시편 기자가 받고 있는 조롱과 위태로움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의지하여)

너희는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하니 어찜인가?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여호와를 의지하여 의를 행하고 선에 머무르려 하는 자를 오히려 넘어뜨리려 하며, 짓밟으려 하는 자가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조롱과 협박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2. 시편 기자의 견고한 마음과 확신(의인을 향한)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는도다.

  :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그 터(정의와 공의)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여전히 그의 성전에 계시고, 그분의 보좌는 높은 곳에 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인생을 살피시고 있으니 두려움이 없다. 


3. 시편 기자의 확신(악인을 향한)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여호와는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그들을 그물로 잡고 심판하신다. 


4. 결론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 여호와께서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의인을 바라보신다.



[정리2]


1. 시편 1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고 악인은 망하게 되리라는 말씀의 반복이라 볼 수 있다. 


2.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많은 원수(끊임없는)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3.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판결)을 믿고 의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4. 그것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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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이다. 2장은 1장보다는 주제가 간단하다. 빈부의 격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과 참된 신앙은 말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특히 빈부의 문제로

사람들은 빈부에 따라 대접을 달리한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그런데 두 가지 이유에서 야고보는 충고한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요와 약속한 나라의 상속을 받게 하셨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업신여긴 꼴이 된 것이다.

2.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대우했던 부자는 오히려 우리를 법정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그들은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 수 있으니까...)

3. 그런행동은 율법의 정신(이웃을 사랑하라)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인격과 성품의 문제가 아닌, 빈부의 문제로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어떤 자리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일은 제도적으로 있어서 안되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속되어서도 안된다.

교회에서는 그 사람의 재물이 아닌,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진정성이 있는 희생을 통해서 인정받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특정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유독 광고해주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 국회의원이 우리 교회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은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부한 자를 대접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2. 행함이 없는 믿음(말과 지식)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선 야고보가 말하는 본문에서 행함없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행함이 구체적으로 선행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보다는 말과 지식만 있지 실제적인 행위가 결여된 신앙(신앙외의 일반적인 것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하겠다.)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말과 지식이 있다고 신앙의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마귀도 그 정도는 있기에.

2. 핵심은 우리 신앙에 행함(deed, action)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각론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행함이 따라와야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총론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자연스럽다 본다.

 

지금까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 <선행이나 경건의 삶>을 잘 이루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 신앙이 구원받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과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받는 신앙에 어떤 대립되는 각이 있다는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본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야고보서 2장의 흐름을 통해 본다면 야고보는 성도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의 칭의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 보여진다. 다만, 말과 지식(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는 좀 다르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이다. 헐벗고 가난한 형제를 향해서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말과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야고보는 말한다.)으로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행위가 따랐고, 기생 라합도 행위가 따랐다. 말과 지식만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다.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말이다.(26절)

바울은 믿음(자기 의를 쌓아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닌)을 통해서 의롭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는 것을 통해 의롭다 인정하셨다는 논리로서 칭의론을 말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이 말과 지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여 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말과 지식뿐 아니라 행함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맞는 말이고, 어떤 충돌도 없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의 칭의론은 매우 기독교적 독특성을 가지는 반면, 야고보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논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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