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하나님의 도시>란 책을 다시 읽었다. 2년 전쯤 책이 발간되고나서 바로 읽었을 때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한 현재적 종말론적 삶에 대한 설명이 깊이 와 닿았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잡았다.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 그렇듯이 첫 인상이 좋았다고 실제로 두 번 읽게 되는 책은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었고 지금 그 내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 책을 다 읽고 주변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저자의 이전 책(하나님을 팝니다, 위드)이 강렬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좀 실망했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이 책이 이 전 책과 성향이 좀 다르며 책의 전체적인 논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좀 산만하게 읽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읽으면서 파악한 논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래야 혹 이 책을 읽게 되는 분들이 덜 혼란스럽게 이 책이 주고 있는 유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큰 틀에서 저자의 논지 흐름을 따져본다면, 첫장(비전)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것이다. 미래는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데 미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냉소적인 세대가 되었다. 낙관적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는 세대다. 교회가 말하는 낙관적 종말(점진적 성장을 통한 완성) 역시 성도들의 헌신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낙관적 미래를 말하는 것을 조롱하는 냉소적인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현 시대는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역사적인 사건. 1939년 뉴욕 박람회, 디즈니월드의 투모로우랜드 방문, 개인적으로 동생의 죽음의 사건 등을 그 감정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이와같은 상황인식을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방식으로 <당위>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적한다. 저자는 교회가 건강한 종말론을 가르치지 못한 것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미래 완성될 <하나님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한 부분이 잘 나와있고, 문제의식이 잘 나와있다. 첫 장을 정성스럽게 읽는다면 그 힘으로 끝장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만큼 흥미롭다. 

둘째장(결말)은 간략하게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과거의 회귀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을 분명히 한것이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동산에서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 <광야>를 거쳐야 하는 시기가 있지만 그 광야에는 여전히 질서가 있었고, 아름다움이 함께 했으며 풍요로움이 동반되었음을 저자는 출애굽한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설명하면서 간략하게 언급한다. 

저자는 사도요한이 미래도시를 환상가운데 보고 다시 현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현실을 살면서 어떻게 사도 요한이 보여준 <미래도시>가 도래할 것인가 기대하게 되었을까 질문하면 다음 장으로 인도한다. 


셋째장과 넷째장은 지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미래 도시>가 어떻게 성취될 것으로 인식하고 가르쳐왔는가를 제시한다. 저자는 두 개의 가르침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진화(셋째장)고 다른 하나는 대피(넷째장)다. 진화는 낙관적인 성장을 통한 미래도시 완성의 종말론인데 이와 같은 개념은 교회의 역사속에서 희망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냉소주의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성경적 질서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자는 비전은 빛바랜지 오래되었다. 더 이상 이런 구호는 사람들을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지 못한다. 또 한 부류는 <대피>신학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니 <영혼구원>에만 주력하자는 방식이다. 이런 종말의식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은 부차적인 것이며 결국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를 섬처럼 세상속에서 고립된 존재가 되거 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영역을 점령하자는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자신의 것을 확장하려는 이기적인 기독교로 인식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미래도시>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인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다섯번째 장(부활)에서 저자는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죽음에서 부활이라는 불연속성(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여전히 연속적인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미래도시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한 가지 비유를 드는데, 넬슨 만델라가 케이프타운에서 바다로 7킬로미터 떨어진 섬에서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 갔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만약 육지와 그 섬 사이의 바다가 사라진다면 넬슨 만델라의 정원이 육지와 연결될 것임을 제시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미래도시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질서가 잡히고, 아름다움이 일어나며 풍요가 넘쳤다. 이제 그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저자는 말한다. 내게 주어진 동산에 질서를 만들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풍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섯번째 장(소명)에서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미래도시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다시 <소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소명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최고소명> 둘째는 <공통소명> 셋째는 <특별소명>이다. 최고소명은 그리스도 그 분을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의 두번째 책 <위드>는 이 최고소명이 변질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다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심된 신앙이 아닌 하나님을 일로서, 도구로서 관계하려고 하는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책이다. 둘째소명은 <일반소명>이다. 일반 소명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시대 누구든지 순응해야 하는 말씀들로 서로 사랑하고, 윤리적으로 살고,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는 등등의 소명이다. 셋째 소명은 <특별소명>으로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독특한 부르심에 대한 것인데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개별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일반소명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특별소명>에 대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적어진다. 대개이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 속에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의 특별소명의 가치에 대한 말씀보다 일반소명(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과 모임, 헌신 등)에 대한 강조만 듣고 그로 인해 교회에서 위축되거나 죄의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저자도 설교하지 않고 오랫동안 청중이 되어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방향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설명대로 본다면 세가지 소명중 우리는 첫번째 소명을 관계보다는 사역과 일로 만들어버리고, 일반소명만 강조함으로 특별소명을 근거로 살아가야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작아지고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우를 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진화하라고 도전하거나 도피하라고 겁주면서)

저자는 일곱장(질서), 여덟장(아름다움), 아홉장(풍요로움)을 다루면서 미래도시가 보이지 않는 광야와 같은 이 땅에서 어떻게 미래도시의 동산지기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시한다. 첫째는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가치를 강조한다. 바른 규정을 따라 질서를 만들면 그곳에서 화평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올바른 질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한다. (경찰은 사회를, 부모는 가정을) 사회 정의를 위하는 것이 우선인가? 전도가 우선인가? 이 두가지 질문에 저자는 둘 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사회정의를 통해 선교를 해야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관계의 질서(식탁과 성찬을 통한)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평화와 화해의 관계를 부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따로 언급한다. 

둘째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은 <실용성>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아름다운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예배는 실용성을 넘는 것이고 미래도시는 실용성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곳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절망적 현실에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는듯 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독교적인 예술이나 선교적인 도구로서의 예술만이 인정될만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풍요로움>이다. 미래도시는 빈곤을 풍요로 바꾸는 도시다. 광야의 빈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풍요롭게 하시고, 광야의 허기짐을 오병이어로 배불리신 주님의 나라는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상의 풍요를 제공하는 사람들(기업가와 금융 등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듯 하다. 그들은 세상의 풍요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들이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하면 소수의 사람들을 배불리는데 급급하게 됨을 지적한다. 교회는 이들의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함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진정한 풍요는 생명의 풍요임을 말하면서, 생명의 풍요는 십자가의 예수가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아홉번째 장을 마무리 한다. 


마지막 열번째 장(희망)은 이 책의 결론이다. 나는 이 장을 빨리 마무리해서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를 얻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의 집중력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저자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나의 상황과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죽음의 위태로움 속에 있었을 때 그가 고민했던 내용, 그가 그 현장(현재) 속에서 이미 미래도시를 건설하고 그 질서 속에 있게 되었던 그의 고백이 나의 고민이었고 고백이었기에 나는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종말론>에 대한 책이지만 교리적인 정리가 아니라 실제로 종말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미래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적실한 문제인식을 통해 오늘날 이 시대와 한국 교회가 가진 한계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종말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상적인 개념으로 잘 설명해 준 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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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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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6장] 기드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전의 사사와 유사점이 있다면, <작은 자>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드온을 부르시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신뢰(믿음)를 다시 얻는 시간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깨어진 신뢰(13절)가 큰만큼 그것을 회복시키시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을 알고 계신듯 합니다.(이스라엘 그들의 범죄함 때문인데도 말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미디안의 공격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에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다.

  1) 범죄: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  

  2) 진노: 여호와께서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다.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1) 미디안을 피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었으나, 파종할 때가 되면 미디안이 올라와서 토지 소산을 멸하며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고 양과 소와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3) 요청: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1)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한 아모리 사람의 신을 두려워하였다고 지적.

  4) 구원: 여호와의 사자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나 사사로 세우심

   (1) 미디안 사람 몰래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려고 하던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르심. 

   (2) 기드온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를 버리사 우리를 미디안에게 넘겨주셨다.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 이적이 어디에 있느냐? 반문함. 

   (3)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네가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요청하시고, 그래서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신다. 

   (4) 기드온은 자신은 작은 자라고 말한다.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한 집의 작은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호와는 기드온이 미디안을 한 사람을 치듯이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5) 기드온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제물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 앞에 드리매, 여호와께서 그 제물을 바위에 놓으라 하고 지팡이 끝을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예물을 살랐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다. 

   (6) 그제야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를 봤다는 것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가득했으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 했다.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둘째 수소를 잡아 바알과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자, 기드온이 종 10명과 함께 밤에 그 일을 했다. 

   (8) 다음날 아침에 이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드온을 죽이려 하자, 기드온이 아비 요아스가 너희가 바알을 위해서 다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반문한다. 그가 신이라면 그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렸다. 

   (9)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 이에 기드온은 나팔을 불었고, 아비에셀이 그 뒤를 따랐다. 기드온은 자기 지파인 므낫세에 두루 사람을 보냈고, 아셀과 스불론, 납달리에도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모여들었다. 

   (10) 기드온이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표징을 구했다. 한번은 양털 한 뭉치에만 물이 있도록, 다른 한 번은 양털 뭉치에는 물이 없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있도록.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셨다. 

 

  5) 승리: 7,8장.

  6) 평화: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드보라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죄를 범한다. 이번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민족은 미디안이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산으로 이들을 몰아냈고, 소산물과 가축들을 빼앗아갔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밤에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려고 하던 기드온을 부르신다. 처음 기드온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네가 가서 이스라엘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시며 사명을 주신다. 자신의 작은 자임을 고백하는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너를 이기게 하겠다고 확신을 주신다. 그러면서 제물을 드리려는 기드온 앞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기적을 보이시고, 그것으로 인해 기드온은 자기와 이야기를 나눈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드온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안심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더 무서운 일을 시키셨다. 둘째 수소를 가지고, 바알과 아세라 나무 신상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다. 기드온은 그 리을 종 10명과 함께 시행했지만,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행해야만 했다. 다음날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사람들은 기드온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가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사람들을 꾸짖어 우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 바알 스스로가 다투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라고 하여 진정시킨다. 이 일로 인해 기드온은 바알과 다투는 사람이란, 여룹바알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미디안과 아멜렉과 동방 사람들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에 진을 쳤다. 기드온은 나팔을 불고,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 납달리에 사람들을 보냈고, 무리들은 기드온에게 모였다. 


기드온은 다시 한 번 양털로 하나님의 증표를 얻기 원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셨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는 과정을 자세히 다룸(다른 사사들에 비해서 매우 자세하게)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작은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미디안을 두려워 한 나머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그는 여호와의 명령에 사람들을 무서워한 나머지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자를 향해서 하나님은 <큰 자>라고 부르셨다. 작은 자에게 큰 자가 되라는 꿈을 가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작아진(신앙, 사회생활, 자기 자신...) 기드온을 향해서 이제는 작아질 이유가 없다고,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이제는 작아질 이유가 없고 큰 자임을 확인시켜 주신다. 


  하나님은 에훗(왼손잡이)을 부르시듯, 드보라(여자)를 부르셨고, 이제 작은 자 기드온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작은 자>들을 세우시고 있다. 결국 세상에서 작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신의 나라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패턴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적용이 작은 자라도 주 안에서 용기를 갖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 큰 일을 이루신다로 가야 한다. 



2. 기드온에게 여러차례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나옴


  1)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으로 고기와 무교병을 대니 바위에서 불이 나왔고, 이로 인해 여호와 인줄 알게 됨

  2)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부수고 그 나무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지 않음

  3) 미디안과 전쟁을 치르기 전 양털 테스트를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두번 다 응하시고 확신을 주심.


이 모든 장면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인해 주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기드온이 전쟁을 해야 할 때에 므낫세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여러 지파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지도력이 있었으나 역으로 기드온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상당히 불안정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과정 속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을 점점 더 신뢰해가게 된다. 오랜시절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서 다른 민족에게 이스라엘을 팔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신뢰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여러차례 기드온에게 나타나시고 보여주시고 확인시켜 주신다.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드온이 정말 자신 안에서 믿음으로 확신하도록 돕는 것 같은 모습을 본다. 


하나님에 대한 상처가 큰 사람, 실망이 큰 사람, 분노가 컸던 사람도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신다. 잔잔한 바람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다시 확인시켜 주시고 때로는 보여주시어 그의 마음에 신뢰를 쌓아가신다. 점진적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오늘 하루도 기대가 되고 포근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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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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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장] 한 이틀 고민하다가 예레미야를 시작합니다. 너무 장이 길기도하고, 선지서라 내용을 정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솔직히 선지서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지난 간사 세미나때 예레미야 강의를 들은 것도 있어서 용기내어 시작합니다. 두려움 반, 기대 반. 응원부탁드려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1. 예레미야에 대한 역사적 정보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

  2) 유다 왕 요시야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기 시작했다.

  3)  사역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시대부터 시드기야 11년까지(예루살렘 멸망) 임하였다.


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심: 예레미야를 부르심

  1) 여호와: 모태로부터 너를 성별하여 불렀고, 너를 여러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2) 예레미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3) 여호와: 

   (1) 너는 너 자신을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며, 무슨 명령이든 말하라.

   (2) 그들 때문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구원하겠다. 

   (3)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심.

   (4) 여러 나라 위에 세워 네가 그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3.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여주심: 살구나무 환상

  1)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살구나무=지킨다 라는 말과 음이 비슷함)

  2) 잘 보았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키신다는 것을 살구나무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여주심: 끓는 가마

  1)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2)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북방 왕국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사방 모든 성읍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3) 재앙의 이유: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고 우상에게 절함으로 심판하는 것

  4) 요청: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명령한 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

  5) 약속: 내가 너를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 앞에서 놋성벽이 되게 하리라.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입이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나의 말로 풀어서 서술]


예레미야는 베냐민 아나돗의 제사장 중 한 명인 힐기야의 아들이다. 그는 제사장의 가문으로서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는 여호야김 왕때부터 시드기야 왕 11년, 유다가 멸망하는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사역한 선지자다. 자기 민족의 멸망을 선언해야 했으며, 그 멸망을 지켜봐야 했다는 측면에서 고통스러운 선지자였음을 알게 된다.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의 전적 부르심 가운데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도 모세처럼 자신이 없던 자로서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고, 예레미야을 여러 나라의 선지라로 세웠으며,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며, 무슨 명령이든 말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술에 주셨는데, 그가 전할 메시지의 내용들이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이다. 또한 건설하며 심게 하는 것이다. 


처음 두가지 환상을 보는데, 첫 환상은 살구나무 가지 환상으로 살구나무라는 히브리 말이 <지킨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 말의 음과 유사함을 이용해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임을 확인시키고 있고, 둘째 환상은 북에서 기울어진 가마솥 환상인데, 이는 북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킬 것은 예언해 주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것인데, 이 메시지를 왕과 제사장들에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켜주신다고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은 꼭 지킨다.


살구나무 환상이라는 것은 히브리 말로 <지킨다>라는 단어의 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지금 보여지는 유다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을 강조한 환상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신다고 했다가도 마음을 돌이키시거나 유보하신 적이 종종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한 모습으로 보았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이 심판은 반드시 <지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왔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야 시절에 요시야의 개혁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돌이키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있다. 같은 시대적 정황 속에서 나온 말씀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첫번째는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다. 듣고 돌아오면 기회를 얻고 회복된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으면, 겸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심판하신다.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다. 그 때는 기도해도 회개해도 소용없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레미야 1장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은 후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다보면 처음부터 후자의 경우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다. 첫번째의 케이스로 시작하신다. 그러다가 반복적으로 뉘우치지 않고 악을 행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후자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또한 마침내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보장하시는 구원이란, 적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는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왕과 지도자,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도록 한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왕과 지도자, 제사장과 백성들을 까는 말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말이다.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구원을 보장해 줄 테니 두려워 하지 말고 그 일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적자를 제압하고 멋진 기적으로 예레미야를 구출해주는 방식의 구원이 아니다. 적들에 의해서 치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지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만을 약속하신다. 어려움을 제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만을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장애와 어려움이 기적적으로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승리를 가지는 것만이 구원은 아니다. 구원이란 고난을 이기는 힘, 조롱을 견디는 힘, 고통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선다는 것이고 구원하시겠다는 말의 의미다. 우리에게는 낯선 구원의 개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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