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13-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있다면)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행함을 보이라.(13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너는)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14절)


(원리)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임(15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6절)


(원리)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1.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17절)

2.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절)


(정리하기)

1. 정말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을 행함으로 보이라. 지혜와 총명이 가득한 자에게서는 성결과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것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할 태도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2. 반면 이 땅의 지혜는 정욕적인 것이고 귀신의 것이다. 이 땅의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 너희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말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너희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따라 성경,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을 행함으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기와 다툼, 편견과 거짓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땅으로 부터 온 지혜요 마귀적이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는'(15절)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혜라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이 아니다. 지혜라고 불리고 인식되고 있지만 어떤 지혜는 땅에서 나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인지? 땅에서 나온 지혜인지 구분해야 한다. 

2. 본문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행함(선행, 13절), 자랑하지 말라(말, 14절), 화평을 심으라.(18절)이다. 

약 3:1-12은 '말'에 대한 주제로 권면하고 있다. 약 1:19-27 말보다 행함을 강조한다. 약 2:14-26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앞에 언급한 주제를 다시 정리하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의 유의함과 행함의 강조가 시기와 다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되고 오히려 화평의 방향으로 가야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화하고 있다. 


(묵상하기) 

1. 그리스도인은 말보다 행함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한다.(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고,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 그러나 우리는 '지혜'라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도 지혜를 말하면서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낸다.(물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을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긍휼'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3.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견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화평을 추구할 것인가? 싸우지 못하도록 말을 통제할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속마음을 여과없이 다 쏟아내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죠이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 수준을 고려해야한다. 그런 이해없이 완전한 미래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과거의 전통에만 매여서도 안된다. 현재 우리 수준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완급을 조정하고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 화평을 이룰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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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6-12>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원리1)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라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정리) 혀를 제어하거나 관리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함을 말한다. 온 몸과 삶을 불태울수 있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리 혀(말)의 문제를 심각하게 집요하게 지적하는가? 교회 안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문제가 심각했던가? 아니면 기독교가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인가? 

(묵상) 지금까자 말과 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영역이다. 처음은 행함이 없고 말만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함부로 쉽게 함으로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두 문제 모두 말이 앞선다는 것이고 말이 삶으로 뒤받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측면에서 기독교 인들이 말을 잘 한다는 이미지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말을 더디해야 한다. 말을 줄여야하고 행동에 뒤 따라야 하며 빨라도 행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원리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7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정리) 사람이 다른 동물과 생물을 다 길들일 수 있으면서도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둘러 스스로를 해롭게 한다는 말로 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질문) 야고보는 혀가 통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두른다고 봄을 혀를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앞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된다. 

(묵상) 본인의 지체로 본인의 의지로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이 있다. 내부의 장기들이 그렇다. 내 몸에 있지만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기관이다. 그러나 손과 발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말의 실수가 많으며 그로 인해 혀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되고 만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말(혀)는 통제하는듯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지체가 된다. 

혀와 말의 문제는 말과 행위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앞에서 행함과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행함과 믿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는데, 말의 문제가 그렇다. 행함이 없이 말만 있을 때 믿음을 보일 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말이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품격)과 괴리된 내용으로 나오게 될 때 그것도 문제가 되고 만다. 정리하면 두가지 문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담고 있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생각 밖의 말을 하는 것(내용이 채워지지 못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경박함 등)을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원리3)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9절)

한 입에서 찬송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0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쓴 물을 내겠느냐?(11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2절)


(정리) 한 입 안에서 서로 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이 나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 안된다.

(질문) 말이 안되는 이야기,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 이런 의미로 야고보는 계속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묵상) 교회는 이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지속되어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현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야고보 사도는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혹독하게 한다. 집요하게 한다. 왜 이런 모순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지 명쾌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 지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감추거나 숨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있음에 한탄하고 지적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외부에서 밝혀내기 전에 교회가 수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서 고치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는 그렇게 했다. 문제가 없는 척하지 말고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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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5>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

-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이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원리)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예시1)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

(예시2) 배를 보라. 사공은 지극히 작은 키로써 큰 배를 광풍 속에서도 그 뜻대로 운행한다.(4절)

(소결론)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정리) 선생되는 것을 신중히 하라. 선생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왜냐하면 선생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혀)은 작은 것 같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자다. 따라서 혀는 크기는 작아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질문)

1. 본문의 논지를 통해 볼 때, 교사(가르치려는 자)가 되려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들로 인해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말의 영향력이 크고, 혀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만의 문제는 아니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교훈이 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 같은 느낌을 준다. 

3.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사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사로 사람을 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묵상)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말 하나로 상대 전체를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오해 하기도 해서 그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오직 나 자신만이 제어할 수 있고 타인에 의해서 작동할 수 없는 것이 혀지만, 혀를 통해 만들어지는 말은 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게다가 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오고, 내 수준만큼만 나오는 것이기에 그 결과물을 단순히 말실수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 신중해야 한다. 충분히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잘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신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말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 말이 공식적인 소통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물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정확한 말의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없다. 심지어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알 수 없기에 답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답을 해야하는지.. 누구를 향해서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교사는 더욱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힘이 크니 소통의 장을 제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말을 하셨는가? 진리를 말하셨고, 본질을 말하셨다.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없이 말씀하셨지만 약한 자들에게는 따듯하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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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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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8-13> 10:55-11:07(정리) / 11:07-11:37(질문,묵상)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8절)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9절)


(정리) 너희가 성경의 최고의 법, 이웃 사랑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와 같은 행위를 정죄한다.

(질문) 야고보는 최고의 법(사랑)과 '차별'을 대조적인 의미로 설명한다. 사랑의 좀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묵상)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과 증오일 수도 있지만, 야고보는 여기서 '차별'이라고 봤다. 사랑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차별은 자신의 몸과 대상의 몸을 차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단순하 차이가 아니라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차별'이다. 

사랑이란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인 차이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적 대우를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번한 자가 된다.(10절)

(예시)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따라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11절)


(정리) 여러가지 율법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율법을 만든 분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도 함께 만드셨으니 그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질문)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접근한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상식을 무시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가? 혹 교회가 '은혜'로 모든 것을 허용하거나 율법 폐기 논리를 주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끄집어 올려 설득하고 있는듯 하다. 

(묵상)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많은 부분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상식적인 선에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초월'이 '상식 밖'인 영역이지만, '윤리 밖'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권면) 너희는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12절)

-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설명)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그러나)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


(정리) 권면의 내용은 간단하다. 말도 하면서 행하기도 하라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는 것을 잊지 말고 긍휼을 태도를 가지라.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질문)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묵상)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말의 의미가 그 자체로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 말이 아닌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칙

2)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리는 적용되면서, 부정적인 측면의 적용(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적용(긍휼이 여기면 긍휼이 여김 받는다)을 통해 긍휼은 심판받지 아니함으로 심판으로 이기고, 죄가 아닌 선행으로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되는 것, 이것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성도는 율법에 매인 존재는 아니지만, 율법을 무시하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율법, 자유의 율법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최종정리]

1. 너희는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을 행하라. 

2. 그 사랑은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3. 만약 차별한다면 그것은 율법으로 정죄받게 된다. 

4. 너희는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5.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살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약 2:13)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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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7>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

        (이유) 너희가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1절)

        (예시) 만일 너희 회당에 사람이 들어오는데

한사람은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한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2절)

너희가 아름다운 옷 입은자를 눈여겨보고,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에 앉으라 하면(3절)

=>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 아니냐(4절)


(정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부유한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쓰고 대우를 잘 해주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긴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서로 차별하여 다른 존재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런 주제를 다루는가? 그것은 공동체 안에 빈부의 차이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가 공공연하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별이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여졌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했고, 교회 안에서 이런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문제를 다룰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묵상) 이 권면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고장났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면에서 교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과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을 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다르지 않다. 부한 자에게는 잘 대해주고, 가난한 자는 함부로 대하기 쉽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의 유무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야고보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외모, 빈부의 차이)은 악한 생각이다. 예수를 믿고 인류 가운데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신분의 차이, 편견의 차이를 극복해 간 것이라고 볼 것이다. 사람의 외형적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차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왜 사람은 차별받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존귀한 존재임을 알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역시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기원에 있어서 존귀하고,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 역시 존귀하며 평등하다. 


(설명)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5절)


(정리) 그리고 너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들이 하찮게 여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것을 아는 너희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느냐?  

(질문)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한 경우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인 히브리인들을 택하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다. 나그네와 같은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기도 했다. 애굽의 노예로 잡혀간 요셉을 통해 애굽의 기근을 이기기 했고 그 나라에 풍요를 더하게 했다. 하나님은 갈릴리의 어부를 택하사 주님의 제자를 삼았고 그들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높여 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묵상)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세상은 부한 자, 강한 자를 존귀히 여기고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업신 여긴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릇된 질서로 정리된 세상 나라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 온전한 질서를 부여하신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 땅의 질서 속에 개입하셔서 가난한 자, 약한 자로 부유한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일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신 분이고, 그 질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그릇된 질서로 운영되는 것을 보자 야고보 사도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다.

부자들은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

그들은 그 아름다운 이름(하나님)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7절)


(정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조차 성도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 여겼다. 왜 이리 어리석은가? 너희들을 법정으로 끌고가는 자가 누구냐? 가난한 자냐? 부자가 아니더냐? 하나님의 이름을 대놓고 비방하는 자들이 누구냐? 부자들이 아니냐? 

(질문) 부자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면을 경험적으로 모르지 않을텐데 왜 사람들은 부자들을 오히려 더 존귀히 여기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일까? 

(묵상) 그것은 부자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강하고 경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그들에 의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가난한 자는 우리에게 그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자를 가난한 자와 동일하게 대우해서 부자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우리는 피해를 볼 수 있다. 당장 헌금이 줄 수 있고 경제적 물리적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두렵기 때문에 부자들이 원하는 대우를 해주게 된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똑같이 대우해주면 되지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똑같이 대우할 때 받을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에 휘둘려서는 안되고, 그들의 주머니를 의존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한 두 사람의 경제적인 힘 때문에 휘둘리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가 너무 많은 빚을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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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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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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