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0-23>(정리하기)

1. (설명)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1)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2)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

  [정리] 바울은 지금 기뻐한다. 빌립보고 교회가 다시 바울을 생각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생각은 있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2. (설명)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11절)

  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절)

  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정리]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가 지금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빌립보 교회가 물질적인 도움을 줌으로 경제적 궁핍을 극복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쁜게 아니다. 바울은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지내는 법을 알고 있다. 바울은 다른 이유로 빌립보 교회가 고맙고 좋은 것이다. 


3. (설명)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절)

  1)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시초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다. (15절)

  2)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16절)

  [정리]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 인해 기쁘고 감사한 것은 바울의 고난과 사역에 함께 참여해준 것이었다. 바울이 복음의 시초, 마게도냐를 떠날 때 바울을 생각하고 후원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 뿐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도 두 번이나 바울을 도왔다. 빌립보 교회가 어느때에 잠시 바울을 돕는 일을 하지 못했으나 이제 다시 하게 된듯 하다.(4:10) 그것이 바울을 기쁘게 했던 것이다. 


4. (설명)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17절)

  [정리] 바울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주는 '선물'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 바울은 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필요가 아닌 자신을 생각해주고 후원해주는 교회의 풍성함을 위해서 기도한다. 

  1)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성한지라.

   (1) 에바브로드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다.

   (2)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18절)

  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


5. (찬양)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절)


6. (문안인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1)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21절)

  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22절)

7. (축복)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로 인해 정말 기뻤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할수 있나? 

  [정리]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의 필요를 공급했던 것으로 보인다.(18절)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했지만 단순히 물질적인 섬김 때문은 아니다.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다시 바울의 사역에 함께 동역했다는 것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과 함께 했던 교회고(15절) 어려운 시절 바울을 도왔던 교회였다.(16절) 여러가지 이유로 잠시 그와 같은 교류가 끊어졌다가 이제 다시 연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0절)

  [묵상]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면서 사역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모든 형편에 처하면서 그 상황에서 적절하게 사역하는 것을 체득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외롭게 그 일을 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길을 홀로갔고, 빈궁한 중에 도 꿋꿋이 그 길을 갔지만 동역할 누군가가 있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했고 기뻐했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안에 위로도 얻고, 그 풍요를 누릴 줄도 알았다. 

  나는 지난 20년동안을 후원을 받아서 살아왔다. 빈궁한 시절도 있었고 풍요로운 시절도 있었다. 시간이 갈 수록 마음에 더욱 무게감있게 다가오는 것은 '후원자'분들의 헌신과 한결같은 신실함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관대 십수년을 한 결같이 적지 않은 금액을 꾸준히 후원해주고 있는가! 이 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사역을 해 올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감사와 기쁨의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이 분들의 물질적인 후원이 없이도 주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을 길러야 한다. 후원자들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매여있어서는 안된다. 이 두 감정과 관계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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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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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8-9>(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형제들아,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1) 무엇에든지 참되며(허위의 반대말)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3)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즐겁고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4)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정중한, 고상한, 우아한)

  5) 무슨 덕이 있든지(도덕적으로 뛰어남)

  6) 무슨 기림(worth of praise)이 있든지(도덕적으로 인정받아 칭찬을 받는것)


2. (권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최종적으로 빌립보 교회에게 주는 권면은 무엇인가? 

  [정리]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기림'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묵상] 바울은 이 6가지의 항목이 어떤 상황과 처지 속에서도 성도들에게 흘러 나와야 하는 것으로 권면하고 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외부적으로는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것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참, 경건, 사랑받을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존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도덕적으로 뛰어나야 하며 인정받을 수 있도록 되기를 힘써야 한다. 완전함에 도달이 아니라 지향점을 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것이다.(3:12)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한 다툼을 자제하고 한 마음이 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 교회를 세움(4:1)을 위한 권면이라면 특정상황 뿐 아니라 보편적인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추구해야 할 6가지의 덕목을 권면함으로서 빌립보서의 본론적인 메시지를 마무리 한다. 


2. 배우고 듣는 것의 목적은 '행하는 것'이다.(9절)


  [묵상]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교회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준다. 또 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권면을 듣고 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정말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낮출 것인가? 교회의 권위 앞에 죽기까지 복종할 것인가?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순종할 마음은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지만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경쟁자인 상대방에게 바울의 권면을 근거로 요구하려고 하는 자세는 아닌가?(낮아짐을 요구하고, 죽기까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영적 폭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울의 권면을 따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상대에게 이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는 아니다. '내가 행하는 것' 빌립보서를 공부한 목적이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면서 기대했던 것이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으로 인해 내가 낮아지고, 내가 죽기까지 복종할 것을 결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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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3>(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권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3.(권면)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1) 동역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2) 동역자: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은 1,2장의 권면, 3장의 권면을 마치면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그 정리하는 권면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이다. 이것은 한 개인을 향해 주는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투기와 분쟁이 있는)를 향해 주신 권면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만약 교회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서로 투기와 분쟁을 지속한다면 교회는 설 수 없게 될 것이란 의미다. 빌립보서의 내용을 근거로 정리하면 교회 내의 분쟁으로 인한 것이라면, 큰 그림을 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2장) 반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육체의 자랑, 의에 근거한 신앙)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쫓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장) 이 둘을 잘 구분해야 연합할 때 연합하고, 경계해야 할 때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구별이 모호한 영역이 있지만, 늘 이 두 영역이 혼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빌 4:4-7>(정리하기)

1. (권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2. (권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3. (권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6절)

 <정리>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뻐하라'가 아니다. '주 안에서'이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묵상] 그것은 빌 1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은 매임에 있었고, 경쟁자들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18절) 이유는 그의 시선이 자기 자신의 형편이나 상대방의 성공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복음의 전파', '그리스도의 확장'에 그 삶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뻐하라'는 명령은 '주 안에서'라는 의미가 명확해 질 때 가능한 것이지 당위로서의 기뻐하라는 또 하나의 무거움 짐이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두번째 권면은 '관용'이다. '관용'은 갈등이 있는 두 집단 이상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한 편이 되기 위해서 품는 마음이다. 이는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품어야 할 마음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관용'이라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종말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관용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자가 오셔서 최종 판단을 내려 주실테니 서로의 주장을 강요하지 말고, 입장은 다르지만 최종 결정을 기다려보자. 곧 판결난다. 이 일로 서로 원수가 되지는 말자! 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서로에게. 아내와 내가 부부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종말론적 태도 때문이다. 


3. 이런 바울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입장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결정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입장이 다른 입장과 싸우거나 적을 만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입장이 진실하기에 그 입장에 서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다. 

  [묵상] 바울은 교회 안에 파당이나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그것을 정죄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을 경고하고 있지만 다른 입장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 분쟁으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긴장이 있을 때, 

<주 안에서> 우리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한 집안 사람임을 잊지말라

<관용> 곧 주께서 오셔서 선명하게 판단해 주실테니 좀 참고 서로에게 관용하라.

<기도> 그러면서도 네 입장에서 네 마음이 소원을 하나님께 구해라. 하나님께 맡겨라.(그 분이 정답을 알려주실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하나님의 정답이는 너는 따르든지 감사하든지 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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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7-21>(정리하기)

1. (권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2. (권면)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17절)


 (설명) 

  1) 바울은 여러번 말했고, 이제 다시 눈물로 말한다. 

  2)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18절)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2)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다.(19절)


  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4)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20절)

  5)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여기서 빌립보 교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답변1] 바로 앞에서 말하는 바울의 논조를 본다면,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하는 태도(3:13)을 말하는 것일게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게 되었냐를 따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신이 지금 바라고 지향하는 것(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가듯이 빌립보 교회도 괜한 논쟁(분쟁)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보다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답변2] 좀 더 앞으로 가면 바울이 자신이 매임을 당했을 때, 투기와 분쟁의 목적으로(그릇된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로 인해 분해 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국적인 관점(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넉넉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바울이 말하는 원수들의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의 바른 태도와 소망은 무엇인가? 

  [답변]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데, 그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대속,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을 훼손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의미(낮아짐과 죽기까지 순종하심의 정신)를 무시한다. 그들의 결국이 멸망이다. 그들은 육적인 것이고 땅의 일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 거기서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영광의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낮아진 몸, 죽은 몸) 자기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우리도 하나님의 올리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 이런 표현을 통해서 보면 2장에서 약속한 내용의 반복을 보여준다.(2:9-11)


<1,2장, 3장과의 연계성>

3장은 1,2장과는 주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1,2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이 있는 대상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파당이 다른 대상으로서 서로 투기와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3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교회를 위협하는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복음 외에 할례와 같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도 그들과 논쟁에 힘쓰기 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나가라고 요청한다. 

2장 마무리하면서 디모데 이야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3장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결되는 면도 있는데 1,2장에 나오는 대상이나 3장에 나오는 대상 모두 십자가의 정신을 훼손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바울처럼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는 연계성이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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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4-6>(정리하기)

1.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뒤질게 전혀 없는 자격을 갖췄다.(4절)


 (근거)

  1)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2)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3)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4)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5)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질문하면 묵상하기)

1.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3:1-3)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손할례당)에 대해서 잘못됨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육신적이 조건으로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육체적인 조건으로보면 누구 보다도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들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히려 자신이 왜 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육체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7절 이후)


<빌 3:7-9>(정리하기)

(전에는 육체를 신뢰했던 사람이었으나)

1. 지금은 바울이 자신이 신뢰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로 여긴다.(7절)

  (왜? 이유)

  1)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육체의 자랑)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다.(8절)

   - 따라서 지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육체의 자랑)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9절)


 (앞으로 지향하는 바)

  2)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10,11절)

   - (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 (어떻게?) 그의 죽으심으로 본받아

 [정리]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위해 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의의 근거도 달라졌고, 삶의 지향도 달라졌음을 말한다. 


  (바울의 결심)

  3)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


  [정리] 육체의 의를 의지한자는 자신에 대한 육체적인 의를 의지하고(과거) 앞으로도 계속해서 육체적인 의를 지향(미래)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과거, 확정된 미래보장)은 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상>을 위해 산다. 

  [묵상] 육체로 사는 사람들은 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는 만족된 의에서 더 나아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산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매임을 당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공동체 내부에서도 오해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향해서만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시기하고 다투는 자들과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힘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그 푯대만을 보고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권면) 

  4)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온전히 이룬자들: 바울처럼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을 근거로 의롭게 된 자들)

   (1) 만약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2)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정리]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어떤 것이 참되게 하나님의 뜻인지 알수 없을 때) 우리가 옳다고 깨닫고 믿는대로 그대로 행하라(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다투기 보다는) 만약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이 그것도 너희에게 나타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그러니 죽자살자 싸우지 말라. 서로 다른 입장에서 토론을 할 수 있겠지만)


<질문하기>

1. 왜 바울은 처음에는 육체의 신뢰문제(자기 의냐? 하나님의 의냐?)로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자신은 부활의 문제로 넘어간 것일까?(3장 10절 이후)

  - 빌립보 교회의 갈등 원인이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한 갈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칭의 이후는 율법적 방법으로 상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입장이 바울의 가르침과 달랐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 신앙적 입장 차이가 발생한듯 하다.(악의적이라기 보다는 아직 정확하게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니 그렇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첨언> 주석을 좀 살펴보니, 빌 2장까지는 교회 내부의 경쟁관계에 있는 부류들과의 논의라면, 3장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는 내용을 본다. 확실히 2장과 3장에 언급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의 태도가 많이 다르긴 하다.(포용적, 배타적) 그렇다면 3장에 언급된 대상들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한다.(13절)는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믿음으로 의롭게 됨 이후 상급을 받기 위한 헌신으로 봐야 할 것인가?)(17년 4월 14일. 추가해서 넣음)

  - 빌립보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이 지점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아직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바울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그룹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바울은 이 부분에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장 결론을 배타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 입장에 대한 바른 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냐? 하면 마무리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물론 결론 바울의 입장이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권위를 가지고 결정해주는 사람들은 없을테니.. 논쟁하면서 입장이 후대에 정리되어 왔을 것이다.)

 - 과제: 바울과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면 좋을듯 하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바울이 매여있을 때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과는 어떤 면에서 입장이 달랐을 것인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칭의 이후의 입장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는 쓸 당시에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과 확신을 기록하고 있지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후에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알려주실 것이라는 태도로 말한다.(바울이 확신하는 지점은 있지만 모두가 확정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태도를 통해 바울은 교회를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만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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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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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3>(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1절)

  -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말이다.(너희에게 안전하다.)

2. (권면) 삼가해야 할 것

 1) 개들을 삼가고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3)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권면) 해야할 것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질문하고 묵상하기)

1.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할 수 있는 키가 '주 안에서'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주 안에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묵상] 감정적으로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권면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상황은 감정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없는 중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에 의한 기뻐하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라는 수식어가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상황, 빌립보 교회의 상황이라는 맥락을 염두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고백했다.(1:18) 그것은 자신의 매임의 몸이지만, 시기하는 자는 득세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복음의 전파는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치관이 자기 자신 중심의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사역자들의 성공여부가 복음의 진전여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여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는 내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초라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도 한다. 그럼 왜 하필 그 낮아져야만 하는 사역자가 나인가? 그렇게 물으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의 형편도 해석해 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수고스럽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가치관임을 말한다. 이는 그만큼 간과하기 쉬워서 그릇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2. 2-3절에 삼가하라는 것과 행하라는 권면은 앞에서 언급한 주제와 전혀 다른 주제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연관성있는 권면인가? 

  - 이는 2,3절에 말하고 있는 권면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이후 앞의 내용과 연관되는 주제인지 아니면 별개의 또 다른 주제인지를 확정하면 될듯 하다. 

  [정리, 묵상] 개들이나 행악하는 것, 몸을 상해하는 것(손할례당)은 다른 3가지 행위라기 보다는 경계해야 할 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미지에서 행위로 구체화 되어과는 표현으로 보면 좋을듯 하다. 바울이 지적하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할례를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할례를 통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행위로 의를 자랑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대상을 말하는 듯 하다. 이들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복음을 훼손하고, 교회를 나뉘게 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을 삼가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진짜 할례파는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진짜 할례파라는 것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위해서 봉사하거나 사역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손할례당과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일하면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싸움을 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 때문에 속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의 일을 하는데 왜 내가 드러나야 하지? 왜 꼭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하지? 나는 잠시 필요할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데 왜 도구인 내가 하나님께 나를 써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 더 좋은 도구가 있다면 기꺼이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 맞을텐데.. 이 비밀을 바울은 옥중에서, 경쟁자와의 경쟁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1:18)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도 그와 같은 입장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교회는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했다. 사람을 자랑으로 삼고, 육체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언제나 하나님을 봐야지 하나님께서 지금 쓰고 있는 '도구'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도구는 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 한 마디로, 너희가 바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지금 뜨고 있는 그 사역자에게도 집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아닌 성령으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이런 분별력이 중요하다. 반복해서 말하노니 중요하다) 

이렇게 정리해 본다면 3장 2-3절의 권면은 앞의 주제와 큰 맥락에서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3절의 권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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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9-24>(정리하기)

(바울이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1.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란다. 

   - (목적) 그래서 너희의 사정(형편)을 앎으로 안위(격려)를 받으려 한다.(19절)

(디모데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인지 설명함)

  1) 이는 나와 뜻을 같이하여 너희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자가 디모데 밖에 없다.(20절)

   -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21절)

  2) 디모데의 연단(인품)을 너희가 알고 있을 것이다. 

   -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22절)


2.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디모데를 보내려 한다.(23절)

3. 그리고 바울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4절)


(질문하며 묵상하며)

1. 바울은 지금 당장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의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야 할 상황인데 당장 보낼 수 없는 상황인것인지... 암튼 디모데를 당장 보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다. 

  [묵상] 요청을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 어쩔 때는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시기적으로 미루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막연하게 상대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 마음을 읽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은 많다.(권위가 의심받고 냉소적인 시대라) 그래서 마음과 의도까지도 적극적으로 설명해주고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다. 바울도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당장 오케이 해 줄 수 없을 때, 마음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을 표현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오해하든 말든 난 상관없다. 난 떳떳하다 변명하는 것은 어리고 어리석다. 설명해도 오해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오해의 여지를 남겨둘 필요는 없다. 


2. 디모데는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빌립보 교회에도 당장 필요했지만, 바울에게도 필요했던 사람이다. 바울 주변에 있던 사람이 다 디모데 같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일'을 구했다.(21절)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했다. 자기 자신보다 주를 위해 헌신된 자였다.

  [묵상] 디모데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울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도 그를 신뢰했다. 그래서 서로 디모데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디모데는 진실한 사람이었고(19,20절) 디모데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이었다.(21절) 그는 어렸지만 잘 다듬어진 사람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듯 바울과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했다.(22절) 어디 이런 사람없는가!!


3.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도 알수 있다. 아들같은 디모데를 교회를 위해서 할수만 있으면 빨리 보내야 한다는 의식도 있었고 자신도 빌립보 교회에 꼭 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 때문이다.(가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꼭 가고 말겠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묵상] '확신'은 믿음이면도 동시에 '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이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라고 말하는 내용 속에는 '꼭 가고 말겠다. 가고 싶다'는 의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의지'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지가 없이 '확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에서 '확신'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로만 볼 수 없고 그 안에 진실한 '의지'가 담겨있는 것인지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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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2-18>(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 너희가 나 있을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정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한다. 구원의 현재성을 고려할 때 이는 구원을 바라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늘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종말론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함을 말한다. 바울이 없을 때에라도(마치 주인이 잠시 떠났을 때 종의 태도가 그의 구원을 결정하듯) 성도는 늘 주인 앞에 있는 것처럼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복종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의 상태. 모든 것을 행해도 최종 결정권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1) (원리설명)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정리] 한 마다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 성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도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청한다. 

  2) (권면) (그러니)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정리]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싶은 내용이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원망은 투덜거리는 것이고 부당함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을 말한다.(행 6:1, 벧전 4:9) 빌립보 교회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원망이 나왔고, 지지받았을 테니까) 또 시기(논쟁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의견이 나뉘었고, 견해차이로 인하 분파나 파당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 같다. 

   (1)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2)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3) 생명의 말씀을 밝혀

   (4)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5)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정리] 그러나 빌립보 교회 안에서 발생한 원망과 시비가 잘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자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의 순수성과 성도의 순전성이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지만 교회는 그 세상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교회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와 같이 원망과 시비로 가득하다면)

그렇다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운 바울의 수고와 헌신은 모두 헛되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우려한다.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바울의 수고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좀 있지 않겠는가 말하는 것이다.  


2. (바울의 소회)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정리] 만일 빌립보 교회를 위해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후회되거나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가치가 바울에게는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생명이 드려져도 전혀 후회없음을 말한다.(교회를 위한 자신의 죽음조차)

  (권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정리]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교회(빌립보 교회)에 대한 가치를 알아서 교회를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가 생기겠지만 그러나 교회의 가치를 잊지말고 교회 자체를 혐오하거나 교회를 훼손하는 방향으로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것이고(우주적 교회), 바울이 목숨 걸고 세운 교회(지역교회)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며 묵상하기)


1. 구절구절을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각 구절별로 [정리]를 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질문하며 묵상하는 내용이 길 필요는 없을듯 하다. 

2.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원망'과 '시비'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교회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리더십과 일반성도)의 불완전성에 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3. 따라서 '원망'과 '시비' 거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망'과 '시비'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교회가 지상에서는 위험한 교회가 되고 만다.(이단이나 폐쇄적인 공동체) 건강한 교회는 '원망'과 '시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교회를 세워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교회가 원망과 시비를 극복하는 길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강한 인식이다. 종말론적 긴장감이다. '원망'과 '시비'를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원망'과 '시비'를 정리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함을 말한다.(개인의 견해와 취향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시점을 고려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5. 아직까지는 본문의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정도에서만 묵상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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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9-11>(정리하기)

지금 본문을 살피기 전에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논리적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고 그 마음은 자기비움을 통한 낮아짐 곧 죽음에까지 낮아지는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바로 그와 같은 낮아짐의 절정이 담긴 것임을 예로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1-8)

1.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였다.(9절)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절)

  2)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0절)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11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 전개로 이어지는 것인가?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끝이요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하나됨을 이루고, 교회의 하나됨(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이 허물어짐)을 이루었듯이 교회 안의 성도들간의 갈등(시기와 투쟁)도 성도들 상호간의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희생한 사람들의 결말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를 인정하거나 높임이 없이 잊혀지고 무시됨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오히려 지극히 높이셨던 것처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한 성도의 가치를 높이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도 복음 전하는 중에 '매임'을 당하고, 바울을 시기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위임받은 사역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넘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속에서 담긴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허무한 자와 같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죄를 구속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를 의지해서 살아가고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소망의 근거가 되고 메시지가 된다. 

[묵상] 지금은 십자가의 시대다. 기독교적 상황이 우울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내적 소망이 없는 냉소적인 시대다.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적극적인 열심도 아니고, 낭만적인 희망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듯이 성도와 사역자들은 죽음과 절망임을 보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수치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던 자들을 높이사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보이실 것이란 믿음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복음과 함께 수치를 당하고, 지금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낮아지고 녹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살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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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5-8>(정리하기)


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직접적인 권면)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데.(5절)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새번역)(6절)

  2)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8절)

  3)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정리해서 말하면, 바울이 품으라고 요청한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태도인가?)

  1)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나, 동등함을 당연한 것(권리)로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아버지의 권리, 시민의 권리, 대통령의 권리, 목사의 권리, 성도의 권리 등)조차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주장하지 않았다.) 

    [묵상] 요즘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가 있었을까? 민주사회가 되면서 소비자지상주의가 되면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시민, 어리석은 소비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권리주장'의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해 주어야 하는 재판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은 취할 권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장하며 긴장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주장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다. 권리 주장에 자신이 누려야 할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양심이 증언할 것이다.)


  2)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사람이 되셨다. 이와 같은 낮아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 낮아짐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기 위함이고, 낮아짐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의 수준(죄있는 인간의 수준)이 되지 않으셨다.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낮은 방식으로 상대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수준으로 상대하셨다. 이는 그들과 같아지시기 위함이지만 그들을 높이시려는 그 분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자기를 낮추는데 그 낮추는 지점이 '죽음'까지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대속'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사건이다. 죽으심이 없이교회의 하나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묵상] 우리가 성숙한 성인이라면, 성숙한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정도 낮아지는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양보는 있고, 어느 정도의 자기 희생이 있다. 교회는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만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죽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거기서 하나됨의 꽃핀다. 문제는 누구를 죽이느냐다. '상대를 죽여서 하나를 만들 것인가?' 아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예수님은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셨고,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셨다. 


2. 바울의 이와같은 '옳고, 자기희생적 권면'에 저항하고 싶은 논리는 없는가? 

  이쯤되면 우리는 묻는다. 그 말씀이 숭고하긴 하지만 결국 자신만 오해받고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더 악하고 더 부족한 사람이 남아서 그들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선한 자가, 겸손한 자가 희생하고 사라지면 그 교회는 덜 선한 자와 덜 겸손한 자들에 의해서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빌 1장에서 매인 상태에서 받았던 생각들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복음 전하는데 탁월하고 복음의 메시지가 분명한 제가 왜 잡힌 것입니까? 저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메시지가 불분명한 자들은 저렇게 활개치고 있는데... 저를 시기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이 시기에 접니까? 뭔가 실수하신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을텐데, 그는 답을 찾은 것이다.(빌 1장에서) 그러니까 오히려 빌립교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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