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13-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있다면)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행함을 보이라.(13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너는)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14절)


(원리)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임(15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6절)


(원리)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1.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17절)

2.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절)


(정리하기)

1. 정말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을 행함으로 보이라. 지혜와 총명이 가득한 자에게서는 성결과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것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할 태도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2. 반면 이 땅의 지혜는 정욕적인 것이고 귀신의 것이다. 이 땅의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 너희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말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너희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따라 성경,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을 행함으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기와 다툼, 편견과 거짓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땅으로 부터 온 지혜요 마귀적이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는'(15절)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혜라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이 아니다. 지혜라고 불리고 인식되고 있지만 어떤 지혜는 땅에서 나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인지? 땅에서 나온 지혜인지 구분해야 한다. 

2. 본문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행함(선행, 13절), 자랑하지 말라(말, 14절), 화평을 심으라.(18절)이다. 

약 3:1-12은 '말'에 대한 주제로 권면하고 있다. 약 1:19-27 말보다 행함을 강조한다. 약 2:14-26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앞에 언급한 주제를 다시 정리하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의 유의함과 행함의 강조가 시기와 다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되고 오히려 화평의 방향으로 가야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화하고 있다. 


(묵상하기) 

1. 그리스도인은 말보다 행함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한다.(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고,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 그러나 우리는 '지혜'라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도 지혜를 말하면서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낸다.(물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을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긍휼'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3.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견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화평을 추구할 것인가? 싸우지 못하도록 말을 통제할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속마음을 여과없이 다 쏟아내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죠이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 수준을 고려해야한다. 그런 이해없이 완전한 미래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과거의 전통에만 매여서도 안된다. 현재 우리 수준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완급을 조정하고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 화평을 이룰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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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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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6-12>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원리1)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라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정리) 혀를 제어하거나 관리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함을 말한다. 온 몸과 삶을 불태울수 있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리 혀(말)의 문제를 심각하게 집요하게 지적하는가? 교회 안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문제가 심각했던가? 아니면 기독교가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인가? 

(묵상) 지금까자 말과 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영역이다. 처음은 행함이 없고 말만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함부로 쉽게 함으로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두 문제 모두 말이 앞선다는 것이고 말이 삶으로 뒤받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측면에서 기독교 인들이 말을 잘 한다는 이미지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말을 더디해야 한다. 말을 줄여야하고 행동에 뒤 따라야 하며 빨라도 행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원리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7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정리) 사람이 다른 동물과 생물을 다 길들일 수 있으면서도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둘러 스스로를 해롭게 한다는 말로 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질문) 야고보는 혀가 통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두른다고 봄을 혀를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앞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된다. 

(묵상) 본인의 지체로 본인의 의지로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이 있다. 내부의 장기들이 그렇다. 내 몸에 있지만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기관이다. 그러나 손과 발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말의 실수가 많으며 그로 인해 혀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되고 만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말(혀)는 통제하는듯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지체가 된다. 

혀와 말의 문제는 말과 행위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앞에서 행함과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행함과 믿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는데, 말의 문제가 그렇다. 행함이 없이 말만 있을 때 믿음을 보일 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말이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품격)과 괴리된 내용으로 나오게 될 때 그것도 문제가 되고 만다. 정리하면 두가지 문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담고 있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생각 밖의 말을 하는 것(내용이 채워지지 못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경박함 등)을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원리3)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9절)

한 입에서 찬송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0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쓴 물을 내겠느냐?(11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2절)


(정리) 한 입 안에서 서로 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이 나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 안된다.

(질문) 말이 안되는 이야기,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 이런 의미로 야고보는 계속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묵상) 교회는 이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지속되어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현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야고보 사도는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혹독하게 한다. 집요하게 한다. 왜 이런 모순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지 명쾌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 지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감추거나 숨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있음에 한탄하고 지적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외부에서 밝혀내기 전에 교회가 수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서 고치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는 그렇게 했다. 문제가 없는 척하지 말고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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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5>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

-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이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원리)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예시1)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

(예시2) 배를 보라. 사공은 지극히 작은 키로써 큰 배를 광풍 속에서도 그 뜻대로 운행한다.(4절)

(소결론)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정리) 선생되는 것을 신중히 하라. 선생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왜냐하면 선생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혀)은 작은 것 같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자다. 따라서 혀는 크기는 작아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질문)

1. 본문의 논지를 통해 볼 때, 교사(가르치려는 자)가 되려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들로 인해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말의 영향력이 크고, 혀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만의 문제는 아니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교훈이 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 같은 느낌을 준다. 

3.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사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사로 사람을 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묵상)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말 하나로 상대 전체를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오해 하기도 해서 그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오직 나 자신만이 제어할 수 있고 타인에 의해서 작동할 수 없는 것이 혀지만, 혀를 통해 만들어지는 말은 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게다가 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오고, 내 수준만큼만 나오는 것이기에 그 결과물을 단순히 말실수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 신중해야 한다. 충분히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잘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신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말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 말이 공식적인 소통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물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정확한 말의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없다. 심지어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알 수 없기에 답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답을 해야하는지.. 누구를 향해서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교사는 더욱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힘이 크니 소통의 장을 제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말을 하셨는가? 진리를 말하셨고, 본질을 말하셨다.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없이 말씀하셨지만 약한 자들에게는 따듯하게 말씀하셨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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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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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정리]


1.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2. 너희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할 것이다.

3. 난 너희들이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되기 원한다.(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스도파)

  - 바울이 너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느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파당을 지어서도 안된다.

4.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미련함을 통해서(전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다.

  - 너희들을 보라. 너희 중에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셨다. 그러니 자랑할게 없지 않느냐?



[해설]


1.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매우 말과 지식이 넘치는 지역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2. 그런데 그 인간적인 지식의 넘침이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어냈다. 즉 신앙의 파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인상깊게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온 아볼로의 성경강해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직접 사사받은 예루살렘 사도 베드로(게바)가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파'란 분파를 만들어 자신들이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으로 포장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언변도 좋고, 논리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자들이니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나아갔던 것 같다. 마치 인간적인 학파를 따지며, 누가 더 뛰어난가를 겨루는 세상의 학자들처럼 말이다. 


3. 바울은 이들의 말과 지식으로 세운 파당의 집을 허문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가?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니다. 바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다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일 뿐이다. 

교회에 들어올 때 받은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은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집착하는가! 그들이 유명하고 탁월하기 때문인가? 


4. 우리가 논리적 설명에 설득해서 혹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서 <복음과 생명>에 이르게 되었는가? 너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낮은 것으로 높은 것을 폐하시는 분인데, 낮은 우리가 우리의 낮음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자랑할게 없다. 


[묵상]


1.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를 잘 소개하고 전하며 가르치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떤 '인간 스승'이 존재하게 된다. 그 탁월한 스승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 그래서 나는 종종 강단에서 '칼빈'의 입장을 듣고, '박00' 목사님은 뭐라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듣는다.


2. 이와 같은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게 되고, 그 누군가가 탁월하게 잘 소개하는 사람이면 듣는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군가의 이름만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많은 주옥같은 말과 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잘 드러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지, 그 표현 자체의 탁월성만이 남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 인간 스승들을 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절대화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들에게서 배울 것이 아닌가!


3. 결론적으로 내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누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 누구의 권위'를 근거로 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않은가 싶다. 아무리 바른 교리와 정통이라는 토대위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4. 주님이 말씀인 성경이 빠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의 입장(교리)만 남을 때 교회는 누구파, 누구파, 누구파로 나누어지게 되고 만다. 주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사랑과 용납과 한 몸의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5. 오늘날 이 시대는 고린도 지역처럼 말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싶다. 지식과 말의 결여가 신앙을 퇴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과 지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의 '자기 자랑'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 무지를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말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헛되다. 그리스도의 신앙에서는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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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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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3장의 말씀을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불신자나 타종교인들이 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 자신의 삶으로 그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도 부담을 갖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지혜와 통찰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혀)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과 지혜와 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물론 이전까지의 기독교적인 독특한 가르침의 배경 속에서 연속적인 지침을 주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공감이 될만한 내용이기에 거부감이 없으리라 본다.

야고보서 2장에서 보여주었던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논리도, 기독교의 구원론적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부딪힘이 있는 것 같지만, 일반 상직적인 논리로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는 것에서도 야고보서가 일반인들에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와 공감이 되는 본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적 이신칭의의 교리와의 긴장감 때문에, 강단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불신자들 혹은 타교인들을 염두한 설교라면 매우 적절한 본문이 아닌가 싶다.)

그 내용을 보면  

[말의 중요성과 위험성]

오늘 본문은 말을 소재로 하는 권면이다. 특히 선생 된 자로서 말은 매우 중요한데, 말을 그 크기에 비해서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도록 해주는 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사물의 모든 것이 통제가 되어 길들일 수 있지만, 혀 만큼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혀를 통해 말을 해야 하는 일로서 선생의 일을 사모해야 할 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맡겨지기 때문에> 해야 하며 더불어 맡겨져서 그 일을 하더라도 혀를 잘 제어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혀는 온 몸을 더럽힐 수 있으며,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자랑이나 명예와 같은 생각 속에서 남 앞에서 선생이 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 잘한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이유로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목회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청빙>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르심 혹은 교회의 부르심을 통해서,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설교하는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매우 소극적인 측면(내가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이 채워지고, 그것이 들려지기를 요청되는 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측면에서)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혜, 땅의 지혜 하늘의 지혜]

더불어 시기와 질투를 기초로 하여 자기 자랑이나 타인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그런 지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땅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서 온 지혜는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들이다.

시기와 질투를 기초론 한 자기 자랑과 거짓말은 세속적이고 악마적인 것임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내 안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자는 다른 사람 앞에 서지 말아야 하며, 어떤 말을 하는 것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지혜롭다. 말을 삼가해야 한다.

내 안에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가득할 때, 이 때는 우리 안에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같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상태로서 그런 때에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지혜롭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건, 어떤 상황 속에서 이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묵묵부답이 정답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가득해 지면 조심히 입을 열어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과묵한것이 실수를 덜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너무 많으면 제 살을 깎아먹게 된다. 아니 말할 수 없 수 없을 때 조금만 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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