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 죠이선교회의 더 죠이지에 실릴 글입니다. 아직 교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생동감있는 글쓴이의 느낌을 그대로 전합니다. 


나를 부른 땅, 그 땅의 기쁨


글: 권기정(한양 97)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상징하는 노란색 테두리의 네모상자와 죠이를 상징하는 흰 바탕에 빨간색 네모 테두리 그리고 그 속의 빨강색의 한 단어 'JOY'. 이 두 가지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저를 설레게 하는 것들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야생의 펄떡이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대학시절 청춘의 뜨거움을 마음껏 발산했던 죠이가 아마도 동일하게 각인되어서 인 듯합니다. 이 학창시절의 열정이 제가 지금까지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에서 그리고 긴급구호의 재난현장 속에서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 직업은 국제구호개발 활동가입니다. 흔히 긴급구호 활동가 혹은 NGO 활동가라고 불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활 중 죠이에서 훈련과 삶이 저를 이 길로 인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000년 군대에 제대 후 복학하여 그리운 죠이로 제일 처음 달려왔고 그해 여름 한양죠이 내 친구, 후배들과 함께 중국을 횡단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선배님이 사역하시는 오지를 방문하고, 또한 육로를 통하여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까지 다녀오는 단기선교 프로젝트를 준비하였습니다. 죠이 내 많은 선, 후배님들의 도움과 기도로 이 프로젝트를 잘 마무하였습니다. 또한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시립대학생을 통하여 시립대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많은 동부지부 죠이어들의 도움으로 시립대 캠퍼스가 안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2001년 가을이 지나고 있었고 3학년이었던 저에게 삶의 길을 바꾸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9.11테러로 말미암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었습니다.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들은 저에게 ‘꼭 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 왔습니다. 수십 통의 메일을 작성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긴급구호를 하고 있거나 혹은 하려고 하는 단체들에게 보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단체에서 바로 연락이 와 긴급구호팀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키스탄 국경을 통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하였고 전쟁 난민들 도우며 약 9개월 가량 활동하였습니다. 시립대에서의 저희 빈자리는 93학번 선배인 박민경 간사님이 그리고 이후 동생이자 친구인 황선관 간사 그리고 시립대 출신인 정가영 간사로 이어지며 멋진 사역들이 이루어졌습니다.   



 2003년 초여름에 이제 졸업을 준비하는 4학년인 저에게 아프리카 작은 나라인 르완다에서 종족분쟁 이후 이 나라 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동일한 단체에서 받았습니다. 몇 몇 간사님들의 조언과 기도를 통해 과감하게 또 짐을 싸서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과 보건소를 통하여 말라리아 약품을 전달하는 일을 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가운데 제 일생에 가장 감사한 일이 르완다에서 벌어졌습니다. 바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선교단체를 통하여 파송된 아내는 저보다 1년 일찍 르완다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있었고 아프리카에 헌신한 귀한 자매였습니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나오자!’라고 감언이설로 아프리카에 헌신한 이 자매를 데리고 2004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한 학기를 끝내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점인 그 해 겨울, 12월 26일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에 지진해일로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입사 면접을 며칠 앞두고 있었고 곧 아프리카에 헌신한 자매와 결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또 한 번의 긴급구호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죠이 선후배들의 결정은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Go!!"   

  


 긴급구호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하고 NGO에서 정식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조금 늦었지만 르완다에서 만난 ‘운명의 자매’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양가 부모님께 최소한의 효도하기 위하여 1년간 한국에서 신혼집을 마련해서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딱 1년이 되는 시점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NGO 활동가의 역할과 또한 선교사 신분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3년간의 사역이 지나는 시점에 외국인 체류에 관한 법률이 바뀌어 사역지를 예멘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발 전인 2008년 봄에 한국인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예멘이 아닌 이집트로 파견지역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천년이 넘는 기독교인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그 피와 전통을 이어 받은 우리 이집트 직원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잠깐의 은혜의 시간을 뒤로 하고 1년 후 아이티에서 초대형 지진이 발생하여 급하게 이집트에서 아이티로 또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받은 사랑의 힘으로 다시 아이티의 지진 피해자들과 콜레라와 각종 질병에 걸린 어려운 사람들을 열심히 섬길 수 있었습니다. 2011년 12월을 끝으로 아내와 안식년을 갖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했던 시간에서 몇 달 앞선 7월 9일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남수단이 수단에서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 있는 데 안식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아내와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짐을 싸 2012년 1월 남수단으로 향하였고 현재까지 남수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캠퍼스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다양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의 선택은 늘 하나님이 아닌 제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하나님 보다 제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기쁨은 자녀가 무언가 부모를 위해 애쓰며 일하는 것보다 자녀가 자신의 삶을 즐기며 행복해 할 때 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삶의 매 순간을 감사하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제가 기쁘게 선택하고 살아온 삶들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이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죠이에서 삶의 많은 규칙은 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웃 그리고 나’ 바로 이 간단한 JOY Sprit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선배들의 헌신과 눈물이 있어야 캠퍼스 한 곳이 설 수 있는지 저 또한 시립대 죠이 개척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과 눈물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앞으로도 이러한 헌신과 눈물이 지속적으로 흘러 넘쳐 한국과 세상의 곳곳에 기쁨의 죠이 정신이 흐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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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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