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해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마음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자유란,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의 종된 삶이란 무엇인가?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법 아래 사는 삶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 법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이다.(물론 아브라함과 다윗... 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혈통 속에서는 희미하나마 그 빛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고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 말미암은 의로 우리를 이끄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 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교회에 들어와 혼란을 야기시켰던 <다른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더불어 율법적인 행위를 더 해야 온전한 의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종 아래로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을 왜곡되이 받아들인 자들로 <율법적 방종>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육체의 종이 되어 버린 자들인데 바울은 이들에게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권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후자의 견해는 개인적인 견해다.)


그 이후 바울의 논지를 정리하면,(2-4절)



1. 이와 같은 자유의 복음을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2. 네가 만일 할례를 다시 복음 안으로 가져와 의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할례만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 맞다. 즉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전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3. 만약 율법을 다시 가지고 와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할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너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오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의 법에서 떨어짐을 의미한다. 



 - 이와 같은 논리를 통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만약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끊어버리는 것이요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들의 결단이 복음과 관련하여 얼마나 위험한 수용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바울의 촉구로 보인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표현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의의 시작이 일어났으나, 아직 의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구원에도 시작과 완성이 있듯이 우리의 의도 그와 같은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적 차이를 통해서 중간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바울이 말한 소망이란 그저 헛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같은 구원의 완성의 소망을 산소망이라고 표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의를 더욱 진작시키기 위한 어떤 율법적 노력이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는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과는 동떨어진 논리다. 그 율법의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 바울의 이 말은 성도란 윤리를 배반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준 것이라 본다. 


바울이 부정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순수 복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오히려 매우 윤리적인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하여 <할례>와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그와 같은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하다(갈 5: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종된 삶으로 들어간다. 바로 사랑의 종이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묵상]


1.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향방없는,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가 아니다. 율법의 종됨으로부터의 자유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진노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어서 지켜야만 하는 종된 삶이다. 마치 애굽의 종되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으로서 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했던 것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더이상 율법의 논리로 진노에 이르지 않게 되었다는 해방을 선포했다.(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노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의로의 인도(의의 종)였음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이란 방향이 있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죄의 진노에서 구원하여(자유),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종).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순수 복음>의 내용이다. 바울의 <순수 복음>의 조건에 무엇인가를 가미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순수 복음>을 자신의 소욕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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