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해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복음은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의 논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란 말만 떼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 5:1에서 바울의 언급한 '자유'도 마찬가지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해서 '방종'으로 나아갔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는 단순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혹은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법,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법이 드러나면서, 이전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 보니,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 '복음이 말한 자유'를 자기들의 방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오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의 핵심은 교리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4장)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복음의 의미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이론, 3,4장)와 적용(실천, 5,6장)으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듯 하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율법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의 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육체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됨을 바로 이어서 지적한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절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율법 자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고 권면함으로서 오히려 참된 복음은 '율법의 완성,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으로 인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자신의 정욕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인 사람이지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복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순수 복음'이 왜곡될 수 있는 두 가지 변종을 보여준다. 하나는 '순수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행위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허전하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 복음'을 근거로 자기의 욕구(정욕)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모두를 경고한다. '순수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할례)하든지, 아니면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방종)하려고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 5:19-21)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 안에 심각한 논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갈등은 어느 정도의 도를 넘어 서로 '물고 먹는', 즉 죽자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죽자 살자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킬 뻔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형제란 서로 죽여서는 안되는 관계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안되는 것처럼, 11개 지파는 한 개의 지파를 전멸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어야 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워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다툼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각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종이 될 것에 대해 권면하면서 말이다. 



[묵상]


해설을 쓰는 가운데 중간 중간 묵상의 내용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참고자료. 

'자유'란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다양한 사람이 자유를 주창하고 권한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민족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가 있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자유다. 자유 무역, 관세 철폐를 믿는 경제학자가 있다. 중앙 통제가 자유 기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자본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자유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에 처음 선언한 네 가지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다.

  - 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주석, 173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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