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4-9

아닥사스다 왕에게 느헤미야가 요청하고 아닥사스다 왕에 그 요청에 수락해주는 과정을 통해서 느헤미야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셨다>고 해석했다.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는 지금 비상한 능력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을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해석이요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이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현상을 경험하면서도 <운이 좋았다> 혹은 <내가 말을 잘 했다>와 같은 해석을 달기도 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참 좋은 분이다>라는 것으로 평가를 달 수도 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다른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석해 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입술을 다리스고 분위기와 상황을 다스려 주셔서 마치 순풍에 돛단 배처럼 일이 술술 풀리게 해 주셨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중심으로 세상의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해석하는 해석법이라 하겠다. 아마, 함석헌 선생과 같은 분은 <성서로 본 한국 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한국 역사를 해석해 내려고 했던 것이리라 본다.

 

우리도 세상을 해석하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건과 현상을 해석하면서 봐야 한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볼 것인가에 따라(사관에 따라) 해석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섭리(구속사적인 섭리)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역사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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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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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8:4-6

(8: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8: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8: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본문 속에서 볼 수 있는 부자들의 논리]

1. 월삭과 안식일이란 제도를  경제적 수입을 막는 제도라고 여기고 불편해 함.

2.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함.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3. 찌꺼기 밀까지 팔아,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려 함.

결국,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함.

 

[아모스 8:4-6의 틀에서 보는 현 자본주의 사회 속 부자들의 논리란]

 

1. 부자들의 욕심은 그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모두 제거하길 원한다.

   이들의 중심 가치는 경제적 이익 극대화다. 이것에 방해가 되면 적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제도를 약화시키거나 없애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대형슈퍼마켓을 제도적으로 한 달에 두 세번 문을 닫도록 하는 제도란, 이들에게는 반 자본주의적 제도일 것이다. 지금은 법적 장치때문에 지킬 수 밖에 없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제도를 바꾸거나 완화하는 방법으로 아니면 다른 편법의 방법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법을 제정한 사람도 바꾸려고 할 것이다.

2. 이들은 적게 주고 많이 받으려고 한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믿지 못한다.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적게 주고자 한다. 그리고 돈을 지불한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들에게 인권과 복지는 그것을 통해서 더 큰 이익을 얻어낼 것이라는 계산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진정한 인권적 태도와 복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적 생각이다.

3.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까지도 탈탈 털어내어 가져갈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은 한 닢으로 가난한 사람을 사고, 신 한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사는데 까지 갈 것이다. 이런 작은 액수로 자신의 인생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존권에 위협이 되어야 한다.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이 될 때, 사람은 자신을 헐값에 팔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양극화는 더 심해져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질 것이고, 부한 자들의 부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헐값으로 부자가 사용하면, 부자들의 경제는 더욱 부한 상황으로 확대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부가 확대되어 더이상 생존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되는 순간 부자는 더 이상 사람을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부자는 더 이상 부를 확대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이것을 미연에 막으려면 가난한 자들이 부를 축적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사회는 부자의 부를 더욱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가난한 자들이 부의 축적을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자들이 볼 때, 이런 선순환만 반복된다면 그들의 부는 영원할 것이다.

   가난한 자를 없애서도 안되지만,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해서도 안되는 구조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학문적 근거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돈을 중심가치로 놓는 사회)는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된 시대속에서 언제든지 존재해 왔고, 오늘 날에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포장되어 미화되어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쌩얼을 만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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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지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민심을 잡기 위해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금 송아지를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지정한다. 그래서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가 없도록 편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우고, 지켜야 할 절기도 임의대로 바꾼다. 그와 같은 행위를 하나님이 악하게 보셨다.(왕상 12:25-33)

[본문 이야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다에서 벧엘로 보내고 마침 벧엘에서 분향하던 여로보암을 만난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잘못을 지적하고 훗날 유다 왕 중에 요시아라는 왕이 이 제단과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을 심판할 것을 예언하자 여로보암은 손을 펴서 저 놈을 잡으라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여로보암의 편 손은 말라서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된다. 그 바람에 여로보암은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요청해서 낫게 해 달라고 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회복시켜준다. 그 이후 여로보암은 자신의 집에 가서 쉬고 예물을 줄테니 가져가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나님이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했다고 하고는 다시 유다로 이동한다. (여기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벧엘에 거주하고 있던 한 늙은 선지자가 아들을 통해 이 소식을 듣는다.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아 가서는 자기 집으로 와서 떡과 물을 먹으라고 한다. 당연히 왕의 초청도 거절한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한다. 하나님이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는 거짓말을 한다. 자기도 선지자인데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당신을 데리고 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랬다는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이다.(18절)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그런 줄 알고 속은 것이다.

그 노인의 집에서 물을 마시고 떡을 먹고 떠난 하나님의 선지자는 기다리고 있던 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한 사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늙은 선지가가 좇아가 시체를 확인해 보니, 사자가 여전히 거기에 있으면서도 그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기만 했지 먹지도 않았고 그 옆에 나귀를 죽이지도 않았다.(28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사자를 통해 심판하신 것이 분명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시체를 자기 성읍으로 옮겨와 자기의 묘실에 두고 동력자인 선지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나중에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이 사람과 같은 묘실에 자기를 장사하라고 요청한 것을 보면 그 늙은 선지자의 애도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혼란의 내용은 두가지 일것이다.

1. 이 모든 비참한 일이 그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이 늙은 선지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다.
2.  처음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씀대로 했고, 믿을만한 사람의 거짓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한 일이다.

이 혼란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의 억울한 죽음과 늙은 선지자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2. 성경 저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말한 내용이 분명히 <하나님이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1)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그 내용뿐 아니라 그 지침(떡과 물도 마시지 마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 당하게 되는 형벌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 떡과 물을 먹게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사람이 죽게 된 것(우연한 죽음이 아니라, 심판으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사자가 시체를 먹지 않았다는 것과 나귀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가 여로보암에게 한 심판의 예언은 분명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3. 본문의 핵심은 이상하게 보이는 두 선지자의 행동을 통해서 핵심적인 내용을 강화시켜주는 노이즈 마케팅과 같은 효과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의 마지막 구절은 그것을 정확하게 집어준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13:32)
그럼에도 여로보암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은 이 일로 여로바암의 집은 멸망하게 되었다.(13: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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