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정리]


기독교 교육이란,

1. 종교의식이 싹트는 전통과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의도하는 것

2. 무질서하고 감추어진 사건과 환경, 즉 세상의 모든 일과 모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파악하는 눈을 길러주는 것

3. 주어진 기독교 유산을 가능한 한 일찍 항복시켜서 더 높은 경지로의 도전을 시도하는 것


이런 결론은 신학과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부터 나온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교육의 조건>

1.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가르치는 내용)

2. 왜 그것을 가르쳐야 되는가?(교육의 가치)

3.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방법론)

  -> 이번에는 이와 같은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교육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1. 내용으로 당연히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2.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같은 성경을 다루면서도 다르게 가르친다.(해석에 따라)

3.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 실제로 무엇이냐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4. 그래서 결국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은 신학과 손을 잡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을 시행하는 기관이 어떤 신앙관을 가지며 어떠한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예) 성경이 추구하는 것이 사회구원이 먼저냐? 아니면 개인구원이 먼저냐?


  [참고] 오늘날은 교육하면 방법론에 치중해서 마치 방법론이 하나의 가치인 것처럼 말하는데, 방법론은 내용은 아니다. 방법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과 그것을 잘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있다고 저자는 본다.(방법론이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은 세분화된 사회에서 그것으로만 업을 삼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생기게 되는 주장이라는 입장)

  주일 학교에서 반사(교사)에게 중요한 자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열정, 감격.. 이런 것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고 내용이다. 


5. 성경에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 / 구원 = 하나님 나라

  기독교 교육을 단순히 착하게 살자 / 경건에 힘쓰자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에서 꺼내어 거룩케 하시어 영광의 자리로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다. 그것을 어디서 하느냐? 이 세상에서 하신다는 것.


  이것을 사회구원론식으로 설명하면, WCC운동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적인 모순(구조적 죄)에 비중이 더 커진다. 그래서 그것부터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로부터의 해방, 민중신학 등등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폭력에 대해서도 허용함.(목적이 옳으면 방법은 허용된다는 의식을 가짐)


<왜 그것을 가르쳐야 되는가?>(왜 배워야 하는가? _ 동기부여)


1. 아이들에게 왜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가?(동기부여가 무엇인가?)_성공에 대한 보장

2. 기독교 교육의 동기부여는 <교리>로 한다. 교리를 통해서 우리가 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친다.(종말론을 가르쳐야 다가올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된다.)

3. 그런데 문제는 자연인에게는 기독교의 교리라는게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4. 그래서 기독교 교육에는 교육답지 않은 요소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간섭>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교육과 기독교 교육이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 

5. 기독교 교육은 중간에 <성령님의 간섭>이 중심으로 나타나서 교육이라는 개념을 무참하게 밟아 버린다.(세상에서 말하는 교육적인 방법론을 자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림)

6. 바울의 고백(고전 2:1-5/6-8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성령의 간섭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기독교 교육이 일반적인 교육학의 범주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봐야 한다. 

7. 따라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의존하는 것이지, 테크닉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대충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만)

8.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자랑하지도 못하지만, 못한다고도 못하는 것이다.(교사를 하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1. 신 6:4-9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라?의 의미

2. 부모가 그 내용의 중요성을 알아서 말로서 그들에게 전수하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부모가 그 중요성을 아는 대로 삶을 살아감으로 자녀 교육의 샘플이나 모델이 되는 방식으로 전해 주라는 말씀인 것이다. 

3.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살아하는가가 모든 문제에서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기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지런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도, 좌절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교육이다. 

4. 전도란 방법론 중에 최악의 방법론이다.(가장 될 수 없는 방법론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5. 성경은 상식을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사람들이 상식을 넘어서 순종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예)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다.->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길래 

6. 요한복음 13장.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모델로서)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리라. 

7. 핵심적인 기독교 교육 방법론: 주께 항복하고 순종하고 주를 만족하는 것(모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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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 과부의 기도(눅 18장)에 대한 해석

 보통 붙잡고 늘어지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해석하지만,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기도하는데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기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때 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 16장.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가 있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세대를 사는 사람은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대를 사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더라...빛의 자녀들도. 이 세대의 것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해 한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 눅 11장. 

눅 10장의 주기도문을 보충하는 비유다. 강청(부끄러움없는 고집)이란 의미는 요구함에 있어서 당연한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한 친구에게는 자기 것인양 달라고 요구하는 것(예의와 법도를 떠나서)이다. 서로 배려하고 구분하고 하는 것은 이미 관계가 남임을 의미한다. 강청함이란 그런 관계를 전제한 행동이다. 


------------- 정리하자.


1.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성경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가장 근접하다. 

 

  1) 하나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권>이다. 

  2) 이것은 성경의 최고 사상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칼빈주의)

  3)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중요한 것은 그의 백성들이 그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성경 신구약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대주제로 삼고 모든 사건과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진행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유일성, 절대성, 사실성, 이런 것들이 강조되는 것과 함께 그 통치의 대상인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통치를 기쁨으로 수용하고 그들의 소원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는 자로서 고쳐지고 훈련받고 완성되는 것이 동시에 다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알려주고, 그 계획에 우리가 순종하도록 설득하고 납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와 같은 방식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설득시키고 이해시켜서 설복하도록 만드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때가 차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거절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우리를 향해서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무엇인가? '나를 믿어라', '나는 네 편이다'라는 설명 밖에는 할 것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때리거나 더불어 사랑으로 편이 되어 주는 것처럼)


설명해야 하는 데 설명이 안되니까? 사랑하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한다는 것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십자가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억지로 끌고 가고, 개같이 끌고 가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 복받는 자리로까지.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그 이유를 알아서 그의 뜻에 순복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양한 장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장르를 사용해도 상관없다. 목적은 같다. 그러나 장르에 따라 사용하는 칼라가 다르다. 풍경화를 그리면 초록이 많이 들어가고, 인물화를 그리면 초록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묘사함에 있어서 진노로 나타날 수도 있고, 용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것이 상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매를 드는 것으로 나타날 때도 있는 것이다. 색깔과 그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듯이 표현과 내용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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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 인격자의 발언이기 때문에(지,정,의)


1.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표현하시는 분이시다.(흑백이 아닌 칼라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함)

  이 부분을 지성과 의지의 차원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되고 만다.


2.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죄가 없는 욥이나 요셉같은 인물이 고난을 거치도록 하신다.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인간은 그 속이 변하지 않는 이상은 외적으로는 무슨 방법과 조건을 제시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적 변화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요 중생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중생을 결과시키는 작업으로 오시지 더 이상 설득하고 설명하고 잡아끄는 것으로는 오시지 않는다고 본다.


3. 영적인 계시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 중 하나 <비유>

  1) 비유(parable)와 알레고리(allegory)의 차이: 

   (1) 비유는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일상생활에서의 한 장면을 도입하는 것.

예1) 빠른 사람을 <제트기>라고 표현함. 그러나 알레고리는 <제트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함(비싸다)

비유는 1차 개념만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모든 의미를 등장시키는 것이다.(삿 9장의 알레고리)


예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비유를 들어주시는 목적인 무엇인가?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따라서 언급된 세부적인 내용들은 무대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둘것이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파악)

  :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자! 라고 결론 맺으면 올바른 해석이 못된다. 


예3) 씨 뿌리는 비유: 우리도 옥토가 됩시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땅에서 방해를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것이 큰 결실을 얻게 될 것.

 천국이 방해 받을 수 있는 형태의 모습으로 왔으나, 천국은 확장되어 완성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4. 조직 신학을 통한 성경해석

  1) 역사적 흐름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차 광고를 위해서 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전면과 측면)을 중심으로 표여주듯이 하는 신학이다. 어떤 주제를 부각하여 드러내는 신학.


사람들은 처음부터 조직신학적 접근을 했다.(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이 때는 성경구절을 주로 신학에 대한 증거구절로 사용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오면서(성경을 증거구절식으로 가지고 옴) 사람들 사이에 그 구절의 원래의 의미를 추적해 보니까 그것이 그런 뜻이 아니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의 문맥을 중시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성경신학은 문맥을 중시해서 원래의 의미를 추적하는 신학이다. 


사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교조주의적으로 성경을 얼토당토 않게 인용해서 쓴 것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문서가 아니라 편집자에 의해서 (여러문서가)짜집기 된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한 문서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신학이다. 성경이 여러문서를 짜집기 해서 된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서 보면 이런 의도고 이런 뜻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한 신학이다.(단어가 갖는 뜻이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에서는 결국 단어가 갖는 뜻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도록 안되어있다.)


문서설과 비평적인 여러 사조 때문에 성경 신학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대두되어, 20세기에는 매우 인기있는 사조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마가복음 16:15과 같은 곳을 해석하는데는 성경신학도 한계를 가진다.(뱀을 집고 독을 마시는 것) 그래서 최근에는 성경신학적 접근이 선행된 위에 조직신학이 서야 한다는 것이 최근 성경신학의 답이다. 막 16:15은 단순히 문맥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조직신학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시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예) 요 3:16 만인구원설? / 성경의 다른 본문 내 양은 나를 안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


5.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두가지 올무

  1) 성경을 많은 정보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올무


  2) 가난한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올무

예) 북한군에게 국군 2명을 숨겨준 목사 / 거짓말 하지 않음.(문자적으로만 생각 / 거짓말_하나님 편들지 않은 것) / 풍성한 성경신학적 방법의 예_초대 교회 시대에 십자가를 밟고 온 교부(주님의 십자가 말고 강도의 십자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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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_ 계시의 초월적 내용이 인간의 이성에 인식가능하기 위해서는 변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1.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부작용은 계시된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2. 계시의 내용은 초월적이다. 그러나 계시가 드러난 방식은 초자연으로 계시될수도 있고, 자연으로 계시될 수 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계시가 내용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월을 계시 방식의 초월성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비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예) 마리아 -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를 신비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결과적으로 중보자)

  개혁주의는 마리아가 가지는 신앙과 그 자세에 초점을 맞추게 됨


  예)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 그 은사가 어떤 메시지를 가지느냐로 가야 하는데, 은사 자체의 신비 쪽으로만 갔다.(은사가 가지는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그 현상의 신비만을 추구함)

: 고전 12-14장에서 은사에 대한 이야기 / 한 몸이라는 비유 / 불완전한 지금

  - 밤중에 손전등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시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 내가 손전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과 더 가깝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리해서 읽을 것] 113쪽 7줄부터~


3.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은 그 말씀을 단순히 그대로 전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내가 그 말씀에 의해서 항복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어의 수단이나 논리성의 수단 등을 이용하신다.) _ 단순히 제스쳐로 단어 맞추는 게임식 전달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초월성)가 우리의 인식 가능한 형태로 변형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 해석해야 한다.(A를 전달하기 위해서 A'로 왔는데, 이미 이 땅에는 A'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기존의 A'와 하나님이 보여주신 A'는 완전히 같은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다. 기존의 A'이 개념을 빌려서 원래의 A 개념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해석자는 계시된 A'를 시작으로 해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의 내용까지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4. 해석을 하지 않게 되면, 초월이라는 계시된 형식자체를 내용으로 받아 초월주의로 빠지게 되거나 혹은 계시된 것(A')을 원래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A')와 동일시 해 버리게 되고 만다(자연주의).

  예)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을 <부활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5. 성경의 특징: 구약은 사건적이고 신약은 설명적이다. 

  영화를 예로 든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막이 있는 편이 낫다. 화면만으로는 그 뜻을 명확하게 알아내기 어렵다.(법정영화)_그래서 신약이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영상이 없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스케일이다. 구약은 그와 같은 스케일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구약은 사건과 스케일을 통해서 단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을 한다. 

예) 죄의 값은 사망이다. - 문둥병으로 죽는다, 지진으로 죽는다.... 그 죽음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십자가 사건, 우상숭배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

  구약의 사건들을 통해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단어들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내용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6. 국어를 공부하는 방식

  1) 초등학교 때에는 문자를 가르친다. 단어를 정확하게 아는 것에 주안점을 맞춘다. 

  2) 중학교 국어교육: 그 단어들을 엮어서 문장을 만들어 문장 안에 사상을 담기 시작한다. 글자가 연결되어 사상을 담는 그릇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우리 말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사상을 배운다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사상교육>이 되는 것이다.  

  3)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개념과 이유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

일상: 네 마음대로 해!    집에 들어오지 마!!

성경: 내가 이 백성을 다 진멸해 버리겠다. 그러다가 다음 장에선 내 백성 치는 자는 죽는 줄 알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따라서 성경의 내용들을 일차적으로 그 단어가 성경상에 어떤 뜻을 가지는가를 알아야 제대로 해석되는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많은 사건들을 알아야 된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그 단어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7. 성경에 기록된 제일 중요한 계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1) 그런데 우리는 실존주의 영향으로 우리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 주제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했다.


8. 근본주의란?

근본주의라는 것은 성경이 초월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계시했을 때(A'), 그 내용(A)은 꼭 그 모습(A')만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

  1) 정당한 근본주의: 자유주의를 대항 할 때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 예수의 유일성,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부활 등.


      곤란한 근본주의(율법주의적 근본주의)


  2) 이혼 증서: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보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해서 이혼하면 적법하다.

그러나 이혼에 합당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절차를 두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함. 더 나아가 부부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함.


  3) 침례에 대해서.

어느게 맞느냐 하면, 물속에 집어 넣는 게 옳다. 그러면 왜 물을 뿌리냐? 그것은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4) 유아세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마땅함.

  5)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1) 6일 창조 / 6세대 창조(날: 욤 에 대한 해석문제) 

  6)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는 의미지, 간음한 자는 돌로쳐서 죽여도 좋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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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내용]

로마 가톨릭은 세상을 초월과 자연으로 나누고, 자연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배제시킴으로서 자연은 하나님과 독립된 영역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신론과 자연신론이 나오게 되었다. 


[본론]


1. 종교개혁은 당시 자연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다. 

  1) 기독교적인 것이 그 내용을 초자연으로만 품는다면, 자연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2) 가톨릭이 신적인 영역을 초자연으로 제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게 됨.(자연,인생)


2.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1) 초월과 자연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은혜 아닌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

   (1) 로마 가톨릭은 초월만이 신적인 것을 함유할 수 있다고 봤고, 자연은 함유할 수 없다고 봤다. 

   (2) 개혁주의는 초자연도 신적인 내용을 함유할 수 있고, 자연도 신적인 내용을 함유할 수 있다고 봤다. 


  2)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이해

   (1) 우리는 특별한 방식(초월적)으로 계시한 것을 특별계시, 일반적인 방식(자연적)으로 계시한 것을 일반계시라고 이해한다. 

   (2)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시 19편)

   (3) 로마 가톨릭은 초월과 자연으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나누었지만, 종교 개혁자들은 특별 계시가 자연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을 <은혜>로 봤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특별계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4) 성경은 특별계시고, 자연은 일반계시는 아니다. 그 계시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오느냐의 문제로 규정해야 한다.

   (5) 아담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은혜>가 적용될 때는 특별계시가 되고, 그렇지 않는 것은 자연계시가 되는 것이다. 


3. 세대주의의 문제

  1) 세대주의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세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

  2)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됨(구약은 율법, 신약은 은혜)

  3) 이런 의식은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반율법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은혜 만능 주의)

  4) 구약도 은혜다. 왜? 죄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으니까 은혜다. 

  5)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이미 은혜요 특별계시인 것이다 


4. 사단의 전략

  1) 예전에는 <초월>이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게 했다. 

  2) 이제는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 공격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은 선과 의로 가는 싸움아니냐? 꼭 십자가로 가야 할 필요가 있느냐? (종교 다원주의, 혼합주의 등 죄의 문제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간다)

  3) 그래서 기독교의 적은 도덕이요 철학입니다.(내용의 싸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인본주의와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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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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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은총론


[정리]

이성은 납득과 설명을 요구하고, 계시는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의 싸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권위는 힘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다른 이야기]


그런데 그 권위를 내용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초월이란 형식으로 권위를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신앙의 내용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에게 납득을 못시키니까... 초월을 입증함으로서 증명하려는 방식으로 가게 된다.(즉, 기적과 같은 방식으로 증명하고 싶어진다는 것)


1. 기독교적 권위를 초월성으로 이해한 곳이 바로 가톨릭(로만 카톨릭)이다. 

  1) 로마 가톨릭은 세계를 초월과 자연의 대립되는 두 영역으로 보았다.(이원론)

  2) 로마 가톨릭의 인간론: 

  인간은 원래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창조되었다. (중립적인 존재) 그런 상태에서 그것이 선을 좇아갈 수도 있고, 더러운 욕망을 좇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선한 쪽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덧붙여진 은사>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이 덧붙여진 은사가 파괴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타락 이후의 인간은 덧붙여진 은사가 없는 중성적 입장에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완전하게 선을 행하면 천상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어떤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신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시여해 주는 곳은 교회고, 그 시여의 방편은 교회의 성례라는 것이다. 


   참고] 연옥: 가장 선하게 살다가 죽으면 가는 곳(초월적 은혜를 배제하고)

          펠라기안주의: 로마 가톨릭은 펠라기안니즘에 많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대속이 아닌 모범)


  3)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가 발생하게 된 과정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이 전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초자연이 신적 영역이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이란 영역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축소되게 된다.(소극적) 그래서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초자연과 자연이 대립되는 개념이 되어 버림(구분->대립) 더 나아가서 자연 속에서는 초월이 없다고 본다.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빼 버림. 자연은 자연의 손에 넘겨지고, 인간도 자연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초월에 귀의해야 했다.(교회에 귀속됨)


  4)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기가 자연 속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됨. 자연의 참된 가치를 놓치게 된다.(자연 세계에 대한 가치) 자연보다 초월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지어 종교재판이라는 것까지 생기게 되었다. 종교 재판에서 항변하는 방법으로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초월적인 방식으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함)


2. 이와 같은 기독교의 초월주의로 말미암은 부작용

  1) 난관과 고난을 <죄>의 문제로 귀결시키려는 경향, 초월주의적 성향... 회개하자, 기도하자라는 답변으로 간다.

  2) 난관을 만났을 때, 죄의 문제로 인한 것도 있지만(요나), 극복해야 하는 과정으로 겪는 경우도 많다.(욥, 요셉)

  3) 죄값을 받는다? 벌을 받아 행실을 고친다?(징계)

    예] 죄의 결과들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평생 죄를 짓지 않도록 경각심이 일어나게 한다. 


3. 초월과 자연으로 세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문제


  1) 이신론: 자연에 법칙을 심어 놓고 멀리 물러가 계신 하나님 / 

  2) 자연주의: 자연신론_ 자연은  자연의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다스린다 

 - 성경 속에서 언급되는 기적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한 법칙을 만들어 놓고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섭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를 얻는 방식도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얻게 된다고 생각(캐는 만큼 가져간다고 생각함)

  3) 초월을 얻기 위해서 자연주의적 방식을 도입한다.

    예] 방언을 받기 위해(초월의 내용) 할렐루야를 천번해라.(자연주의법 발상)

         대입에 합격하기 위해서 100일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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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정리]



[오늘의 내용]


1. 이성은 감각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감각될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요구한다.

  1) 이성이 중심이된 사고는 그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영역의 내용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설명주장)

  2) 그런데 성경은 보통 설명보다도 복종을 요구한다.(계시_권위를 주장)

   : 그래서 각 특성상 이성과 계시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성은 설명을 통해 이해를 시켜주길 원하고, 계시는 권위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오늘의 주제는 그런 측면에서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우리의 일반적 개념: 권위 <-> 자유 /  자유의지 <-> 하나님의 절대주권

    : 자유란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형성됨.(권위에 대한 나쁜 경험때문임)

  2) 그러나 긍정적인 권위가 있다. 

   (1) 부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주사를 맞음, 학교에 가야함..)

   (2) 어떤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결정권을 갖는 힘이다. 

  3)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란(소극적인 자유)

   (1) 소극적 개념의 자유, 즉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2) 소극적 개념의 자유는 결국 어떤 권위라는 개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 되고 만다. 

   (3) 독재를 깨고 자유를 누리자고 했는데, 독재를 깨고나면 자유도 함께 없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예) 수업하지 말고 놀아요~ 그래 그러자 그러면 심심해요.(소극적 거부만 있는 것)

   (4) 이런 소극적인 자유(권위를 거부하는)는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권위자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다. 


  4) 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란 권위를 행사하는 쪽의 힘에 의해서 권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독재성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권위란 그 권위가 갖는 진리 됨과 힘이, 그것을 요구받아 순종해야 되는 대상의 만족에 의해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란 자신을 힘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위이다. 

   (1) 그러나 권위는 상대방에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 상대방은 그것을 독재라고 느끼게 된다.

   (2)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를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투표로 할 수도 없다. 다만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날 죽이려면 죽여라. 있는 건 있는 거다'라고 우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듣는다. 왜냐하면 한 끝차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중재안을 거절하면 편협하다함)


  5)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가?

  우리는 보통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 정신 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권위 자체에 대한 반발을 위해 인간의 죄성과 유치한 기분파적인 반발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했는가 하면, 자유를 기껏 권위를 반대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권위의 부정에 온 힘을 다 기울임)


  6)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free for)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당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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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정리]
1. 신학의 원리는 계시만이어야 한다. 

2. 그런데 신학에 이성이 개입되는 이유는, 계시는 이성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계시가 이성에 감광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내용이 우리의 이성에 포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

4.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포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우를 범한다.

5.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미 그 초월된 내용을 이성에 인식시키기 위해 어떤 지혜와 능력을 포함하고 나타나는 것이기에 이성이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번주 내용]

1. 이성의 특징인 합리화

  1) 초월된 내용이 초월의 방식으로 오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인식 가능한 가시화(합리화)가 필요하다.

    예)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이해하려면, 추상 명사는 가시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기 때문에 어렵다.

     - 우리는 사랑을 말로 배웠습니까? 동영상으로 배웠습니까? 

- 사랑은 추울 때 부모가 자식에게 옷을 벗어주는 장면(사랑=옷을 벗어 주는 것 혹은 남을 위한 것?)


        설리반이 헬렌 켈러를 가르칠 때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이 추상명사. 왜 개념의 가시화된 형태 조차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2. 이성의 합리성이 불러 일으키는 오해들

  1) 배(이성)가 옥수수(초월적인 내용을 인식가능한 형태로 구체화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됨

  2) 세상 사람들 중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 기독교는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보기 때문에

   (1) 그러나 실상 기독교는 착함이나 선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인데,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니까 그것을 좇아서 우리도 선을 추구한다. 

   (3) 그럼, 하나님을 닯자(본받자)라고만 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까, 선하다 의롭다 이렇게 규정을 하게 되고 그것을 좇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선과 의를 절대 가치로 선과 의를 좇는다.(옷을 벗어주는게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된 이해인 것과 마찬가지로)

   (4) 그렇게 하고는 자신들이 신학에서 선하다와 의롭다는 가치를 발견했다고(자기가 생산했다고) 생각한다. 


3. 신신학의 문제점

  이성은 운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의 내용이 수송되기 위해 어떤 형태를 취한 것을 '이런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되는데, " 아, 이거구나"라고 자연계에서 우리가 경험한 어떤 비슷한 것으로 내용물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 바로 신신학이다. 그래서 신신학은 결정적으로 신학의 원리를 계시가 아니라 이성으로 본다. 

 

  예1) 왜 기독교가 가장 우수한 종교인가? 고상한 인류의 가치를 가장 그를 듯하게 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1) 인간에게 선을 행하라, 의를 해하라, 긍휼을 베풀어라, 이웃을 사랑해라... 를 가르치는데 탁월하다. 

     (2) 보통 인간은 중요한 가치를 늦게서야 깨닫게 되는데, 기독교는 중요한 가치를 일찌감치 습득할 수 있도록 했다. 

     (3) 기독교의 상벌 개념은 유치하지 않고 실재같이 해놨다는 것.. 그만큼 정교화된 종교라는 것이다. 


  예2)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1) 주께서 실재로 살아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난 것과 방불한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2) 제자들이 변화되어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주님의 살아나심과 같은 것이 아닌가!라고 이해함.


4. 하나님의 초월적인 내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시 된다.(그래서 해석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옷을 벗어 입혀준 형태(인식 가능한 모습)와 그 형태 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해석해 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형식으로도 나타나지만, 매를 들어 때리는 것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서 계시는 해석되어야 한다.  


5. 정리해서 말하면

  1) 계시적 사고(계시의존 사색, 개방 체계)

계시된 내용을 일단 내용으로 감수를 해서, 이성의 방법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며 인식을 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해 가는데 상호 모순 되거나 충돌해 보여도 내용을 가감하지 않으며 성경이 가라는 떼까지 가고 가지 말라고 하는데까지 안 가는 것을 말한다. 

  2) 이성적 사고(폐쇄성 체계)

이성적 사고는 이성이 갖는 합리성을 위해서라면 내용을 가감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이 계시된 내용을 딴 것으로 대치할 수 있고, 계시된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다. 이성이 제단할 권한이 있다.(왜 이성이 생산해 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6.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성에게 주도권을 주려고 한다. 

  예 1) 하나님이 계실 것이냐? 아니면 안 계실 것이냐? -> 있을지도 모른다.(중간이 아니라 없다쪽에 있는 것)

  예 2) 우주 기원의 대표적 이론>  진화론과 창조론 (창조론이라는 경험은 아예 없고, 진화론적 경험 밖에 없다.)

  예 3) 고대 서구 사상,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은 모든 사실은 논증이 가능하다.(과학주의적 정신)

  예 4)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예 5) 중세시대 기독교인의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에 접목 시킨, 스콜라 철학> 진리와 절대를 객관적으로 증명함.

        : 신앙인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결론이 하나님과 절대진리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전혀 다른 길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신이 없다는 것으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세 시대가 와해되고 근대와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신신학이 대두되는 것이다.(약도는 자기 중심으로 그리면, 찾아 오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수 있다.)


7. 서구 신학의 문제(미국 신학의 흐름)

  1) 미국은 신앙을 위해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신학을 위해서 대학을 만들었다. 

  2) 그런데 신학을 시키려고 보니까 기초 학문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교양학부를 만들게 되었다. 

  3) 먼저 학문을 시키고, 신학으로 신앙의 깊이를 풍성하게 하려고 신학교를 만들었는데 학문의 방법이 과학이었다. 

  4) 그런데 학문의 방법인 과학이 신학의 계시된 내용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5) 그래서 계시된 내용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같은 개념의 세상적인 내용으로 메꾸기(재해석) 시작한다. 

    예) 하바드 -> 예일 -> 프린스톤 -> 웨스트민스터


8. 이성에 역할과 한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너무 근본주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자유주의자처럼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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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신학이란 이성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이성이 동원되는 것은 이성이 신학의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이성을 통해서만 신적 계시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계시의 내용을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형태(합리적으로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내신다.(그래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기에) 그러나 사람의 이성은 보통 그것을 체계화하려는 경향, 폐쇄적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하시면서도 초월적인 내용들을 보이심(시공간적 초월, 기적과 같은)으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닫힌 시스템으로가 아니라, 열린 시스템으로 하도록 하신다. 



[내용 정리]


1. 지난시간: 계시란 하나님의 자기 진열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시고 주도권을 갖는 것이 계시다. 


  예 1) 하박국의 질문: 왜 의인이 불의한 자들에게 횡포를 당하는데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의 답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의 답변을 주시지 않는다)

  예 2) 시편 96편. 하나님에 대한 증명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축을 다룬 내용

           * 작자가 불분명: 선지자나 제사장 혹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썼다면,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되어 성경으로 구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편은 저자가 누군지 모르는데,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그 내용이 정경에 포함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초월적이기 형태의 모습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성경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포함된 것이다.(간적적이고 완곡한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신다.)


2. 오늘 본론: 신학이 하나님의 계시로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까지 포함되어야 하는가? 


  1) 신학의 방법론은 이성이 아니라, 계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확인했다. 

  2) 이성은 분명히 신학의 주제와 내용에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와 이성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것은 계시는 그 첫번째 목적이 초월적인 것을 인간에게 알리려는 것인데,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과 기능이 이성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말은 인간은 하나의 내용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합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합리적인 방식으로 계시되어야 만 인간은 인식하게 된다는 것)


   (1) 교리와 사상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폐쇄된 체계를 이해해 보자.

   (2) 교리는 우리가 신앙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체계화하고 지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상은 한 개인이 자기가 믿는 것을 자기의 지적체계, 자기의 이해의 어떤 인식체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데 서로 같을 수도 있고, 서로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3) 개인의 신앙 체계인 사상은 그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더욱 부각시키는 개인적인 경험과 신앙의 칼라에 따라서 재편집된 모양을 가진다. (진보적이다 혹은 보수적이다)

      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느냐에 따라 사상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4) 그래서 인간이 가지는 정신 체계는 언제나 단원론적이요, 페쇄된 체계가 되기 쉽다.(닫힌 시스템)

      예]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본 것을 더욱 확대하는 경향으로 해석하려고 한다.(경험과 환경)

      예]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해석하려고 할 때, 폐쇄성 체계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만 성경 전체를 확대 해석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만을 이야기하면 칼빈주의가 된다. 서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한 부분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5) 인간은 합리석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예) 돈을 잃어 버렸을 경우

     예) 방언 문제, 구원의 확신 문제_단원론적인 체계로만 가지고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들.


3. 왜 자꾸 계시의 문제에 이성이 끼어들게 되는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1) 이성이 없이는 계시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마치 내용인것처럼 끼어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내용인 것처럼 자신을 주장하게 된다. 

  2) 하나님은 초월적인 어떤 내용을 인간에게 알게 하시려 할 때, 이성이라는 틀로 이해 가능한 형식을 취하셔서 전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의 틀에 맞춰서 보여 주셨기 때문에, 이성의 틀에서 벗어난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내용이 아니라고 역으로 주장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3) 그래서 자신의 이성적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될 것이 아니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할 수없다. 우리가 받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상과 내용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해해야 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야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예] 모션으로 단어 맞추기 게임과는 다르다.


  4)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해야만 한다.(이성을 통하여 계시된 내용을 가공하는 것이 필연적인데, 잘 해야한다.) 그리고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이 가지는 한계, 합리성과 폐쇄성과 단원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5) 개방성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을 모두 인정)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_ <계시의존 사색>이라고 말한다. 


4. 인간의 이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1) 순수이성비판

  2) 성경은 활자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글자가 아닌 우리의 문자로. 우리의 활자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 내야 한다. 이것이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가운데서 이루어 져야 한다 

  3) 우리의 이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펼쳐 보이심으로 자신이 초월자라는 것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성경 기적은 두 가지 유형을 갖는다. 하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 죽은 자를 살리심, 바다 위를 걸으심, 홍해를 가르심, 문둥병을 고치심(공간 초월) // 예언(시간 초월))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개방 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 

  4)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 졌다.그러나 그 내용들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기적이 점철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로 오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는 것으로 오신다. 

  5) 이성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면서, 그것을 가공(제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5. 신학을 하다보면 가장 무서운 것

  1) 근본주의: 해석을 금하는 것. 이성은 운반만 해라. 나타난 대로만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편협하게 됨) A로 나타난 것은 A로만 나타나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함. 


  2) 자유주의: 이성이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판단해서 선택권을 가지려고 함. 이성에 합하지 않은 내용들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받아들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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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에 대한 내용을 파워포인트로 정리한 내용



평신도 신학입문1-계시.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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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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