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은 1882년 3월 24일 출판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다. 이 성경은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와 한국인 조력자의 도움으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번역에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그리스도를 <키리스토>로, 세례를 <밥팀네>로 표기했다. 계속해서 로스는 단권 번역을 지속했는데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완역되었다. 이 성경이 순 한글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인데, 보통 <로스역 성경>이라고 불리고 있다.

2. 일본에서도 한글 성경으로의 번역이 진행되었는데,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은 이수정이다. 그는 지금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통리외무아문의 관리였다. 그는 일본에서 예수를 믿고 1883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이 번역한 첫 책은 마가복음인데, 부피가 작고 내용이 간결했기 때문에 이 책부터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되었다. 초판은 1천 부를 인쇄했는데, 그 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마가복음 번역본이었다.

  * 선교사가 들어와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본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을 선교사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선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한다.(개인 작성)

  이수정은 하나님 칭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는데, 한문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상제>로, 일본어 성경에서는 <가미>로 번역했으나, 그는 <천주>로 번역했다. <천주>는 천주교도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성경 번역이 계속 되었는데...신약 공인된 번역성경이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 번역 사업에 전념하도록 배려하였고 결국 이 세사람의 노고로 성경 수정작업이 추진되어 1906년에는 성경 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 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 1938년 <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 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 성경이었다.  

 

4. 구약의 번역과 더불어 좀 더 완전한 번역 성경을 위한 필요성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1938년 구약과 신약이 합본된 <성경개역>이 출판되었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수정을 거친 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1956년 다시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일부 수정했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는데, 이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5. 최초로 순수 한국 학자들로 구성된 번역진에 의해서 번역된, 신약전서 새번역.

 해방이후 성경의 새로운 번역에 대한 관심이 일자, 대한성서공회는 신약성경의 새번역을 시도했다. 대본으로는 네슬 25판이 사용되었는데, 1967년 12월 15일에 신약이 완역되어 <신약전서 새번역>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성경의 번역진은 진보적인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한국 교회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강단용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 한국인 학자들로 구성된 번역진에 의해 새로운 신약성경이 역간된 일은 경하할 일이었다.

6. 신구교가의 공동번역 성서의 출간

성서공회가 신약 번역을 완료하고 구약번역을 서두르고 있는 중에 신구교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기로 합의하고 1968년 2월 15일 신구교 <성경번역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공동번역을 시작했다.

이 공동번역은 1977년 신약에 이어 구약까지 완역되어 그 해 부활절을 기해 <성서>라는 이름에 부제로 <공동번역>이라는 표제를 붙인 소위 공동번역 성서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되었다.

이 성경은 키텔의 <비브리카 헤브라이카> 곧 BHK를 기초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국 보수교회는 이 성경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요구를 수용하여 <하나님> 표기를 포기하고, <하느님> 표기를 취했다. 보수교회는 이 성경은 범신론적인 번역이라고 혹평했다. 결국 이 성경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강단용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이 성경을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공동번역 성경을 일부 수정하거나 북한식 용어로 바꾸어 출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현대어 성경(1985년), 쉬운 성경(2001년), 우리말 성경(2004년)

성서 공회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사에서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번역하여서 출판한 것인데 원문 대조는 아니고, 미국에서 출간한 <살아있는 성경>에 크게 의존 되어 있는 번역이다. 처음부터 개역한글판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조 성경으로 출간한 것이다.

아가페 출판사에서는 국내 최초로 원문 마소라 본문인 아셰르의 본을 직역한 <쉬운 성경>을 출판했다.(2001년)

2004년에는 남북 통일 시대를 대비해 11년에 걸쳐 번역한 <우리말 성경>(두란노)이 출간되었다.

8. 개역개정판의 발행

1938년 개정된 이래 재개정되지 않은 개역한글판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 번역 상에서도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새로운 번역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한글개역성경을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 되었다.

조직을 구성(1993년)하고 구약은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BHS>를, 신약은 <네슬 알란트>판을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1998년 8월 31일에 <성경전서 개역개정>이 발행되었다.

이 성경에서는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고치고, 문법이나 어법이 맞지 않는 경우를 수정하였고, 어색한 말을 다듬는 등 국어학적인 개정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용어도 수정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 대한성서공회가 최근 교단별 성경활용 현황을 분석한 결과 85-90퍼센트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9. 성경공회의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의 출판

1990년 보수적인 교회들은 대한성서공회의 정책과 신학적 입장, 특히 성경 번역과 관련해 불만이 야기되었다. 그러던 중 대한성서공회가 <표준 새번역>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 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개역 성경의 보급과 출판을 중단하려고 했을 때 표준새번역을 받아들일 수 없는 교회는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새로운 번역작업에 착수한다.

보수적인 107개 교단은 <한국성경공회>를 창립하면서 1952년판 개역 성경을 대본으로 부분적인 수정을 하여 1997년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성경>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한성서공회가 인격적인 침해라고 문제를 제기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한국성경공회는 1999년 6월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성경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약은 BHS(2nd ed., 1983)의 마소라 본문이, 신약의 경우 Novum Testamensia Greece와 Greek New Testament가 함께 사용되었다. 8년 6개월의 작업끝에 207년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영문으로는 <The Korean Truthful Version>이라 명명했다.

  -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부록: 성경이 우리 손에 들리기까지(글: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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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씀은 종이 책의 형태로 2500년 이상 전달되어 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 말씀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한 필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스타워즈>도 <타이타닉>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영화였다. 이 영화의 영어 번역문은 GNB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의 창립자 빌 브라이트가 프로듀서이자 연예계 기업가인 존 헤이맨을 만나서 서로 손을 잡고 누가복음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었다.(본래는 성경 전체를 활동사진으로 만드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500명의 학자들이 역사적인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참여했고,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촬영도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1979년에 상영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에 CCC의 한 부서인 <예수> 영화 프로젝트가 그것을 다른 언어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천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라칼팍어(우즈베키스탄), 파르시어(이란), 쇼나어(짐바브웨), 다니어(인도네시아), 쉬피보-코니보어(페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인 수십 억의 사람들이 시청한 바 있고, "남녀노소를 다 합하여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 모두 2억 2,500만도 넘는다"고 한다.

....(일화중에 하나)

한 선교사 부부가 페루의 어떤 마을에서 그 영화를 보여주려고 가던 도중에 테러리스트들에게 가로막혀 영사기와 필름을 빼앗겼다. 나중에 이들 중 한 명이 그 부부를 찾아서 말해주기를, 테러리스트들이 무척 지루해 그 필름을 일곱 차례나 본 뒤에 그 자신을 비롯한 몇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영화야 말로 역사상 가장 널리 유통된 성경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p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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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성경공부를 장려했기 때문에 1900년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일부를 이미 50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했던 터였다.(p209)

1900년에 이미 50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이 이루어졌다니... 교통과 통신 그리고 장비의 부족함에도 이런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을 그들의 말로 읽게 해야 한다는 열정(복음과 성경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경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복음의 열정...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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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제 이름은 메리 존스예요. 혹시 판매할 성경이 있나요?"

 

메리 존스는 열여섯 살 된 웨일스의 농촌 여자아이였다. 네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살아남기 위해 엄마와 함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덟 살 때 그리스도인이 된 메리는 스스로 성경 이야기를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메리, 우리에게 성경을 살 만한 돈이 없단다."하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메리는 성경을 꼭 사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웃에게 얻은 닭이 낳은 계란을 팔고, 사람들의 옷을 세탁해주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6년 동안 그 십대 소녀는 조금씩 돈을 모아 마침내 웨일스어 성경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을 구입하려면 4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발라에 사는 토머스 찰스 목사에게까지 가야 했다.

"참 먼 거리인 건 알지만 하나님께서 저와 동행하실 거예요."라고 메리가 말하고는 신발을 닳지 않게 하려고 맨발로 그 머나먼 길을 걸어갔다.

"미안하구나, 내가 갖고 있던 마지막 성경은 며칠 전에 누군가에게 팔기로 약속했단다." 찰스 목사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메리의 눈물을 목격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 즉 그 사람은 조금 더 기다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주후 1800년)

-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p208.

 

꼭 사고 싶은 것을 위해서 오랫동안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메리의 손에 마침내 '성경'이 들려졌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결국 찰스 목사는 <전도지 선교회>에서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목사들에게 나누었고 그로 인해서 <영국 및 해외 성성공회>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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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올린 글에서 중세시대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에 대해서 글을 옮긴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위클리프와 틴데일을 역사적으로 이렇게 평가한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다는 사실보다는 남들에게 영향을 미친 점이 더 높이 평가되는데 비해, 틴데일은 대부분의 성경을 자기 손으로 직접 번역했던 인물이다. KJV는 여러 면에서 틴데일의 번역판을 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틴데일이 태어날 때(1494년)만 해도 일찍이 1408년에 만든 헌법(위클리프의 번역판에 대한 대책으로 비공인된 영어 성경을 일체 읽어서는 안된다는 금지령)이 여전히 실효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서 틴데일은 새로운 성경 번역에 착수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주교에게 승인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변호하고 있었던 만큼 그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그래서 틴데일은 1524년에 독일에 이주해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에서 그는 비텐베르크에 살고 있는 루터를 만났고 신양성경 번역을 완수하게 되었다.

 

1526년 초, 많은 신약성경이 '상품을 넣은 상자, 술통, 옷 짐짝, 밀가루와 옥수수 부대 등에 숨겨진 채' 잉글랜드로 밀반입되었다. 헨리는 틴데일의 번역에 반대했고, 교회 공직자들은 성경을 구입해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기도 했다. 이런 반대가 오히려 판매를 도와주었고 틴데일이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에서 5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유럽을 방문하던 어느 주교가 한 상인과 접촉해 틴데일 신약성경을 모두 사겠다고 나섰다. 속셈은 그것을 모두 잉글랜드로 가져가서 런던에서 불태울 생각이었다. 한 친구가 틴데일에게 그렇게 하면 빚을 모두 갚고 최근에 수정한 부분을 포함시켜 더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 되었다. 주교는 그 책들을 모두 확보했고, 패킹햄(상인)은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고, 틴데일은 돈을 벌었다' 이제 틴데일은 구약성경에 관심을 돌려서 1530년에는 모세오경의 영어번역판을 선보였고, 1531년에는 요나서를 출판했다.

 

틴데일은 결국 훗날 배신자에 의해서 잡혀 화형에 처해지는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젊은 날 고백했던 말처럼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쟁기를 모든 소년이 성직자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이라는 고백처럼 살다가 갔다. 그는 마지각 옥중에서도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과 히브리어 사전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마지막 화형을 받는 현장에서도 '주님,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윌리엄 틴데일은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탁월한 번역가였다. 그의 번역에 나오는 많은 어구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성경번역의 역사, p154-157 정리)

1. 성경의 번역본들은 그 시대의 언어(일상언어)를 표준화하고 고급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틴데일의 영어 성경도, 또한 성경의 한글 번역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2.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위험하다고 본 한 주교(당시의 가톨릭)의 번역된 성경을 제거하고자 한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영어 번역본을 활자화할 수 있는 자금을 대주고, 영어로 된 구약 성경 번역을 위한 자금줄이 되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3.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번역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자명한 답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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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학자들은 어느 텍스트가 '최상'인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즉, 편집인이 생각하기에 어느 텍스트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를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1년 독일 학자인 칼 라흐만은 일부 사본은 수용하고 일분 사본은 부정하는 가운데 최초로 신약성경의 '비평 텍스트'를 출판했다. 몇 년 뒤에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발견한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

어느 신약성경 텍스트가 최상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1901년에 프레데릭 케이언이 한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서로 경쟁을 벌이는 텍스트 유형 간의 차이점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리의 문제는 어느 텍스트가 정확한지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스테파누스의 텍스트에 표현된 만큼이나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텍스트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에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현재 과거에 킹 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킹 제임스 버전이 대체로 믿을만하다는 점을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 ... 이런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복음서 기사나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41.

참고로, 현존하는 신약성경의 사본은 5,500개가 넘는다.

신약 말고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본문은 마조레트(각 단어와 글자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보존했고, 교황 다마수스는 기존의 옛 라틴어 텍스트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롬에게 정확한 라틴어 성경 번역판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히브리어 구약과 라틴어 성경은 정확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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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 선교회는 중세 시대 '종교개혁의 샛별'로 인정된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위클리프는 당시 라틴어 성경(벌게이트)만 공인되던 시대에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320년대 잉글랜드 북부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과 자연과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탁월한 학생이자 연사였던 그는 교사가 되었다가 나중에 설교자가 되었고, 결국에는 애국자요 개혁가로서 정치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권력과 풍요로움에 의해 타락하게 된 경위를 생각할 수록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팸플릿과 책자를 쓰기 시작했다.

위클리프는 중세 교회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우는 순회 설교자들을 파송했다. 이들은 길고 검은 예복을 입고 맨발로 둘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과 경건한 삶과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전하곤 했다. 교회는 롤라드를 이단으로 천명하고 화형을 가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보기를 원했고, 라틴어 신양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다.(이미 당시 프랑스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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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는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1384년 12월 31일에 죽었다. 1415년에 열린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포고를 내렸고, 그로부터 13년 후에는 교황 마르틴 5세의 명령에 따라 위클리프의 뼈를 파내 불에 태우고 그 재를 잉글랜드의 스위프트 강에 뿌리는 일이 있었다.

1408년에는 켄터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의 이름으로 이런 포고문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존 위클리프의 시대나 그 후에 만든 그런 책이나 팸플릿이나 책자를 읽어서도 안된다 ... 그럴 경우에는 전술한 번역판이 감독의 승인을 받기까지는 더 큰 출교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영어는 야만적인 언어라서 문법적인 구조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아 성경의 심오하고 미묘한 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1408년에는 위클리프 번역판을 읽으면 출교를 당한다는 포고문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위클리프 성경책들'의 사본이나 일부가 지금도 수백 권이나 남아 있다. 이 책들은 규모와 모양과 체제가 각양각색이다.

....

위클리프 성경에 속한 책들이 모두 정교한 것은 아니다. 한 칼럼에다 텍스트를 기록한 경우도 많은데, 이는 위클리프파에 속한 순회 설교자들이 휴대하기 쉽게 만든 것들이다. 가령, 미국 성서공회의 도서관에 있는 한 사본은 12.5cm x 18.4cm 정도이다. 포켓용으로 만든 이런 책에는 요한복음,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서신, 유다서, 계시록의 1-4장과 1/2장밖에 들어 있지 않다. ...

14세기의 한 역사가는 성경을 통속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을 경멸하면서 위클리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성직자와 학자들에게 주신 복음서를 번역하여... 이로 말미암아 성경이 저속하게 되었고, 유식하고 지성적인 성직자보다 오히려 글을 읽을 줄 아는 평신도 남녀가 더 접근하기 쉽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주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돼지의 발밑에 짓밟히고 말았다."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스톤 저, 포이에마, p109~111,122)

[생각]

1. 성경은 그 형태(번역)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언어의 체계가 정교함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최대한 번역하여 누구나가 성경의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 번역 사역의 중요성은 선교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2. 당시 영어는 라틴어에 비해서는 미개한 언어였다.

미개하다는 것은 그 표현에 있어서 정교하고 정확하지 못하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번역되어야 하며, 그런 제한성을 가지고 번역된 성경을 통해서라도 복음은 분명하게 증거된다. 복음은 명확하고 단순하여 믿는 모든 자에게 생명을 준다.

작은 오류를 두려워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루터도 독일어로 번역할 때 발생할 문제를 알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정확하게 들을 사람이 더 많다고 확신했기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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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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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는 성경의 사본을 아름답게 꾸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서체와 그림을 통해 사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보존되어 있는 사본 중 가장 아름다운 서체라고 평가 받고 있는 것은 <켈즈 사본>이라고 합니다.

 

신앙심이 예술의 경지에 까지 이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켈즈 사본은 가장 아름다운 중세의 예술품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의 한 부분이고, 그 예술은 복음서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의 그림에 나온 페이지는 마태복음 24장 19-24절이다. 각 절의 첫 글자를 문양모양으로 그린 것이다.(잘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켈즈 사본은 라틴어로 된 네 복음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주후 800년경에 스코트랜드의 서해안에 위치한 아이오나 섬에 있는, 성 콜럼바가 세운 한 수도원에서 만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수도사들이 켈즈에 있는 아일랜드 사원으로 도망가서 그 책을 완성했다. 1006년에 두달 동안 도둑을 맞은 적이 있어고, 그 때 표지와 몇 페이지를 잃게 되었으며, 1661년에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 기증되어 지금까지 진열되어 있다.

켈즈 사본의 필체는 최상급에 속하고 그 장식 또한 훌륭하기 그지없다.

"거의 각 페이지마다 다른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가 등장한다... 훌륭한 장인기술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라. 그리하면 예술의 전당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당신은 그토록 복작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디자인, 수많은 장식 매듭과 고리, 너무도 생생하고 참신한 색채를 파악하게 되어 그것을 인간이 아닌 천사의 작품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2세기 웨일즈의 성직자요 역사가였던 제럴드가 했던 표현인데, 아마 켈즈 사본을 묘사한 대목으로 보인다.

이 사본의 장신은 너무도 복잡다단해서 확대경을 써야 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는 물론 확대경이 없던 시대였지만 말이다. 각 복음서의 첫 마디는 너무도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동방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미적인 면이 실용적인 면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06-108.

 

[개인적인 생각들]

1. 종교심을 동기로한 것들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장인으로서의 기술과 더불어 종교적 열정과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창조물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종교심을 읽어버린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과연 역사에 남을 예술과 문화를 생산해 낼지 의심이 간다.

2. 극도의 종교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시킨다. 켈즈 사본은 최고의 서체로 인정받는다. 너무 정성을 들이고 꾸민 글씨는 본래의 텍스트를 거의 읽을 수 없도록 만들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열정과 능력이 본래의 텍스트를 감출수 있다는 것을.

  중세는 기독교 사회고, 그것은 과도하게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으로 흐른 사회였다. 성경의 내용을 과도하게 지키려고 하다보니, 평민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흘렀다. 그래서 교회 안으로 성경 이야기를 담은 성화가 텍스트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과도한 열심이 텍스트를 감춰버린 것이다.

3.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예술로 승화되고, 반면 과도한 종교적 열심과 재능은 텍스트를 훼손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예술을 배격하여 텍스트에만 집착하면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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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스톤 저, 포이에마, p83-84.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성경 번역판은 바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5세기 초에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백성의 언어' 혹은 '대중적인 판' 이란 뜻)라고 불리는 번역판이다. 이는 로마 교회가 1500년도 넘게 사용했던 공식 번역판으로서 중세는 물론이고 그후에도 한동안 예술과 문화와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546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는 오직 '벌게이트'만을 진정한 라틴어 성경 텍스트로 선언했다. 당시는 이미 라틴어가 더 이상 일상어로 사용되지 않던 시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AD 4세기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에 속한 27권이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 여러 언어의 형태로 교회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었다. 라틴어 사본만 해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번역의 문체와 질이 각양각색이었으며, 필사될 때에 텍스트가 변형되기도 했다. 그래서 382년에 이르러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옛 라틴어 번역판들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수스가 384년에 죽은 뒤에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모두 완수했다.

그는 서문에서 외경은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정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성경 번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외경이 훗날에 만든 벌게이트 번역판들에는 포함되었지만, 이것들은 제롬의 작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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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지 400년이 지난 AD 846년, 그는 대머리 왕 찰스에게 바친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성경 첫 페이지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맨 위의 패널은 제롬이 로마에서 베들레헴으로 항해하여 작품에 대한 대가를 받는 장면이다. 중간 패널은 그가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추종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그들이 성경의 사본을 만드는 장면이다. 맨 아래 패널은 제롬이 라틴어 성경을 수도사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이 그것을 교회로 가져가는 장면이다. 찰스 왕에게 바친 비비안 성경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위의 책, p72,73. 책에 있는 그림을 핸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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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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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도 성경을 정확하게 필사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규율을 개발했다고 하네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와 같은 엄격성 때문에 그래도 성경이 잘 전수될 수 있었으니 이 분들의 공로도 인정해야 할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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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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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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