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시는 하나님


글: 김수억 


작년 10월 4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는 것이 함정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가족들이나 기억할 뿐이죠. 결혼 이후에는 장모님과 생일이 같은 관계로 그 마져도 뒤로 밀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작년 10월 4일(음력) 당일 제 생일 처음 축하해 것은 다름아닌 보험사에서 보내준 문자였습니다. 출근길에 그 문자를 받고 어김없이 제 날짜에 문자를 보내는 기업의 고객관리에 놀랐고, 그 문제가 그 날 처음받은 생일 축하라는 것에 마음이 서운해졌습니다. 아침에 딸아이가 일어나서 등교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나왔지만, 딸 아이는 제가 출근할 때까지 '아빠 생일 축하해'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그것이 서운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딸아이가 제게 대해서 서운하게 했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하면서 화가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오늘부터 딸 아이에게 잘해주지 말아야지. 간식은 커녕 꼭 필요한 이야기 아니면 하지도 말아야지. 아빠로서 최소한의 것만을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냉전은 몇 일을 갔죠.


그런데 제일 화가나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딸아이의 태도에 화가나서 냉전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딸 아이는 정작 내가 화가 심하게 났다는 것을 모르는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먼저 사과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 된 것이지요. 나는 너무 힘든데, 딸아이는 별로 힘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힘든데 말이죠...


또 하나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이 관계를 해결하고 싶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딸 아이가 했기 때문에 딸아이가 먼저 사과만 하면 아빠인 나는 언제든지 용서해 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딸 아이는 자신의 죄를 잘 모릅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를 못 느끼겠죠. 오히려 아빠가 왜 저러나 그러고 있겠죠. 내가 먼저 풀고 싶어도 풀수가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이죠. 이 관계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아빠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고, 상처입힌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마음이 상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냉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답답할 모릇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알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기꺼이 용납하고 화해하실 생각이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모릅니다. 회복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관계의 틀어짐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이 고스란이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먼저 손을 뻣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낮고 천한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화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뻣으신 그 손을 우리가 잡기만 한다면 관계는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바로 복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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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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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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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의 내용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가 쉽게 가지는 오해 중에 하나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이 5분 안에 설명이 가능한 ‘소책자’ 전도지 안에 소개된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은 복음의 내용이란 대단하다. 그 웅장한 내용을 5분 안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것이기도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이 필요했고, 수천년간의 역사가 필요하기도 했다는 것에 있어서도 그렇다.


복음이란 짧게는 5분 안으로 그 내용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배우고 알아가도 다 이해하고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요로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전 15:1)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전에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전 15:1 ...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그것은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고린도교회가 복음을 굳게 지키어서 헛된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5:2) 이 말은 복음의 내용은 한 두 번 전해서 될만큼 그리 간단한 내용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서 볼 때, 이미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구두로 전하여 세운 교회들이지만 다시 편지를 써서 그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복음적 대답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전하는 사람의 불완전함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충분히 오해될 수 있고 왜곡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복음은 언제든지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부분에서부터 다시 보충 설명을 해 가면서 복음의 내용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단순한 내용의 전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복음의 내용을 토대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복음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시키기도 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도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적으로 살도록 촉구하고 자극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러하듯이 복음은 그 내용의 전달에서 뿐 아니라 그 복음의 효과를 위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즉 청중의 상황에 따라서 생각보다 다양한 옷을 입으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동적인 복음은 하나의 ‘정형화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복음의 굵직한 내용에 대해서는 변형될 수 없으나 듣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게 되기도 한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


신학교에서 배우는 ‘구원론’ 책을 보면, 구원의 여정에 대해서 나오고 그 과정 중에 ‘회개’라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알아서 그 자리에서 돌이키게 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회개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아직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예수님도 천국으로의 초대 전에 ‘회개’를 요청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필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대상을 향해서 ‘회개’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셨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은 오히려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회개’에 대한 요청없이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회개했다는 언급과 표현이 없음에도 주님은 그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고 만져주셨다. 그리고 구원을 선포해 주셨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과정에 대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거나 요청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회개’가 없는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란 내가 공개적으로 말로 고백해야 하는 형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란 그 사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자와 병든자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 이미 ‘회개’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추가적으로 ‘회개’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삶의 형편을 통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라는 공개적인 요청없이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론에서 말하는 공개적인 ‘회개’란 절차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들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시고 이들을 구원하셨을 뿐, ‘회개’를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혹은 자기 의와 자랑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다르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서는 언제든지 ‘회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로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처럼 복음의 내용이란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전해야 할 내용까지도 변경이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복음의 내용이란, 간단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큰 맥락에 있어서는 같겠지만,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중간의 어떤 한 두 부분들은 그 때 그 때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곧 복음이 매우 개별적이고 복잡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를 통해서 본 복음(막 10:17-22)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었다.(달려와 꿇어 앉아 예수님께 물었던 것을 보면 사뭇 진지한 고민 속에서 예수를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테니 가서 계명을 지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그 부자는 그와 같은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자는 그것 외에 혹은 그것 이상으로 ‘영생’을 더욱 확고하게 할만한 것이 무엇이 더 있는지 알고싶은 열심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진정성을 보셨는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생을 위한 교훈을 하나 주신다. 그것은 ‘그 부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요청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의 진 면목이 드러났다. 그는 재산이 많은 고로 재물을 다 팔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고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뜻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한채 고민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신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시고 간절히 들어오기를 원하시나(벧후 3:9),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재산이 많은 부자라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컸던 사람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기울일수는 있어도,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불편하겠지만, 그 사람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들춰내신다. 이 부자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 부자를 향해서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를 요청하지 않으셨다.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 부자가 돌이켜야 할 회심은 도덕적 부분에서의 깨끗함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설사 이 부자가 회개를 한다고 고백한다고 한들 그 회개는 표면적 회개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자가 정말 회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물질)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회개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매우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이다. 그는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도 충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경건해지길 원했고, 더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는 종교적인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율법과 종교성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이었다면, 이 사람은 구원에 충분히 이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마 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착각에 빠져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이 부자의 선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 복음은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종교적 열심이 확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더불어 복음은 우리를 시민으로 부르는 것이지, 천국행 티켓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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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2. 복음을 듣고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이다.


입장권(티켓)을 가졌다는 것이란, 제한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부터 발부된 ‘입장권’이나 ‘초대장’을 받은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천국의 출입문을 자유롭게 입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티켓을 받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서 옳은 확신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자격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격에 맞는 삶을 살기에 힘쓴다면 천국 행 티켓을 얻었다는 개념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만약, 이제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자격)은 확보했으니, 이후로 나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천국에는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전자의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티켓을 남발함으로서 그 공연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우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개념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다시, 마 22:1-13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비유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보았으시 생략하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금은 길거리에서 모두(악한 자나 선한 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해서 불러모았다. 이들은 새롭게 초대장을 가지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들어와서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자리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고 <예복>을 입지 아니함으로 그 잔치에서 쫓아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롬 13:14, 갈 3:2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예식에 맞는 옷>일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갑작스러운 임금의 초대를 받아 왔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예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이다. 즉 그 공간과 상황에 맞는 질서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은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왔고, 왕이 준비한 풍요를 누리기는 했지만 그 공간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잔치를 원했지만, 질서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임금은 그와 같은 자는 초대되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마침내 선별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입장권만으로는 마지막까지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누릴 수 없음을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들


마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씨’를 ‘천국 말씀’(마 13:19)이라고 하심으로 이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는 씨가 떨어진 4가지 땅의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크게 나누면 둘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는 천국 말씀인 씨가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하는 땅(길 가)과 천국 말씀이 뭔가 효과를 내고 있는 땅으로 구분된다.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한 땅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복음을 들었으나 완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반면 효과를 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라고 해서 그 효과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깊지 못해,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버렸다.(돌 밭) 또 어떤 성도는 잘 자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좋은 땅)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교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교회 밖의 완악한 자도 아니고, 교회 안의 좋은 땅에 속한 자도 아닐 것이다. 마태는 ‘돌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극복함으로 ‘천국 말씀’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서 네가 좋은 밭임을 증명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왕의 잔치에 들어왔느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그 안에서 증명해 낼 때, 그 자리에 머물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념의 확장, 점(點)에서 선(線)으로.


롬 5장에 보면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신 것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받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특징이란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전과 그 이후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의 한 시점에 구원이 왔고 모든 사람은 구원 전과 구원 후라는 두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티켓’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티켓이 있어야 한다. 티켓이 있으면 관람할 수 있으나 티켓이 없으면 관람할 수 없다. 티켓은 그 유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구원 개념과 유사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을 티켓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생기게 된 오해도 있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범법자인지 탈세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티켓만 있으면 아무 질문없이 그를 통과시켜 입장시킨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을 티켓으로 얻은 사람이라면(과거의 고백을 통해)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조건과 제약을 달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시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입장했다가도 끝까지 남아있지 못하는 경우 즉 ‘필터링’하는 시간의 과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얻은 구원이 중간에 잃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입장’만으로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몇 몇 본문을 통해서 말했듯이 잔치에 입장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대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단순히 단회적인 의미를 가진 ‘티켓’으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시간을 통과하는 검증 과정을 통해서 알곡임이 더욱 분명해지든지 아니면 가라지로 판명되든지 확인해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 22장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졌다. 그래서 길거리에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선별해 냄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아무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는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허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아무나’라고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장권에서 시민권으로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다시 나가야 한다. 놀이공원이 폐장하게 되면 자유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퇴장해야 한다.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기간이 끝나고, 비자기간이 끝나면 나와야 한다. 왜?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입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에 영원히 살 수 없다. 오직 시민권을 가진 시민만이 그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빌 3:20)


그렇다면 누구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인가? 

입장권에는 어떤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 입장권으로는 보고싶은 것, 놀곳 싶은 것을 즐기다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민권에는 책임이 부여된다. 그것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함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진지한 서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귀화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귀화하고 싶다고 모든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귀화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기준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최소한 귀화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준수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맹세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은 부족하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고 하는 책임있는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책임있는 서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입장권을 가지고 잠시 즐기가 가는 사람, 여권과 비자를 받아 잠시 다녀가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복>은 그 상황과 그 공간에 맞는 질서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사람은 혼인 잔치가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유익과 풍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잔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과 공간 속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질서인 <예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아니라 입장권으로만 들어온 그 사람은 결국 그 잔치의 공간에서 퇴장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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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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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0과. 우리가 구원과 복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


1.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구원이 그 사람에게 확인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치는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중생)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시간을 거쳐서 확인되어지는(그래서 끝까지 구원에 이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음을 수 있음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 22:1-13 천국 비유


마 22장 1-13절의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2)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임금의 말과 행동을 잘 살핌으로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지는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3)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한 대상들이 종들을 모욕하고 왕을 능멸한 것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래서 원래 청함을 받은 자는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4) 그러자 임금은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혼인잔치는 금세 손님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 우리가 아는 복음은 보통 여기까지다. 유대인들이 거절했기에 원래 초대받지 못한 우리들에게까지 기회가 열렸다. 이방인인 우리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인에게까지 기회가 열린 것, 이 상태가 우리가 알고있는 복음과 일치한다. 

 5)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금은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을 살피고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선별해서 잔치 밖으로 내보낸다. 


임금의 마지막 행동이 성도인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은 혼인잔치(천국)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10절에서 끝나지 않고 11-13절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이 이 내용에까지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이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흔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의 이야기는 의외로 적지 않다. 특히 마태복음에 많은데, 마 7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마 7:21에는 예수님께서 ‘나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구원받은 성도일 것이라는 확신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성도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대단한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마 7:26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신앙이라는 번듯한 집을 지었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집도 제대로 된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재한 사건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시간’을 통한 과정이 필요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고, 그것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


우리가 잘 알 듯 마 13장에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기 위한 여러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마 13:24-30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것과 쌍둥이 비유로 알려진 ‘그물 비유’(마 13:47-50)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으니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펴봄으로서 천국의 특성을 알 수 있다.

 

 1) 그 주인은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2) 그런데 이 주인의 원수가 주인과 종들 몰래 그 밭에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

 3) 그런데 그것을 시간이 한 참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결실할 때가 되어서)

 4) 종들은 주인에게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을까요?하고 주인의 뜻을 물었다. 

 5)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하고 오히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명한다. 그 때가서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기 위해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즉, 천국은 지금 당장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서 심판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말은 심판 날까지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도록 두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천국의 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곡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중에는 가라지도 함께 공존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마치 알곡인양 천국의 밭에서 함께 자란다.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알곡’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 13:47-50에 언급되고 있는 ‘그물 비유’도 마찬가지다. 


 1)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든 그물과 같다.

 2) 우선 그 그물 가득히 물고기를 잡고, 물가로 끌어 낸다.

 3) 그물을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한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잡아 올리지 않는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그물로 잡아 올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잡아 올린다. 즉, 그물(천국) 안에 있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못된 것도 그물에 잡힌다. 그러나 그 못된 것까지 그릇에 담겨져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분류되어 버려진다. 즉,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이 세상에서 끌어올린다. 마치 가라지까지도 천국의 밭에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특정 시간을 거쳐 분별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그 프로세스를 통해서 마지막에 선별된 자만이 최종합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얻은 구원이 확실한가’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만약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롬 8:24)이기에 미래적인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근거한 확신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은 얻은 것이 아니기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도 실체가 없는 헛된 확신에 불과하다. 위에서도 살펴 봤듯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이들의 확신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에게 구원이 없음을 선언한다.(마 7:23)


따라서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은 지금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전제 될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이제 새로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자.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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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글: 김수억 간사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많은 비유의 많은 비중을 '천국'이라는 주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쉽게 '천국은 ... 와 같으니'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은 상식일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아닌 마가 복음서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와 조금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비교, 마 4:17 / 막 1:15)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봐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글자의 차이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국'이라고 할 때, 성도들의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가 '이 곳'이 아닌 '저기 어딘가'로 규정되기 쉽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천국'의 반대말은 '이 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면 그 의미는 약간 달라진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하늘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다. 이곳일수도 있고, 저곳일 수도 있다. 우리 안 일수도 있고, 우리 밖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이냐?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와 다스림으로 운영되는 곳인가로 읽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런 이해가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 주인(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상한 행동(왜냐하면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천국 비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행동은 오후 5시(십일시)까지 아무 일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아 1시간이라도 일했다는 것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포도원 주인의 호출이 없이는 하루를 공친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하루 해가 지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포두원 주인은 그 사람을 불러 들였다. 


왜 이 사람은 오후 5시까지 놀고만 있었는가?(마 20:6) 이 사람들은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0:7)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변명에 귀기울이지는 않다. 인력은 언제나 넘치니까. 어쩌면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었지만 고용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체격이 외소해서 노동 효율이 적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인상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암튼, 오후 5시가 되도록 이들은 부름을 받지 못함으로 소외 되었다. 이는 이 사람이 이 사회에 무능하며 무가치한 존재 즉 잉여에 불과하다는 무언의 싸인이였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 말처럼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정말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아 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가장이 어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포도원 주인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사람을 포도원 주인인 천국은 불러들인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20:7)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는지 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그들만을 위해 오신것처럼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예수가 복음(자기와 같이 버려진 존재를 담아주셨기에)인 것처럼,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된다. 왜?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오후 5시까지 놀고 있는 잉여들에게 자기의 포도원에는 들어 올 수 없다는 신호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처지를 알자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포도원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일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신을 부른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인은 다른 일꾼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삯은 은혜다.(롬 4:4,5)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고 본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모순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공감되는 항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일꾼으로 생각하는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하나님에게 불합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불평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이 세상에서는 '잉여'로 판명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간이역 2.0 / 2014. 2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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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의 또다른 단언적 명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다. 이 표현은 보통 <전도>할 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다. 성도가 복음 전하는 행위가 물론 부끄러워서는 아니되겠으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좀 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기질과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이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지리산의 천왕봉 정상을 1시간 만에 오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으나, 정상 근처도 못가보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때, 이것을 부끄럽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그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준공하기까지 족할 것인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계산이 없이 덤벼들었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는 자가 다 비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28-30)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했으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시작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만다. 


또한 우리가 의지한 것이 우리가 목표한 곳까지 온전하게 이르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입시학원에서 월 천 만원씩 내면 실력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보장하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하자. 그 만큼 그 학원의 노하우와 강사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하겠다. 학부모는 학원비가 부담스럽지만 자녀를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해서 학원을 등록시키고 그 학원에서 지도하는대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류가 아니라 이류대학에 입하게 된 것이다. 학원의 노하우와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나, 그 자녀의 수준이 너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학원을 믿고 월 천만원씩을 들여 공부시켰으나, 부모의 기대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 학원을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자녀를 맡긴 부모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나를 의지했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부끄럽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대(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의지했다. 율법을 따르고 의지하면 반드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말았다. 율법을 의지하며 쫓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어서 중간에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전 인생을 걸고 율법을 쫓아 살아왔던 바리새인들 조차도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끝에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3장)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의지한 삶 조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고자하는 그 복음은 어떤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절) 그것이 지금 바울이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함으로 자신의 확신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율법>이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믿음/은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기대를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갈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의지할 것인가? 이 땅의 교육과 학원 시스템을 의지할 것인가? 나의 직장을 의지할 것인가? 은행에 맡겨진 돈을 의지할 것인가? 부동산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의지할 것인가? 


나라마져 부도가 나고 파산에 이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땅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표류하며 살아갈 것인가? 과연 그것은 가능할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는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복음> 말고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을 담고 있길래,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음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조금씩 다루어 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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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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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선교사의 짧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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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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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되어 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은 수 일을 견디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던 중 지나가던 배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자신을 구해준 선장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을 구원해준 선장은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 종이 고기 잡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음식도 풍요롭지 않았다. 육지에 데려다 달라고 몇 차례 요청을 해보았지만, 알았다고만 할 뿐 육지로 갈 의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선장이 죽어가던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기에 적극적인 항변을 하지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두 해는 그렇게 참고 견디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 때 차라리 그대로 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생명보다는 그 때의 죽음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것은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가난한 구원을 살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해 본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구원은 이와 같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 감격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또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곳 저곳에서 봉사하고 헌신한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결국 조금씩 감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섬기고 있는 일들이 감사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쉽게 그 짐을 벗지 도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의 빚>을 졌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셨는데... 게다가 위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그 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대체해서 살려주셨는데... 그것을 경험한 내가 어찌... 그러나 이전과 같은 감격이 점점 소멸되어져 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간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께 빚졌다는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힘들고 메마르지만 이 길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다수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상태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가난한 신앙 생활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아니,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고,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내가 볼때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재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결혼 10년차, 20년차된 부부가 부부간의 사랑을 더욱 곤고히 하기 위한 방법이 그 옛날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다시 보는 것 말고 없다면,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 동안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결혼 생활의 지극히 짧은 이벤트와 사건인데, 그것만을 결혼 생활의 내용으로 채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실로 가나한 부부관계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도 마찬가지라 본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매우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하고, 또 경험되도록 요청하는 신앙의 주제는 <회심>과 <중생>과 같은 결정적 이벤트들이다. 이와 같은 것이 복음의 한 요소이기는 하나,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은 좀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화해, 회복, 양자됨, 성화, 연합 등과 같이 단회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와 과정을 다루고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구원의 풍요로운 내용들이 드러나고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즉, 여기에 구원의 풍요와 구원의 충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중요하게 다루어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일부, 특히 단회적 사건(물론 임팩트가 큰 경험들이지만)을 구원 내용의 전부인양 인식하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가난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들춰보는 것으로 옛 사랑을 회상하고, 그 회상의 힘으로 현재의 결혼 생활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때 가난한 결혼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큰 경험> 하나를 반복적으로 우려내는 것으로 신앙의 긴 여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참으로 가난한 복음으로 사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절박하게 전하려고 한, 편지의 첫 줄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_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도였기 때문에_대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 나는 위에 설명한 긴 논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연상되는 단어와 개념은 십자가와 피, 죽음 그리고 대속과 같은 자극적인 사건들과 개념들이다. 이 모든 사건과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모두 삼켜 버리고 말 우려가 있는 것이다.(이것은 우리 인식의 연약함에서 오는 문제다. 마치 최근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이슈가 국정원 개혁과 같은 다른 중요한 이슈를 모두 덮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것만이 복음에서 너무 부각될 때, 복음은 자칫 단순화되어 성도의 신앙을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는 로마서 첫 구절에 <하나님의 복음>이란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포괄적인 개념들을 다룬다. <예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조차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고 하신, 그 분의 방법(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시면서)였음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다.(롬 5:8) 성경의 많은 부분은 복음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시어 그것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분을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전과 후에 이루셨고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큰 계획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사용할 때 말하고자 한 복음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 평생 살면서 옛날의 경험을 우려먹으면서 사는 신앙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롭게 알아가고 그 순간에만 예비된 복음을 경험하며 날마다 더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도록 예비하신 그 복음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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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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