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정리]


[부부와 결혼 문제에 대한 답변 형식]

1. 정식으로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두라.(결혼하라) 결혼은 서로에 대한 구속(4절)과 의무를 전제로 하지만,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한다.

  1) 혹 분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기도하기 위해서만 가능하다. 절제하지 못함을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라. 바울은 자신과 같이 혼자 있기를 추천하지만, 누구나 그럴수는 없으니 자기 은사를 따라서 하라.


2. 가능하면 현재 있는대로 살라.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과부라면 굳이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러나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하라. 결혼한 사람들은 나뉘기를 바라지 말라. 서로 버리거나 갈라서지 말라. 

  1) 지속적인 결혼유지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거룩하게 되어지는가이다.(14절) 거룩하여 지는 과정에서 갈라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하기를 원하시지 다툼속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15절) 아내들아, 네가 남편을 구원할지.. 남편들아, 네가 아내를 구원할지 누가 알겠는가?


3.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네 상황을 받아들이라.

  1) 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2) 네가 종일때 부름을 받았느냐? 주 안에서는 종도 자유자요, 자유자도 주 안에서 종이다. 너는 세상에서는 종일지라도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4. 각각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과 함께 지내라.(24절. 17절, 20절)


5. 결혼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임박한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라.

  1) 아내에게 매인 자는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아내에게 놓인 자는 아내를 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법 안에서 장가를 가든 안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가를 간 사람에게 육신의 고난이 더 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이 땅의 외형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니(31절)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라. 어떤 것이든 있다고 너무 즐거워할 필요도 없고, 없다고 불행해 할 필요도 없다. 

  3) 그런데 장가가고 시집간 사람들은 결국 자기 남편과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힘쓰는 것만은 사실.

  4) 결혼은 하면 잘 하는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더 잘하는 것이다.(38절) 남편이 죽어 재혼을 해도 좋지만 바울 생각에는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생각 정리]


1. 결혼 혹은 이혼 문제가 큰 이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미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이미 결혼한 가정은 신앙이 없는 남편 혹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결혼할 배우자를 찾는 것이 매우 
까다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로 인해서 갈등이 발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로 힘들어 하는 청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과 상관없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울을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결혼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이는 혹 결혼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니면 신앙으로 인해 남편 혹은 아내와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결혼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에 결혼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억지로 깰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믿지 않던 배우자가 믿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박영선 목사의 말씀처럼, 텍스트를 가진 자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혼이라는 상황, 신앙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상황, 결혼할 수 없음 등과 같은 상황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텍스트를 가진 자로서 컨텍스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 7:18-19)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 결혼 문제뿐 아니라 할례를 받았느냐 안받았는냐? 종이냐 자유자냐에 대한 논의도 함께 있었다.


이 논의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한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족하다는 것이다. 종과 자유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면 자유인이 되도록 하라고 하지만, 종이라고 해서 신앙 생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종이 되어서도 우리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무할례자가 되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혁명을 말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컨텍스트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텍스트(복음)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제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컨텍스트는 점점 나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컨텍스트가 완전한 시대는 오지 않는다.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전 7:21-23)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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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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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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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교회 안에서 판단해야 할 사람들]


1.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한 자를 용납하는 문제가 있었다.(이 음행의 정도가 심했다.) 음행도 큰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음행한 자를 통한히 여겨 좇아내지 않고, 교만하여 이들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은것.


2. 이와 같은 자들은 가만히 두면 누룩처럼 퍼져감으로 제거해야 마땅하다. 이들을 제거함으로 교회는 살아나게 된다.(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받게 해야 한다. 5절) / 유월절에 누룩을 제거하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먹듯 이와 같은 자들은 교회에서 내어 보내야 한다.


3.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명령한 말씀의 의미.

  1)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며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2) 그 때의 의미는 형제라고 말하는 성도들 안에서 그와 같은 자와 사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라고 말하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3)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는 성도 안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판단하고 죄인들에 대해서는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생각 정리]


1. 교회는 두 가지 차원에서 '죄'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 


  1) '죄'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2) 그럼에도 '죄'가 발생했을 경우, 그 이후 '죄를 저지를 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잘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면서도, 연약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지도에 신뢰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죄가 발생한 후'에 대한 공동체적인 후속작업이 일관성이 없거나 혹은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죄'가 잘 자라나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꼴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공동체는 두 가지를 잘 준비해야 한다. 죄가 자라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드러난 죄에 대해서는 신속하지만, 지혜롭게 처리하는 준비를 잘 감당해야 한다.


2. 교회 성도들이 판단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교회 안 사람들인가 교회 밖 사람들인가?


  1) 바울은 일차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보다는 '교회 안' 성도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엄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라고 말하면서,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사기치는 사람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도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교회는 이들을 '판단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죄'에 대해서는 세상보다 더 엄격한 공동체다. 


  2) 반면, 교회 밖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라고 말씀한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해 질 것으로 말한다.(용서하거나 봐주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대하지 말고(일부라는 측면이라면, 병든 곳을 도려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듯 좀 더 관대해지도록 하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몸의 자정능력으로 신속히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도록 하고(아니면 의사에게 우리 몸의 병든 곳을 맡기든지), 우리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치려고 하지 말고, '경찰'에게 맡기라고 바울이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지 말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직접 재판하지 말라는 의미일듯 하다. 



[적용]


1. 우리 몸의 문제는 '의사'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의 문제는 '경찰'에게 맡기자.


2. 죄를 예방하기 위한 구조적이니 노력과 개인적인 노력을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언제든 발생하게 되는 죄에 대해서 공동체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 세월호 사건을 단순화 하자면, 죄를 예방하기 위한 구조적인 정책은 존재했으나 그것을 따르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도덕에 대해서는 검증하지 않았다. 검증이 오래도록 되지 않음으로 방치되었고 그곳에서 불법적인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악이 구조화된 것이다. 구조화된 악은 권력과 밀착해있고, 그것을 고발해야 할 언론은 그들의 입을 닫았다. 최후의 경보까지 모두 구조적 악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세월호는 침몰했다. 개인적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 중에 하나는 언론이라고 본다. 언론은 사회 감시라는 기본적인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했다. 마지막 경보장치만 미리 울렸다면, 사태가 이렇게 가지 않았을 것이고 이 사건은 예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언론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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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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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리]


1. 내가 너희들에게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때가 이르면 우리 주님께서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시고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다.(바울 자신도 많이 참고 다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신령한 자의 태도)


2. 나와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하는 교훈을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였다.(교만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갈등의 일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

  : 그런데 너희들은 마치 배우지 않은 것처럼, 부족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지혜로웠던 것처럼 행동하는 구나. 스승인 나는 부족하고 무지했었는데 너희들은 처음부터 풍족했던 것처럼 교만하니 참으로 우리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구나.(7-13절.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하는 말씀이다.)


3. 이렇게 너희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드러냄으로 너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너희를 정말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복음으로 낳은 내 자식이지 않느냐? 제발 나를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라.


4. 내가 너희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것인데, 어떤 이는 내가 이제는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방자하고 교만하니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시면 내가 반드시 가리라.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한 자를 책망하리라.  



[생각 정리]


1.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정식 사도냐? 하는 바울의 사도성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사도인 게바와도 비교되었을 것이었을 것이다.(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강조점에서 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의 조건과 관련하여)


2.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상당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기고 있다. 대응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4:4-5)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또한 감정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일부를 향해서(교만한 자들) 조롱하듯 그들의 태도를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고전 4:7-13)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조롱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들 안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 줌으로서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인가를 드러내 준다.(그들은 말과 지식을 자랑하지만,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지를 말한다.)


3. 바울은 지금 '부모'의 심정으로 이들을 책망하고 있다. 부모의 심정이란 책망의 목적이 다르다. 고쳐서 새롭게 하기 위한 책망이지, 정죄하고 판단하여 망가뜨리려고 하는 책망이 아닌 것이다. 바울은 철없는 고린도교회를 대하면서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우리가 철없는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듯이, 바울 스스로가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거쳐서라도 고린도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무서운 매를 든 것이다. 


[묵상 정리]


1. '부모의 심정'으로 책망하겠다는 말은 책망하는 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심정에는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하겠다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결단하는 것이 선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누군가를 책망하고 나서겠다고 말할 때는 '자기 죽음'의 태도가 함께 겸비되었을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의 행동은 '따듯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2. 우리는 의도는 알겠지만, 표현자체에 대해서도 '격'이 있어야 성경적인 사람이요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용을 담는 그릇도 그 내용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격'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특수한 상황 그리고 의도적인 목적을 위해서 '격'을 낮추어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바울도 '격'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자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그 만큼 상대방의 수준이 낮거나 완악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상황에 따라선 종종 격한 표현을 사용하셨으니까.


격이 낮냐 높냐로 성숙하냐 비성숙하냐? 혹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쓴 표현이냐? 누가 한 표현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성경적일 수도 있고, 비성경적일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참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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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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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정리]


1.너희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하는 것 같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와 같기 때문이다.


2.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사람(바울,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따라 서로 시기와 분쟁하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3절) 신령한 자들은 영적인 이치를 알아서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알고, 사람은 각자 자기 역할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을 아는 자(7,8절)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동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신령한 자이다. 


3. 육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불타 없어질 것을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15절)


4. 중요한 것은 교회(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성전을 거룩(온전하게 하는 것, 분리되고 나누게 하는 것이 아니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5.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지혜로운 것처럼 사람(유명한)을 따르고 추앙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절) 만물이 다 너희(를 위한)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도,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나 다 너희의 것이다.(22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cf) 엡 1:20-23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만물도 교회를 위해 두신 것이다.)



(엡 1:20-23)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묵상]


1.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 적어도 고린도전서에서의 개념은 교회 안에서 사람을 추앙하여 분열과 시기를 정당화하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이다. 그 사람이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 일지라도... 반면 신령한 자라는 것은 영적 진리와 이치를 알고 분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정작 중요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자신들의 역할은 심는 것이나 물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며, 동시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 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성전인 교회의 거룩은 분열되지 않고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2. 성도는 내게 위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를 추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나'를 위해 두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우리가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안된다. 바울일찌라도, 아볼로나 베드로라 할찌라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 바울도 사용하시고 아볼로나 베드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나를 위한 조연인 것이다. 물론 나를 위한 그들의 수고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를 통해 얻은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를 동원하신 분, 하나님에게 우리의 초점이 맞춰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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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정리]


1.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너희들이 선호하는 방식(지혜로운 말)으로 가지 않고 <진리선포>(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목박히신 것)로 나아갔기에 나는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진리 선포에 있다. 


2. 그러나 바울이 지혜를 무시하는 것(반지성주의)이 아니다. 다만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 지혜와 지혜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세상이 모르는 것인데(만세전부터 감추어져있었던 것임, 그들이 예수를 죽였을 만큼 이 지혜를 몰랐고 무지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지 세상의 영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이다. 


3.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게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 진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 



[해설]


우선 바울의 이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왜냐하면 이 본문을 근거로해서 인간의 지성 자체를 경계하는 경향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어떤 광신적인 사람들은 '신비적 지혜'를 말하면서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논지의 근거를 이 본문에서 끌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인용하여 쓸 수 있는 구절들이 다수 나온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면, 과연 바울은 인간의 지혜(그 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와 지식들)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있었던 기간 중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전에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고린도 지역에서 1년 반 동안 사역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 것으로 본다.(행 18장) 따라서 그곳이 복음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기 전에 베뢰아를 떠나 도착한 곳은 '아덴'이었다.(행 17:13-15)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을 피신하여 도망치듯 온 '아덴'에서 바울이 봤던 것은 <우상이 가득한 것>이었다.(행 17:16) 이것을 본 바울은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날마다 변론하게 된다.(행 17:17)


(행 17:18-21)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그 지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말과 지식에 대한 자랑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고린도 지역이라고 해서 상황이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다니며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유대인들과 전부터 계속 싸워야 했지만, 인간의 지혜(헬라철학)를 말로 풀어내고 더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인 이 지역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 것인지를 몸소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리석게 들렸을 것이다. 신이 육체를 입었다는 것도 이해될 수 없을 것이고, 신이 죽었다는 것오 믿지 못할 일이다. 게다가 신이 부활하여 다시 육체를 입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혜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복음>은 <능력>으로 나타났고 회심자가 생겼으며 교회는 세워졌던 것이다. 도저히 인간적인 지혜로는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는 내용인데, 그 중에 일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바울은 이것을 체험적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설득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지혜'(이 땅의 지혜로는 이해 불가능한 내용)를 얻은 것이고, 이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사람의 노력과 탐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음. 고전 2:12)를 통해서 된 것임을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의 '세상의 지혜'에 대한 말은 이런 맥락 속에서 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 지혜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는 무용론은 '세상의 지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알수 없다'란 측면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2장의 내용을 근거로하여 '인간의 지성의 무용론'과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신령한 지식'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솔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본문 말고도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과 그 지성을 통해서 사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감추신 분이 아니라 드러내시는 분이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묵상]


1. 우리는 인간의 지성주의는 경계하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지혜를 존중히 여긴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이신 구원의 지혜는 소수의 제한된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온 천하에 하나님의 지혜를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자신들의 교회만이 그 지혜가 있고, 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단으로 봐도 무방하다.


3.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지만,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4. 우리는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사실과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지성주의로 흐르지도, 초월주의로 흐르지도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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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정리]


1.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2. 너희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할 것이다.

3. 난 너희들이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되기 원한다.(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스도파)

  - 바울이 너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느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파당을 지어서도 안된다.

4.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미련함을 통해서(전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다.

  - 너희들을 보라. 너희 중에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셨다. 그러니 자랑할게 없지 않느냐?



[해설]


1.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매우 말과 지식이 넘치는 지역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2. 그런데 그 인간적인 지식의 넘침이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어냈다. 즉 신앙의 파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인상깊게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온 아볼로의 성경강해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직접 사사받은 예루살렘 사도 베드로(게바)가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파'란 분파를 만들어 자신들이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으로 포장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언변도 좋고, 논리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자들이니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나아갔던 것 같다. 마치 인간적인 학파를 따지며, 누가 더 뛰어난가를 겨루는 세상의 학자들처럼 말이다. 


3. 바울은 이들의 말과 지식으로 세운 파당의 집을 허문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가?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니다. 바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다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일 뿐이다. 

교회에 들어올 때 받은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은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집착하는가! 그들이 유명하고 탁월하기 때문인가? 


4. 우리가 논리적 설명에 설득해서 혹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서 <복음과 생명>에 이르게 되었는가? 너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낮은 것으로 높은 것을 폐하시는 분인데, 낮은 우리가 우리의 낮음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자랑할게 없다. 


[묵상]


1.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를 잘 소개하고 전하며 가르치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떤 '인간 스승'이 존재하게 된다. 그 탁월한 스승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 그래서 나는 종종 강단에서 '칼빈'의 입장을 듣고, '박00' 목사님은 뭐라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듣는다.


2. 이와 같은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게 되고, 그 누군가가 탁월하게 잘 소개하는 사람이면 듣는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군가의 이름만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많은 주옥같은 말과 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잘 드러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지, 그 표현 자체의 탁월성만이 남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 인간 스승들을 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절대화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들에게서 배울 것이 아닌가!


3. 결론적으로 내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누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 누구의 권위'를 근거로 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않은가 싶다. 아무리 바른 교리와 정통이라는 토대위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4. 주님이 말씀인 성경이 빠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의 입장(교리)만 남을 때 교회는 누구파, 누구파, 누구파로 나누어지게 되고 만다. 주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사랑과 용납과 한 몸의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5. 오늘날 이 시대는 고린도 지역처럼 말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싶다. 지식과 말의 결여가 신앙을 퇴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과 지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의 '자기 자랑'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 무지를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말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헛되다. 그리스도의 신앙에서는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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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한 모금]


1. 말라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교만하고 악한 자들에게 대한 불 심판의 날이다. 완전히 소멸될 것을 말씀하신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된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임에는 분명하다. 그 날이 되면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며,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의 징후는 주님의 재림 때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초림때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헤롯의 무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과 목동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는 이 둘은 분명하게 갈리기 보다는 서로 섞여있기도 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게 배신했다가 다시 쫓게되는 과정이 있듯이 말이다. 


2. 말라기 서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했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난 구약의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이것은 말라기서 4장의 말씀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의 역할,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하셨다는것과 또한 엘리야의 역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한 역할 모두를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3.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마쳤다. 구약 전체를 마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만족감이 있다. 감사하다. 





[성경 한 장]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라.

   (1)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2)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용광로 불 같은 심판의 날이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처럼 불타 없어질 것을 말한다. 교만한 자와 악행하는 자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신다.


   (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4)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5)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영광과 승리를 보장하며, 악인을 밟아 재와 같이 여기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교만한 자와 경건한 자를 대조하며, 교만한 자는 멸망하며 경건한 자는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하신다. 



2. 너희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2)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3)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 다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서 지키게 하려고 하셨던 법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역할을 위해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다.(마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봤던 구약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모세는 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엘리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백성의 상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로 언급된다. 법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는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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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한 모금]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따짓듯이 하고 있는 말들이 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2),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습니까?"(3:8), 하나님을 완악한 말로 대적하고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까?"(3:13),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3:14) 

자기 백성들에게 낳으시고 공들여 먹이고 입히시고 돌보신 하나님을 향해서 기껏 한다는 말이, 앞에 언급한 힐난조의 질문들이다. 이 백성을 향한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2. 종종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억울할 때가 있다. 아이를 위해 충분히 다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자신의 기분이 상한다고 '엄마가 우리에게 해준게 뭔데?'라고 하면 너무 큰 절망과 분노가 함께 올라온다. 자녀를 위해 나름대로 해온 모든 노력이 부질 없었던 것처럼 무력해 진다. 한 순간 남으로 보이고, 남이 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그래? 그럼 너 혼자 살아봐!' 자녀와의 싸움에서 보통은 자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잠그는 것이지만, 이 때 만큼은 부모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다. '엄나가 나에게 해준게 뭔데?' 이 한마다는 그 만큼 강력하다. 그 수많은 인내의 시간과 노력과 수고가 모두 뻘짓(?)이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도 마음이 상하신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하나님은 말문이 막히고, 먹먹하여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실 것 같다. 말라기 이후 400여년간의 침묵은 이렇게 시작되나 보다. 


 - 끝 -



[성경 한 장]


1. 만문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2)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너희가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다. 


  *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자가 하나님의 앞 길을 준비하며,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가 갑자기 성전에 임할 것이다. 


  3) 그가 임하는 날, 누가 그를 당하며 누가 능히 서리요.

  4) 그는 금을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5)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6) 그들이 결국 공의로운 재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 그는 오셔서 금과 은을 연단하듯이, 표백하는 자가 옷을 깨끗하게 하듯이 레위 자손들을 정결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른 재물을 여호와께 바치게 될 것이다. 


  7)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히 되려니와 (회복)


  8) 하나님이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1)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2) 품꾼의 삯에 대해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3)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4)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레위인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그러는 과정에서 악을 행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으신다. 야곱의 자손들에게 대해서는 그들을 보존하신다.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 너희 조상 때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2)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고 반문함

  3)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습니까? 하고 반문하는데, 너희들이 도둑질 한 것은 바로 십일조와 봉헌물이다. 

  4)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노라. 


  *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십일조 문제를 지적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드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온 나라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원인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5)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나를 시험하여 보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는가 보라. 

   (1) 내가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할 것이며

   (2)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 

   (3)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 하나님은 구체적인 하나의 문제(십일조와 봉헌물)를 들어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지적하신다. 이들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도 없으며, 그것을 도둑질 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은 마땅히 해야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향해 경건한 태도를 잃어버린 유다의 모습이다. 


3. 여호와가 이르노라. 


  1) 이 백성이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습니까? 반문한다. 

  2) 이들은 말해왔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지 않는가!


  *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여호와를 섬기며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우습게 말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가 더욱 잘 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이들이 얼마나 불경건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3)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며 말한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


  4)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자신을 경건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기념책에 기록하여 그들을 분별하심을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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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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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순서가 늘 장 요약하고 묵상으로 이어졌는데, 글의 순서를 바꿉니다. 어차피 장요약 한 것은 묵상을 하기 위한 기초작업인데 혹 읽는 분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묵상 작업을 앞에 놓습니다. 묵상을 보시고 혹 궁금함이 더하시면 본문 정리한 것을 보시라고. ㅎㅎ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은 두 부류의 대상에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신다. 첫째는 제사장들이다. 이들에게는 두가지 책임을 따진다. 하나는 제사며 다른 하나는 율법으로 자기 백성을 지도하는 것이다. 제사의 문제는 말 1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2장에서는 율법과 관련된 제사장들의 그릇된 태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삶을 인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맺었던 언약(레위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희생의 제물의 똥처럼 제하여 버릴 것이라 말씀하신다. 


2. 또 하나의 부류는 유다 백성이다. 이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데, 특히 이들이 아내에게 대해서 행하는 악행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어려서 맞은 아내와 경건한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쉽게 아내를 버리고, 아내에게 폭행을 행하는 것으로 인해 이 결혼관계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봉헌물을 받지 않으시고 이들을 야곱의 장막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3. 말라기 시대에 유다의 영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제사장들은 허술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레위와 맺은 언약이 있음에도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산다. 그러하고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한다. 유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가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다. 젊어서 맞이한 아내를 버려 쉬 이혼하고 이방의 딸을 맞아들인다. 아내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4. 구약 시대 동안 이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들이신 공로와 수고가 그렇게도 많은데 이 백성의 종교와 삶과 가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수천년간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들은 방자하고 하나님은 이제 이 백성에게 지치셨다.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이 백성은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님의 낙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셨으리라... 구약의 끝은 참, 무력하게 끊나고 만다.



[성경 한 장]


1.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제사장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말씀


  1) 만일 너희가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2)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3) 이미 저주하였다. 너희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으로


  4) 너희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5)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6)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7)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다. 

   (1)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2)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3)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라.

   (4) 그러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5)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6)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다. 


  * 하나님께서 레위(제사장)들에게 언약을 맺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경외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절기의 희생의 똥과 같이 여기고 이들을 버리고 제하였음을 말한다. 이들은 옳은 길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율법에 거스르게 했으며, 사람들을 치우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들과 세운 언약,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파기하셨다. 그래서 결국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되었다.


2. 거짓을 행하는 유다


  1) 우리는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을 통해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2) 그럼으로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자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버리시리라.

  3) 너희가 이런 일을 행하나니,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신다.

  4) 그런데 너희들은 이것이 어찜 됨이냐? 하고 놀란다. 


  5)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는데, 너와 서약한 아내에게 네가 거짓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너의 짝으로 하나만 만든 것은 네게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 아니냐? 너는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라. 

  6) 나, 여호와 하나님은 두 가지를 싫어한다. 

   (1)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2)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한다.(가정 폭력을 말하는 것인가?)

  7)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라. 


  *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유다의 장막에서 끊어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 결혼한 아내에 대한 사례를 말씀하신다. 어려서 맞이 한 아내와 경건한 자녀를 낳으려 하지 않고,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릇된 방식으로 아내를 버리려하는 유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태도에 당황해하고 놀란다. 그 정도로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는 유지되기가 어려워졌다. 



3.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여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1) 이들은 말한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고 그에게 기쁨이 된다.

  2)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라고 말한다. 


  * 이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판단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께서 좋게 보실 것이라, 기쁨이 될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행태다. 더불어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시하며 자신의 불의에 대해 아무런 죄 의식도 갖지 않음을 말한다. 이들은 뻔뻔하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게 무엇이 있냐고 고개를 치켜들도 따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참으로 당황스러워 하시면 더 이상 손 쓸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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