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성경/내가 나누고 싶은 복음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건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 부자 관리


저는 지금 구원의 조건과 관련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가진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천국의 특징은 입장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것은 입장권과 같은 티켓 개념보다는 시민권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이 더 적절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삭개오의 구원에 대해서 살펴봤고, 같은 맥락에서 마태복음 13장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해석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 언급된 바울의 고백에서도 그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18-23절) 어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그는 자신이 선한 선생이라고 생각한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명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20절) 그러자 그 관리는 그와 같은 내용의 계명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21절) 이 관원은 영생과 관련된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는 영생과 관련해서 좀 더 높은 수준, 좀 더 완전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을 소개받고 그것을 시도해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관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2절) 예수님은 이 관원의 근본적인 문제가 ‘땅에 쌓아둔 재물이 중심된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땅에 쌓아둔 재물을 버리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리는 ‘큰 부자’이므로 예수님의 요구에 순종하지 못하고 심히 근심했습니다.(23절) 마태복음에는 ‘이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관원은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 부자 관원은 종교적인 계명들에 충실했지만, 그의 삶의 중심 가치는 ‘땅에 쌓아 둔 재물’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돈과 재물이 성도의 삶에 우선되는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관원의 문제점은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종교적인 요구를 잘 따른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은 이전 질서의 핵심가치를 포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나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체계를 모두 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셨을 때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가져오시고 그 질서에 따라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질서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선명해 집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확인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전 질서를 버리고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던 부자 관원이 영생을 원했지만 결국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이전 질서의 가치체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처음 다룬 본문이 마태복음 22:1-4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 안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에 대한 것으로 문제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혼인잔치에 남아있는 자와 쫓겨나게 된 자의 차이를 만든 ‘예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이 예복을 교리적인 접근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본래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복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행사의 격식에 맞추어 입는 옷’입니다. 이는 그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시공간에 적절한 의상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초청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왕의 아들 혼인잔치를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준비하고 들어왔다. 그들은 미리 초대받은 사람들도 아니고 그 잔치에 걸맞는 신분도 아니었지만, 그 자리의 무게감과 질서를 알고 그들 나름대로 예복을 입고 온 것(질서를 존중하고 따르겠다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그 잔치가 주고 있는 혜택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공간이 주고 있는 격식과 무게감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왕의 아들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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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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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소유하게 된 사람, 삭개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정리하면 첫째, 천국은 들어가는 것(입장권)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라는 것과 둘째, 천국은 끝까지 남는 것(시민권)이 더 핵심적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를 구원의 필수 조건이 ‘죄인 아닌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으로 보충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개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서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10에 언급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은 여리고에 사는 사람으로 직업은 세리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성실하게 잘 수행했는지 그는 ‘세리장’이 되었고, 부자도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종종 보듯이 그 당시 ‘세리’는 ‘죄인’과 같이 언급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죄인과 같이 취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금을 거두어가는 사람을 좋아할 리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종교적인 이유(이방인과의 잦은 접촉)도 함께 덧붙여져서 유대인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종교적 입장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삭개오는 자신의 직업으로 ‘세리’를 택한 것입니다. 이는 삭개오의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부와 세상적인 성공이 삭개오를 지배하는 삶의 중심 축이었고, 그 질서를 따라 세리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의 판단과 종교적인 평가보다도 ‘돈과 성공’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것이고 물질과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님께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값 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의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좋은 (성품의)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돈’에 대한 그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과 ‘성공’이 삭개오의 중심 된 가치였다면,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돈’과 ‘성공’을 중심으로 한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추가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에 대한 표현으로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나누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로서 재물의 배상을 율법이 정한 기준을 넘어서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와 질서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 변화(우선순위의 변화, 질서의 변화)를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시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자기 삶의 질서를 구축했던 삭개오가 돈을 버리고 예수를 만남을 통해서 공의와 정의를 가치로 하는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왔을 때 주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많은 돈을 구제에 썼다’(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기준과 질서가 바뀌었다는 것(새 질서의 세계로 들어왔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확정해주신 것은 삭개오 안에 이전 세상의 가치관과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의 질서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4에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이전과 이후의 가치체계의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버리고, 밭에 감추어져있는 보화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팔고 보화를 산다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질서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 자신도 가치 체계에 대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세상의 가치관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빌 3:7) 오히려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동안 바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확정받았다는 것, 바울이 정말 예수를 만나서 변화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전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변화와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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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아닌 것과 의인의 차이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의 죄책을 대신 감당한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고 배웁니다. 이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사라졌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좀 더 설명을 드리겠지만, 지금 아주 단순하게만 말씀드리면 우리는 의인이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과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종종 죄인들이 광복절 특사(은혜)를 통해서 아직 형량이 남아있지만 일찍 죄책을 면제받고 출소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법적으로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복음을 설명할 때 종종 핵심적인 부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즉 십자가와 부활이 함께 복음의 내용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죄책에서 면책된 것과 우리가 의롭게 된 내용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함께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변화가 우리가 경험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즉 죄사함을 받는 것과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개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두 가지 변화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이전 세상으로부터 나오고(죄책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후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새로운 질서로의 유입)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연이어 있었던 것처럼 이 두 가지 사건은 주님 안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고 단절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실제 교회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현실은 마치 이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나지 못하고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은혜로 혼인 잔치에 들어오긴 했지만 다시 쫓겨나는 사람이 있고(마 22:1-14), 좋은 씨를 뿌린 주인의 밭에 있지만 추수 때에 곡간이 아니라 불에 들어가는 가라지가 있고(마 13:24-30), 천국의 그물에 걸려서 좋았지만 세상 끝에 구분되어 풀무 불에 던져지는 못된 것이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13:47-50). 이런 현실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여 설명하지 못하면 자칫 속죄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모두 다 설명한 것처럼 되어 천국의 마지막 시간대에서 벌어지게 될 검증을 준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언급된 천국의 비유들은 그런 우려가 있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무력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이와 같은 구분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 봅니다. 그로 인해 ‘죄인 아닌 것’으로 충분히 천국을 소유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기게 된 것이 교회의 수준이 낮아진 원인인 것이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내용이 복음의 전체고 그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누구나 천국을 보장 받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교회 밖 사람들에는 복음이 경박한 내용이라고 비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랫동안 교회는 그와 같은 수준의 그리스도인들을 한국 사회에 배출해 냈던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복음이 명확하게 제시하는바 ‘의인의 자리’까지는 설명해 내지 못한 부작용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의인의 자리를 지향한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의인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새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질서에 적법한 사람이 되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치 훌륭한 부모의 자녀라 할지라도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는데 시간이 걸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데 이는 그 자녀가 훌륭한 부모요 탁월한 양육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 속에 들어온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길러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겠다는 진지한 결단(외국인이 국적을 바꿔 귀화하겠다는 결의와 같은)이 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백성으로 남아있으려면,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 다스리는 나라에 시민이 되겠다는 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천국에 시민이 된다는 것은 이전 나라(세상의 나라)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따르겠다고 결단하여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 아닌 것’과 ‘의인’이 구별되는 개념인 것처럼 이전 나라를 나오는 것과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구별되는 과정이고 이 두 가지가 모두 갖추었을 때 온전한 천국 백성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오해하기 쉬웠던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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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유를 통해서 본 천국의 특징(마 13:24-30)


지난 내용에 이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이 시간적으로 한 정점을 통과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 22:1-14의 비유에서도 살펴봤던 것처럼 문제의 그 사람이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는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그곳에 있지 못하고 중간에 쫓겨나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하나님의 나라)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들어간 자와 못 들어간 자, 이렇게 둘로 구분되지 않고 들어가지 못한 자와 들어갔다가 나온 자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자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런 식으로 구분된다는 개념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13:24-30에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알려진 천국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도 보면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천국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원수가 와서 그 사람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주인의 밭에 알곡과 함께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들이 이 사실을 알고 가라지를 당장 뽑기를 원하는지 묻습니다.(28절)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고 말합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30절) 추수 때가 되면 그 때가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이 추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자기 밭에 있는 가라지를 보고서도 그대로 알곡과 함께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주인의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당분간 공존하는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주인의 판단이고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마 13:47-50에는 그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고 말합니다.(47절) 그물이 가지는 특성이 천국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물은 각 종 물고기를 한 번에 모읍니다. 그리고 나서 물가로 끌어내서 나중에 어부가 그 잡은 고기 중에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를 구분합니다. 즉 처음부터 그물은 좋은 고기만 골라서 모으지 않습니다. 일단 다 모읍니다. 그리고 나서 분류를 합니다. 천국이 마치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부가 그물에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하는 때를 세상 끝이라고 말합니다.(49절) 즉 최종적인 심판의 때를 말하는 것이고 그 전까지는 그물에 좋은 것과 못된 것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비유들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천국은 들어가는 것(입장권)보다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거주권)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던 진실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확신했고, 먼 훗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혹은 그 전에 주님 앞에 부름 받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티켓’을 받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전체 그리스도인이 모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반적인 분위기와 가르침이 그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행 티켓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 천국 비유를 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티켓)만으로는 안되고 그 티켓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려고 할 때, 열차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요즘은 티켓이 없이도 기차 안까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열차 안에 탈 수 있는 티켓이 있다고 부산까지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티켓이 대전이나 대구까지 밖에 갈 수 없는 티켓이라면 부산까지 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가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 종착역에 도달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특성을 정리해보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관광객이 아니라 시민이 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관광객은 그 나라의 시민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것을 경험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일정한 시간이 되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마치 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자신의 나라에서 누리고 경험했던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화하려는 나라의 질서 가운데로 들어가겠다는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결단과 희생이 없니 그 나라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시민이 될 수 없고, 관광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나라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에 대해서 비유가 아니라 신학적인 접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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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아들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 본 천국의 특징(마 22:1-14)


마 22:1-14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천국에 대한 특성을 설명해 주십니다. 2절에 보시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 어떤 특성을 보이는가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천국이 하늘나라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되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차마 언급할 수 없어서 하늘로 대신 표현했다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천국은 하늘나라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개념을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일 것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첫 번째 이야기는 3-8절까지 나옵니다. 임금은 사전에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할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했다. 이제 당일이 되어 청한 사람들을 오라고 종을 보냈다.(3절) 그러나 사람들이 오기 싫어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이고, 임금이 종까지 보내 오라고 초청했는데 그것을 싫어했다는 것이 좀 이해되지 않는다.  // 그러나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충분하고 넉넉하게 갖추었으니 오라고 초청했다.(4절) 그러나 초청받았던 사람들은 그 종들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어떤 사람은 사업하러 가고 남아 있던 자들은(핑계거리가 없는 자들)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5,6절) //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태웠다(7절)는 구절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임금의 과격한 행동에 다소 충격을 받지만 사실 이 비유를 읽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초청받은 사람들이 임금을 대하는 태도에 오히려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한 나라의 임금을 이렇게 모욕할 수 있을까? 감히!!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그 임금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인 것이다. 당시 임금의 입장에선 이런 무례한 백성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은 이미 왕의 잔치에 초청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 장로들과 같은 사람들이요 넓게 보면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왕의 잔치에 들어오지 않을 뿐더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낸다. 네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한다.(9절) 그러자 종들은 길거리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온다. 이제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되었다.(10절) 이 비유는 처음 초대 받은 자들이 합당하지 않았기에 초대받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가 다 그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격없는 자에게 임금의 은혜였던 것이다. 심지어 종들이 사람들을 데려갈 때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를 데리고 갔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죄에게까지 열려진 기회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이방인이요 세리와 죄인들인 것이다. 이들도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보면 우리가 그 동안 이해하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같다. 


그러나 이 천국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11-13절까지의 이야기다. 아들의 혼인잔치는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길거리에 있다가 갑자기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 때 임금이 그 잔치의 현장에 나타나서 손님들을 둘러봤고 그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물었다. 그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다.(11,12절) 그러자 임금은 사환들을 시켜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명령했고, 예복을 입지 않았던 그 사람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13절)


비유를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내면적으로 묘한 긴장이 흐른다. 10절까지의 천국 비유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복음적인 메시지와 다르지 않지만, 11절 이후에 나온 ‘예복을 입지 않는 자’에 대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잔치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일부는 구원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복’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잔치에 남아있을 수 있는 ‘조건’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건없는 은혜’, ‘조건없는 구원’의 개념과 조화를 이루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내용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굳이 천국 비유를 10절의 내용에서 끝내지 않고 11-13절까지의 내용까지 굳이 설명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국의 특성 중 중요한 요소가 담겨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정 이 천국비유가 말해주고 싶은 천국(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다음 글을 통해서 이 문제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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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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