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_ 오래 사는 법, 오래 살게 하는 법

글: 김수억 대표

 

어릴 적부터 나는 작은 생물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편이었지만 ‘생명의 가치’를 깊게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지금까지 양가 부모님들은 모두 건강하신 편이고 형제들도 건강상 무탈하니 나는 아직 가까운 가족의 임종을 지켜본 적은 없다. 그런데 10년 전쯤 아내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 때 나는 그 갑작스러운 통보 앞에서 비로소 ‘생명’의 크기와 무게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의 언어가 그 반대 개념 앞에서 의미가 명확해지듯, 생명의 가치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수년 전 아내가 암이 재발되어 항암치료를 받던 때다. 날이 좋아 기분전환 겸 아내에게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하려고 함께 충청남도 수덕사를 방문했다. 거기서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관광버스에서 내려 수덕사로 향하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밝은 얼굴을 보았다. ‘저 연세가 되어도 건강하게 세상의 좋은 것을 보고 누리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불현듯 올라온 생각에 스스로 놀라며 ‘생명의 가치’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던 2010년 12월, 그 때 우리 나이는 40세였다. 큰 아이는 13살, 작은 아이는 11살. 그 동안 우리는 건강상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았기 때문에 아내의 갑작스러운 결과 앞에 당황했고, 암(癌)이란 낯선 병명 앞에 무력해졌다. 당시 아내는 제법 자란 아이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나는 사역의 전환점을 갖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불청객과 같은 병은 우리의 의지와 계획을 무장해제 시켰던 것이다. 아내는 7시간의 큰 수술을 했고, 회복을 위해 열흘간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해야 할 최소한의 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내와 함께 병실에서 생활했다. 아내와 둘이 한 병실에 있으면서 우리는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했고, 적지 않은 추억들을 소환했다. 그 사이 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완화되어 갔고, 우리는 이 또한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갔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우리 가족인가?’를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왜 너는 안 되는데?’ ‘왜 너희 가족은 아프면 안 되는데?’라는 당연한 반문 앞에 답할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왜 하필 나에게?’를 묻지 않듯 우리는 서로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에 집중했다. 병실에서의 열흘은 아내와 함께 했던 신혼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순전히 ‘서로만을 위해 집중한 시간’을 십 삼년 만에 보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아내는 낮에 직장을 다녔고 나는 저녁에 사역을 하느라 단 둘이 함께 했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둘이 함께 한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우리는 짧게 산 것이다. 구체적으로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지난 십 삼년의 시간보다 더 긴 열흘을 보냈는지 모른다. 

 

오래 산다는 것,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이고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나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서 오래 산 존재가 된다. 병실에서의 열흘이 십 삼년의 시간보다 더 길 수도 있듯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오래 살게 할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할 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그 방법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오래 살 수도 있고, 누군가를 오래 살게 할 수도 있다.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지금, 오래 살게 하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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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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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에서 “그런즉 우리도”까지


글: 김수억 대표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대다수 성도는 단연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뽑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선교를 위해 ‘지상 명령’으로 제시한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예수님의 선교적 명령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18절) 받으셨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파송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격려의 약속(20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제자로서 선교적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내적 능력에 대한 불완전성과 외적인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이런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청년들을 파송하고 있고, 청년들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만 믿을 수 있다면 청년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교한국 1988 대회부터 2010 대회까지 선교한국의 주제를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너희는 가라고 도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한국 2016 대회 주제는 “그런즉 우리도”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문구를 따왔다.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백성들을 위해 수치를 당하셨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런즉 우리도” 선교적 삶을 위해 예수님의 삶을 본받자는 내용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구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권세와 그분의 함께하심에 대한 ‘격려’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당한 수치’, ‘예수님이 당한 고난’만 있을 뿐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이번 대회의 주제는 선교하려는 청년 대학생들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오히려 진지하게 묻는다. “자네, 정말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의 길을 가려나?”하고 말이다. 선교한국 2016 대회의 주제 구절은 선교사로의 도전이 아니라 제자다운 삶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선교한국 2010 대회의 주강사, 자크 니링기에(David Zac Niringiye, 우간다 성공회 소속) 주교는 당시 대회 주제 구절인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라는 선교적 명령을 강해하면서 대회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선교사로 가기(Go)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로 와야(Come) 한다고 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선교한국 2010 대회 이후 6년만에 선교한국 대회는 본격적으로 ‘제자도’와 긴밀한 주제가 되었다. 이런 흐름의 변화는 단순히 주제가 선교에서 제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적 명령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할 제자도에 대한 영역이 그동안 축소되거나 간과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과거 ‘동원’에만 치중함으로 ‘제자로서의 선교사’의 측면이 약화되었던 것이 결국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로 드러나고 있음을 반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선교한국 대회의 흐름은 지난날 성장 중심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교묘히 닮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교한국 2016 대회는 선교 동원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선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 제자로서의 삶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를 향한 선교한국 대회의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런즉 우리도”의 메시지는 한국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외침이기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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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골짜기에서 만나는 샘

글: 김수억 대표


2016년 새해에 들어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5년 마지막 달입니다. 그러다 보니 앞 날을 말씀드리기 전에 지나간 날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2015년은 제가 죠이선교회 대표가 되고 처음 맞는 해였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일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죠이 간사로서는 누구못지 않게 익숙하지만, 죠이 대표로서는 초짜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현직에 있는 간사로서는 누구도 이 길을 가본 경험이 없기에 대표 역할을 수행하는 여정 속에서 겪어야 할 무게는 고스란히 저만의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공동체를 따듯하게해 보겠다고, 그간의 공동체적 숙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 보겠다던 의욕은 초짜의 섣부른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대표로서 더 지혜롭고 더 치밀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많은 부분 의욕을 잃지 않으면서도 때를 만들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고통 속에서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기가 죽어 있을 즈음에 시편 84편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절)라는 말씀을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저는 많은 샘이른 비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제주에 살고 있는 동기 목사에게 뜸금없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죠이선교회 본부 주소를 알려달라고. 귤을 샀는데 제가 생각나서 죠이로 몇 박스를 보내 주겠다고 말입니다. 죠이와는 연관도 없고 제 처지와 낙심을 알 수도 없는 그 동기 목사의 문자에서 격려의 샘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후에는 연차가 어린 간사 한 명이 제 방을 찾았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메모가 적힌 작은 엽서히트텍이었습니다. 생일날에 드렸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하다며, 그래도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며 15일이나 지난 제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따듯한 겨울 보내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고요. 정말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제 이메일로 온 한 후원자의 답신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2015년 11월말에 보낸 제 기도 편지 마지막 부분에 대표로서 추가적인 사역을 위해 3천만 원을 모금해야 한다고 기도 부탁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 편지를 보신 후원자(죠이어 목사님)께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며 성도 두 분(전교인)과 함께 논의하여 50만 원의 후원금을 보내겠다는 이메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많은 샘이고 이른 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제가 얻은 것은 도 아니고, 히트텍도 아니고 50만 원도 아니었습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었고,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죠이선교회 대표로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담력이었습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골리앗을 상대할 수 있는 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자신의 힘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설명밖에 할 수 없는 작은 경험을 누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은 다윗에게 많은 샘이 되기도 했을 것이고, 이른 비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의 누적이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담력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새해에는 많은 샘이른 비가 있음을 믿고 눈물 골짜기의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힘있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죠이선교회의 2016년 여정에 많은 샘이른 비가 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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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넌 도대체 누구냐?

글: 김수억 대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학’이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하실 것인가)를 아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그 본질을 강조할 때,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빌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上)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곤 한다.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해에서 나온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듯 하지만 하나님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 요나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받는 선지자다. 요나가 ‘모세오경’과 같은 당시 가장 핵심적인 ‘신학서적(?)’은 일찌감치 마스터했을 터, 신학적인 기본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더불어 그 지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까지도 분명하게 파악해 내는 능력이 있는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 1:2)라는 말씀 하나만 듣고도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았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렇다. 요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자였다. 그러나 요나서는 흥미롭게도 하나님으로부터는 가장 엇나가는 인물이 요나임을 알려 준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심각한 죄인이라 할찌라도 ‘그 생명을 살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죄에 대한 심판을 기본 법칙으로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만 있다면 그 기본 법칙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인간을 대하기 원하신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하와에 대해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창 3:20)라는 이름을 부여하심으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신다. 또한 유다의 죄로 인해 결국 유다라는 나무를 베어 버리기로 작정하셨으면서도, 그루터기는 남겨 놓으심으로 ‘생명의 지속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고전 15:45)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되고 있다. 

반면 요나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법칙에 갇힌 선지자였다. 심지어 요나는 하나님조차도 그 법칙 안에 가두고자 했다. 그 법칙을 넘어 ‘은혜를 베풀고, 자비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합리성이었다. 그 합리성의 결과는 ‘내 자신이 죽어서라도 니느웨를 죽여야 한다’는 ‘죽이는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확신했던(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확신)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대척점(對蹠點)에 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고 만다(욘 4:10-11).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고, 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정죄를 받았다. 심지어는 예수님조차도. 바리새인, 그들은 또 다른 요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요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데는 발 빠르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작은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오늘의 요나인 것이다. 자신은 그와 같은 논리가 “합당하다”(욘 4:9, 개역한글)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은혜 아래 구속받은 백성들에게는 ‘바리새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 가고 신앙하는 우리 자신을 향해 묻는다. “넌, 요나와 무엇이 다르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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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복음적 삶’이다.

글: 김수억 대표


신약 성경에는 빌레몬서가 있다. 사실 있다지만 ‘없는 듯’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 서신 중 가장 적은 분량인 한 장이라 우연히라도 보기 힘든 책이기 때문이다. 종종 설교 본문이 빌레몬서일 경우 색인의 도움으로 찾을라치면, 영락없이 ‘빌레몬서’가 아닌 ‘빌립보서’가 나오고 만다. 빌레몬서의 약자가 ‘빌’이 아니라 ‘몬’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지만, 그도 이내 잊는다. 빌레몬서는 성경에서 ‘오래된 단역 배우’처럼 그 존재감이 약하다.

빌레몬서는 내용면에서도 그렇다. 보통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예수님의 생애나 교회의 확장,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지는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등 교회를 위한 중요한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빌레몬서는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문제를 다룰 뿐이다.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빌레몬서의 내용이다. 매우 개별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내용인지라 빌레몬서가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 어색할 정도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찬찬히 읽다 보면, 빌레몬서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바울의 권면 속에는 ‘대속’, ‘회복’, ‘환대’라는 굵직한 복음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해 빚진 것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바울 자신이 대신 갚겠다는 것(18절, 대속)에 있어서나 오네시모를 마지못해 받아 주는 척 하지 말고 잘 받아 달라고 요청한 점(17절, 환대) 그리고 오네시모는 종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이제 주님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해 달라(16절, 회복)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대속’, ‘회복’, ‘환대’라는 복음의 진리가 바울의 개인적 태도를 다룬 빌레몬서에 완연하게 묻어나고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빌레몬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울의 복음적 삶이 온 우주의 복음적 진리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지극히 개별적 현상이 온 우주의 원리인 만유인력의 법칙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고 확대되었는가? 개별적 삶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복음적 삶은 바울에게 복음을 심어 주었고, 바울의 복음적 태도는 빌레몬에게 복음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훗날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빌레몬의 복음적 삶은 오네시모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복음은 성도 개인의 복음적 삶을 모태 삼아 확장되었고, 교회는 종이라는 신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 갔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제도 혹은 교리의 문제인가? 아니면 도덕과 윤리의 문제인가? 이런 것들은 세상에 합리성과 명분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감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거대 담론이 배제된 개인화된 신앙이 문제인가? 앞에서 살펴본 관점으로 빌레몬서를 본다면 그것도 아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태도 속에 ‘우주적 복음’이 녹아 있고 그것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듯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복음적 삶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룻과 보아스의 개인적 사랑과 신의 속에서 ‘다윗’이 나오고 ‘이스라엘 왕국’이 형성되며,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개별적 성도들의 ‘복음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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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감을 넘어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려 내는 부활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다. 11장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방치(?)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위독한 것을 알고도 ‘이틀’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의도적으로 흘려버리셨기 때문이다(6절). 요한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통해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4절). 이것이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일차적인 메시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복음을 처음 대하는 1차 독자 입장에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어떻게 읽혔을까?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은 1세기 말엽 대략 주후 90년경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교회의 형편은 어땠을까? 교회는 로마의 직접적 박해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는 ‘죽음의 위협’을 받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당시 교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나사로와 같지 않았을까? 지금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데, 곧 오실 것 같은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사로의 위독함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셨던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성도들의 위협에 대처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의 태도에 성도들은 불안해했을 것이고, 그중에 일부는 믿음까지 흔들렸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요한은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언급하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25절)를 다시 한 번 의지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26절)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라고 성도들의 믿음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읽는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요한의 말씀 앞에서 다시 용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로마의 박해를 받지도 않고, 신앙이 있다고 해서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박해나 한국전쟁 중에서 공산당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 시대는 평안의 시대요, 풍요의 시대요, 자유의 시대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이다. ‘안정감’은 이 시대의 ‘생명’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목적도, 좋은 직장을 다니려는 근거도 ‘안정감’에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줄 수 있는 안정감’이 우선이 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불안정감’이다. 안정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 안정감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안정감’을 보장해 준다면 예수는 성도의 ‘신’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도들의 안정감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순간 예수는 더 이상 성도들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짓 ‘안정감’을 약속하는 ‘우상’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안정감’을 보장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안정감을 깨기 위해서 온 분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 주님은 재물이 많은 청년에게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요청하신다. 불안정감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 12:1)라고 말씀하신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불안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으로 오라 하신다. 이 시대는 ‘안정감’이 없다면 죽을 것 같은 시대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주님이 빨리 오셔서 지금 불안정한 나의 상태를 안정케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이틀’을 더 머무심으로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키시고,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신다. 왜? 주님과 함께한 ‘불안’ 속에 참된 신앙이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세상이 주는 허망한 ‘안정감’을 넘어 참된 평안이시기 때문이다.


불안정이 엄습한 시대, 그래서 안정감이 우상이 된 시대. 우리는 다시 한 번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안한 상태’를 견디고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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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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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에서 ‘표적’으로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만을 강조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을 언급하기 전과 그 기적이 마친 이후의 묘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요한이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오히려 여기에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오병이어 기적 이전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6:2).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좇은 이유는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miraculous signs)’을 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 표적이란 아마도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과 같은 치유의 기적일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많은 무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찾는다(요 6:24).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miraculous signs)’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26절) 그를 임금 삼으려는 마음에서였다(15절). 아쉽게도 예수님은 표적(miraculous signs, 요 6:2, 26)을 보이셨으나, 무리는 ‘기적(miracle)’을 보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육으로 난 자인 자연인이 가지는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 영적인 것(표적)을 보고도 육적인 해석(기적)밖에는 해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무리 지어 예수님을 좇았지만, 예수님은 이내 난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로 이들을 돌려보내셨다.(요 6:66).


전도가 힘들어지는 현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뭔가 ‘화끈한 기적’을 보여 주시면 사람들이 여기에 굴복해서 교회로 찾아올 것이고 당연히 믿음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래서 믿은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내 곧 무능한 하나님, 변덕쟁이 하나님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고 ‘더 확실한 기적’을 제공하는 우상을 찾아 자신의 하나님을 삼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만으로는 무지한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기적이 지향하는 바 곧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되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죠이선교회 사역은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서 어떤 사역이 되어야 할까? ‘기적’을 자랑하는 단체가 아니라 ‘표적’으로서 “생명의 떡 되신 예수”를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죠이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요구한다. 아니 내 안에서부터 큰 함성으로 외치는 소리가있다. 죠이선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서 ‘기적’이 되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 되어야 한다. 기적은 육을 지향하고 표적은 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한 것이다. 죠이 스피릿에서 예수님을 첫째로 둔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우선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죠이선교회의 모든 사역이 예수를 지향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죠이를 통해서 배출하는 죠이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참된 죠이어란 예수를 우선에 두는 죠이어이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지향하는 죠이어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육의 생명을 거듭나게 하사 영의 나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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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신앙 속으

글: 김수억 대표


요한복음 2장 13절 이후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나온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본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과격한 행동’으로 성전을 혼란케한 사건으로 예수님의 생애 중 특이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요한이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은 초입에 성전정화 사건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격한 행동을 통해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메시지)를 엿볼수 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은 ‘빛이신 예수님이 어두움을 찾아오셨다’(1:5)는 선언으로 메시지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 시각으로본다면 성전 정화사건은 ‘거룩하신 예수님이 세속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찾아오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때 예수님이 성전의 세속성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절기를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을 봐왔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 장면이 이전과 달리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상할 것이 없을만큼 세속적으로 변해’버리고, ‘장사꾼들의 소굴’처럼 타락한 성전을 향해 일성을 발하신 것이다.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중대한 결단을 하기전 현충사를 찾아가는 정치인들처럼 예수님은 본격적 사역을 시작하면서 성전을 찾아갔고,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행동을 통해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고 있다. 비판을 받아 경각심을 얻고 오히려 새롭게 될 수 있다면 그 비판마져도 은혜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비난과 질타는 있지만 내부적 반성과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한국 교회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한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지는 것 같다. 세상의 질타와 비판에 대한 소리를 ‘사단의 계략’이라 치부하고 아예 귀를 닫고 자신의 신앙만을 곤고히 하려는 무리와 세상의 질타와 비판을 마치 ‘하나님의 진리’처럼 받아들여 제도적 신앙으로부터 이탈하는 무리로 말이다. 한 무리는 교회를 ‘무조건 지켜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한 무리는 교회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찾아오셨다. 그 빛은 이미지와 영으로서가 아니라 ‘실체’와 ‘몸’으로서 불순물로 가득한 이 땅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속’으로 가득하고, ‘장사꾼’으로 넘치는 성전 속으로 찾아 들어오셨다. 세속에 물든 무리들은 세속화된 성전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하나님과 거래하는 삶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갔다. 그러나 세속화된 성전과 타락한 제도적 종교를 거부했던 무리들은 세속화된 성전에서는 희망을 버리고 ‘광야’로 나갔다. 그러나 빛이신 우리 예수님은 ‘더럽혀져 장사꾼의 소굴이 된 성전’ 속으로 찾아오셨다. 왜일까? 


어떤 신앙인은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교회에 머물러 있는가?” 이 말은 아직도 더럽혀진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신앙적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이다. 그 의도를 모르지 않기에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부끄러운 교회가 ‘나’이기에 나는 나를 버릴 수 없어서 여전히 그 세속적이고 타락한 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성전임을 후에 알았다.(요 2:21) 예수님은 부끄러운 성전에 동화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셨다. ‘그 안으로’ 들어가 새롭게 하려고 하셨다. 남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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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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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이선교회를 위해, 죠이선교회를 통해 그리고 싶은 그림


글: 김수억 간사


[간략한 소개]

저는 96년에 서울서지부(지금의 경인,서부,원주)에서 캠퍼스 간사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국민대와 상명대 인천대에서 사역했고, 그 이후 수원개척지부 대표로 사역하면서는 아주대와 경기대 등에서 개척사역을 했습니다. 당시 신학(합신) 공부도 겸했습니다. 그 이후 3년간 경인지부 대표를 하면서 인하대 사역을 했고, 서울서지부 대표로 옮기면서는 2년간 이화여대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는 제가 담당했던 마지막 캠퍼스가 되었고 2009년부터는 2년간 학원사역부 디렉터(지금의 간사훈련원, 해외사역부)로 섬기며 행정 사역을 했습니다. 그 이후 1년간의 휴직을 거쳐 2012년에는 제자훈련학교 소속 간사로 복직했고, 2013년부터는 사역연구소 소장의 일을 맡아 2014년까지 2년간 섬기게 되었습니다. 2008년 죠이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죠이회관을 리모델링할 때, 죠이출판부 간사들과 함께 6개월간 한 사무실에서 일한 것까지 고려한다면 저는 지난 19년 동안 ‘법인사무국을 제외’하고 모든 부서를 깊이 혹은 부분적으로 거쳐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표가 되어 법인사무국과 긴밀하게 일하게 되었구요.

가족으로는 아내(죠이어인 정연)와 아들(고2, 현빈), 딸(중3, 세빈)과 함께 부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천에 있는 중동교회(예장 합신, 담임목사 김태준)에서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죠이선교회를 위해, 죠이선교회를 통해 그리고 싶은 그림]


저는 2014년 8월 이후 이사회를 통해 죠이선교회의 차기 대표로 공식적으로 내정되고, 지난 5-6개월 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가 대표로서 죠이선교회를 위해서 또한 죠이선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 지면을 통해서 간략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세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죠이선교회 내부적으로 따듯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합니다. 어떤 분들은 대외적인 사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오히려 내부적인 결속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매우 위축되어 있습니다. 대학생 사역인 캠퍼스 선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사역자들 바로 캠퍼스 간사들입니다.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역의 열매가 쉽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가 내릴 때, 비를 피해 잠시 쉴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공간에 남아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나가 일하기 위해서 잠시 비를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파가 몰아치는 추위를 장기간 견디기 위해서 잠시 몸을 녹이는 공간이 필요하듯이, 지금 죠이선교회 공동체는 사역자들이 비를 피해 때를 기다리도록 돕고, 추위를 피해 다시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돌고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죠이선교회가 본부 차원에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느끼도록 해주고 해주고자 합니다. 모일 때마다 따듯함이 묻어나오는 모임과 예배가 되기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이전보다는 더 현장 사역자들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소한 것이겠지만 작은 노력을 시작해 보려 합니다. 명절에는 소액의 ‘떡값’이라도 드리려고 하고 간사들의 다양한 대소사도 챙겨보려고 합니다. 대표가 되어 정기적으로 현장의 간사들을 찾아가려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런 일을 시작으로 죠이간사 공동체의 ‘체온’을 높인다면 간사들은 건강해질 것이고 밝아질 것입니다. 간사들의 영적, 정서적 건강이 캠퍼스를 비롯한 현장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는 죠이선교회가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도록 하려 합니다.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죠이선교회는 2016년 선교한국 대회이 주관 단체가 되었습니다. 죠이의 대표는 당연직으로 ‘대회 조직위원장’이 되고, 또한 ‘대회 준비위원장’도 죠이에서 맡게 됩니다. 선교한국 대회와 관련하여 죠이선교회가 대외적으로 드러나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대표 첫해부터 큰 대회의 조직위원장직을 맡게 되어 부담스럽기는 합니다만,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서 죠이선교회의 체질이 다시 한번 선교적 공동체로 변화되길 기대합니다. 또한 선교한국 2016년 대회를 잘 치루어서 한국 교회와 선교계에 죠이선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해외선교단체와의 협조와 국내 지역교회의 후원을 이끌어내는데도 중요한 자원이 되리라 봅니다. 

죠이는 올 해로 창립 57주년이 됩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전문분야에서 사역해 온 경험과 컨텐츠가 지역교회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죠이출판부에서 출간하는 책과 더불어 제자훈련학교에서 하는 제자훈련과정도 오랜 시간 여러 사람들을 통해 검증된 귀한 프로그램입니다. 수년 전부터 지역교회(일산 거룩한 빛 광성교회)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죠이제자훈련과정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좋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불어 죠이에서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해오면서 쌓아온 성경프로그램을 죠이동문들과 교회에도 오픈한다면 ‘건강한 교회관을 가진 죠이성경공부 프로그램’은 지역교회 성도들에게도 큰 유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죠이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던 ‘복음수양회’는 동일하게 지역교회 청년대학생들에게도 복음을 통해 새로워지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훈련원에서 간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정기적인 ‘다면진단평가’는 타단체와 교회 사역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도 잘 활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죠이선교회가 이미 가지고 있는 컨텐츠를 잘 다듬고 가공한다면 수년 내에 한국 교회 성도와 다른 단체를 도울 수 있는 귀한 내용을 갖추리라 봅니다. 


셋째는 죠이선교회를 거쳐가는 ‘사람들을 키우는 조직’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제가 사역연구소 소장을 하면서 만들었던 블로그의 타이틀이 ‘죠이간사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진다’입니다. 타이틀을 그렇게 짓고 나서, 너무 큰 꿈이라 허황되게 들리기 보다는 오히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더욱 컸습니다. 죠이선교회라는 단체가 크지 않지만, 죠이선교회를 거쳐가는 모든 사역자들은 죠이선교회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익히고, 죠이선교회라는 조직은 그 사역자를 잘 케어하여 성장하도록 돕는 단체가 되도록 하려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협력 사역자로 오랜시간을 보내면서 죠이선교회가 지역교회와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죠이선교회는 지역교회라는 조직(?)과 일반 조직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매한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일반 지역교회 사역자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조직문화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이런 경험은 일반적인 지역교회 사역자들은 경험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죠이선교회 출신의 간사들은 사역 기간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일반 목회자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조직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사역자에게 인격적인 리더십을 개발하는데 매우 유익한 기회가 될 것이기에 체계적으로 잘 훈련되도록 돕는다면, 죠이선교회 출신의 사역자들이 장기적으로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책임져갈 수 있는 일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간사훈련원 내의 인사팀은 ‘다면진단평가’와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한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마친다면, 사람을 키우기 위한 재정적인 투입이 필요합니다. 간사들의 재교육을 위한 장학금 지원이 중요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다른 지면을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족한 자를 세워주신 하나님과 죠이선교회에 감사하며 이 일에 함께 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린다면,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재정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장학기금의 이자를 통해 운영하던 장학금 액수는 국내외에서 신학을 공부하려는 간사들에 비해서 현재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며 시작하려는 것이 캠퍼스별 동문회가 한 간사의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방식입니다. 죠이선교회는 장기 사역자로서 신학을 공부하는 간사들에게 1년에 30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합니다. 이 말은 한 동문회가 1년에 300만원을 마련해 줄 수 있다면 그 동문회의 이름으로 장학생을 선발하여 지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월 25만원의 후원이면 가능합니다. 혼자라면 쉽지 않지만 캠퍼스 동문들이 함께 한다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월 5만원 후원자 5명 혹은 월 3만원 후원자 8명이면 동문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문회에서 장학생을 한명씩 맡아 준다면 죠이선교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키워낼 수 있고, 더 많은 간사들을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생각은 책상에 앉아서 나온 생각이 아닙니다. 장학금에 대한 필요가 있음을 알렸던 페이스 북의 글을 보고 한 동문이 본부로 장학금 명목으로 800만원으로 헌금해 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만약 그 후원자의 동문회에서 100만원만 더 해준다면 한 간사의 3년 장학금이 되는 액수고, 그러면 그 간사는 그 동문회의 이름으로 지원된 장학금으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안을 처음으로 했던 동문회가 바로 제가 졸업한 인하죠이 동문회였습니다. 인하죠이는 그 제안을 들은 동문 중 한 사람이 100만원을 헌금해 줌으로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문회를 하기 위해 모았던 돈 60여만원을 합하여 초기 장학금 160만원을 마련학 되었습니다. 이 기금을 시작으로 올해부터 장학생을 1명 선발하고, 매 학기 150만원씩 모아서 장학금을 주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동문회별 장학회를 하나씩, 하나씩 확장해 간다면 장기사역 간사들은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얻게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죠이선교회의 사역을 확대해 가는데 장기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죠이간사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에 책임있는 일꾼으로 성장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고 협력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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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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